184화 지금요?
무서운 기세로 순식간에 먹어 치우는 둘.
힘껏 치솟은 꼬리가 무서운 기세로 움직이고 있었다.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침도 먹었으면서.’
정말 대단한 둘이었다.
번뜩이며 음식을 먹는 둘의 모습은 맹수나 다름이 없었지만, 사람들을 둘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은 웃지 못하고 있었다.
아우라.
쑥스러워하는 기색은 어느새 사라지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아해하던 강현은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넘겼네.’
아우라가 먹은 양.
거기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서 움직이는 둘.
곧 둘에게서 시선을 뗀 아우라가 강현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칭찬받아서 올라갔던 귀가 다시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강현은 슬그머니 그 시선을 피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그러나 죄책감이 드는 건 왜일까.
한숨을 내쉬는 강현이었다.
그때, 강현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스테판 남매.
‘앤 님은….’
힐끗 고개를 돌리자 앉아서 정령들을 지켜보는 앤이 보였다.
정령들에게 둘러쌓인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의외네.’
표정은 심드렁해 보였지만, 앤의 눈에 담긴 애정을 읽은 강현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사람들을 꺼리는 앤이지만, 정령은 다른 것 같았다.
강현은 그런 앤을 방해하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마슈는 음식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지만, 아나는 달랐다.
“어, 어떻게 만든 거지?”
누가 상인 아니랄까 봐 강현의 장비를 보며 눈을 빛내는 아나.
이리저리 훑어본 아나가 감탄을 토했다.
“판과 판을 따로 가져와서 연결하는 건가. 갑옷 같군. 이러면 이동도 쉽겠어.”
고개를 끄덕인 아나가 곧 강현을 돌아보았다.
“강현!”
“안 팝니다.”
“…윽.”
단호한 강현의 말에 아나가 입을 오므렸다.
그리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식자재!”
“예?”
“이번에 왕도에서 다양한 식자재를 들고 왔다!”
이번에는 어떠냐 하는 눈빛으로 강현을 바라보는 아나.
그런 아나를 보고 강현은 짧게 감탄했다.
강현의 취향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조금 끌리긴 하지만.’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마을과는 사정이 달랐다. 아나는 상인.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게 분명했다.
‘소문이 나서 좋을 게 없지.’
강현의 거절에 아나가 분한 듯 강현을 돌아봤다.
그러자 옆에 토스트를 먹던 마슈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 그거 강현에게 답례한다고 사 온 거 아니야?”
“호위, 시끄럽다!”
“…내가 오빤데.”
마슈가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아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변하지 않았네.’
곧 손가락에 묻은 케첩을 훑어 먹은 마슈가 강현을 돌아봤다.
“지금 안 바쁘십니까?”
마슈의 물음에 강현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다들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놀라운 건 종족끼리만 모인 게 아니었다.
드물지만 다른 종족과 섞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집단도 있었다.
‘잘 되었네.’
강현의 목적이 달성되었다.
지금은 비록 소수지만 점점 늘어날 거다.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뗀 강현이 다시 마슈를 보았다.
“예. 괜찮아요. 무슨 일이 있나요?”
강현의 물음에 마슈는 허리춤을 가리켰다.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
“아.”
강현은 마슈와 헤어질 때 나눴던 말을 떠올렸다.
‘다음에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그때는 이 녀석도 같이.’
견습 기사.
마슈가 아나의 호위 일을 하기 전에는 견습 기사의 신분이었다.
강현도 관심이 있긴 했지만….
“…지금요?”
이 상황에서? 강현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아나마저도 마슈에게 제정신이냐며 눈을 흘겼다.
그러자 마슈가 멋쩍게 웃었다.
앞에 있던 경기들을 보더니 몸이 달아오른 것이었다.
“역시 힘들겠죠?”
“상관없지.”
강현이 아니었다. 어느새 두꺼운 팔뚝이 강현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란돌프 씨.”
강현의 대답에 란돌프가 씩 웃었다.
“대련하는 거 아니야? 편하게 해. 우리만 즐길 순 없지.”
어째서 대련이 즐기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주변에 있던 기사와 전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요정들마저도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는 강현.
그러나 마슈는 놀란 듯이 란돌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란돌프? 혹시 란돌프 크라파엘 경?”
“오, 나를 아나?”
“기사를 꿈꾸는 이로써 모를 수가 없죠. 영광입니다.”
마슈가 란돌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란돌프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강현에게 장난스럽게 눈짓했다.
내가 이렇게 유명하다.
이런 뜻.
강현은 실소를 흘렸다. 강현도 란돌프가 유명할 거라는 건 잘 알았다.
직접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었다.
왕도에 있던 기사.
영주인 조반테가 힘겹게 데려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노아 씨랑 에밀리야 씨도 마찬가지겠지.’
마을에만 있었다면 모를 거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보니 새삼스레 자신의 옆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다.
“수준이 맞는 호적수를 찾긴 힘든 법이지. 둘에게 도움이 될 거다.”
란돌프가 강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자 강현을 보는 마슈의 눈빛이 바뀌었다.
하지만 강현은 볼을 긁적일 뿐이었다.
‘갑자기 대련이라니…. 하긴, 상관없나.’
기대 섞인 눈빛들.
하지 않겠다고 하면 다들 실망할 게 분명했다.
오로지 앤과 아나만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강현은 검을 들어 올렸다.
여행 갈 때, 란돌프가 선물해 준 진검이었다.
그러자 금세 자리가 만들어졌다.
공터를 둘러앉은 사람들.
그들의 눈이 강현과 마슈에게 향했다.
강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은근히 긴장되네.’
사람들이 보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진검이기 때문인가.
란돌프나 노아, 에밀리야와는 달랐다. 셋과의 실력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덕분에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다.
실전도 경험해 보긴 했지만,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곧 강현과 마슈의 시선이 마주쳤다.
먼저 움직인 건 마슈였다.
가볍게 검을 내지르는 마슈.
챙!
강현 역시 검을 휘둘러 막았다.
이번에는 강현이 발을 내디디면서 검을 휘둘렀다.
마슈의 머리를 노렸다.
챙!
쇳소리가 울리며 둘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 걸음씩 물러났다.
한 번씩 주고받은 상태.
둘 다 전력이 아니었다. 상대를 파악하기 위한 견제였다.
그리고 곧 진짜 대련이 시작되었다.
마슈의 검이 강현의 머리를 노리고 들어갔다.
아까와 다른 빠르기.
짧게 호흡을 내뱉은 강현이 검을 막았다.
‘가벼워.’
미끼였다.
순식간에 방향을 돌려 강현의 가슴을 노려 오는 검.
하지만 강현은 어렵지 않게 막아 냈다.
마슈가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의 검이 막힌 것에 대한 실망감보다는 기꺼움이 큰 것이었다.
이번에는 강현이 발을 내디뎠다.
챙, 챙!
검이 부딪힐 때마다 주변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그러나 사람들의 환호성은 둘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이었다.
‘…란돌프 씨의 말뜻을 알겠네.’
색달랐다. 그리고 그가 말한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셋과는 달랐다.
셋과의 대련이 높은 벽을 두드리는 느낌이라면 마슈와의 대련은 바둑과도 같았다.
서로 수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날아오는 검을 피하는 강현의 눈이 반짝였다.
란돌프가 가르친 검이 강직하다면 마슈의 검은 부드러웠다.
그리고 또 변칙적이었다.
어지럽게 쏟아지는 검날.
하지만 강현은 흔들리지 않았다.
‘에밀리야씨의 움직임은 이보다 현란해.’
강현은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검을 피했다.
그리고는 빈틈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순간적으로 마슈의 눈이 번뜩였다.
일부러 빈틈을 만든 것이었다.
마슈의 몸이 회전하면 강현의 상체가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겼다.’
승리를 직감한 마슈는 손목을 비틀었다.
검날을 검면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강현을 향해 내리쳤다.
하지만 마슈의 검은 허공만 가를 뿐이었다.
‘어?’
눈을 껌뻑이는 마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강현이 있던 자리에는 주인을 잃은 검만이 보일 뿐이었다.
‘검을 버렸어? 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때, 사람들의 환호성이 커졌다.
특히나 요정들의.
그와 함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느새.’
마슈가 뒤를 돌기도 전에 강현의 팔이 뱀처럼 목을 감쌌다.
이번에는 수인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
정신을 차렸을 때, 마슈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강현이 멋쩍게 웃으면서 쓰러진 마슈에게 손을 뻗었다.
마슈는 강현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대체….”
마슈가 말을 잇기도 전에 강현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실수했네요. 검술로 해야 했는데.”
미안한 듯 말하는 강현을 보며 마슈가 눈을 껌뻑였다.
그때, 뒤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나타났다.
“아니, 훌륭하다. 이대로 검술로 겨뤘으면 네 패배였다.”
란돌프였다. 란돌프의 말에 강현이 쓴웃음을 흘렸다.
맞는 말이었다.
그걸 알기에 기회가 왔을 때,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검술 훈련이 아니라 대련이었지. 이길 수 있는 수단을 선택하는 건 바람직해. 너무 쉽게 검을 내던진 건, 좀 실망이지만.”
란돌프의 말에 강현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말과 달리, 란돌프는 기특하다는 듯 강현을 보고 있었다.
“마지막에 그건 저를 흉내 낸 거죠?”
에밀리야였다.
그녀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잔뜩 있었지만 자리를 생각해서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강현은 볼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그제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에밀리야뿐만 아니라 다른 요정들도 흥미로운 눈빛으로 강현을 관찰하고 있었다.
요정의 걸음.
“조금 어설프긴 하지만, 몇 가지 요령만 배우면 쓸 만해질 거예요.”
그리고는 배시시 웃었다.
“제 걸음에 관심이 있으면 진작 말씀해 주시지. 가르쳐 드릴 수 있는데.”
에밀리야의 말에 강현이 쓴웃음을 흘렸다.
그럴 것 같아서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에밀리야의 뒤로 노아가 보였다.
강현과 눈이 마주친 노아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에 마슈를 제압한 기술.
그건 수인족의 체술이었다.
둘과 달리 노아는 제법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강현이 생각해도 너무 깨끗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란돌프가 멍하니 있는 마슈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무 실망하지 말게. 미리 알았다면 이처럼 쉽게 당하지 않았을 거야.”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마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비수를 숨기는 것도 실력이죠.”
마슈는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요정과 수인의 무예.’
마지막 그 순간까지 흔적조차 내보이지 않았다.
알았다면 당연히 경계했을 거다.
덕분에 한순간에 승패가 뒤집혔다.
사실 강현이 말했던 것처럼 쓰지 않으려고 했다가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었지만, 마슈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다음번에는 이리 쉽게 지진 않을 겁니다.”
마슈가 강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현 역시 웃으며 손을 잡았다.
그런 둘의 모습에 주변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그러자 둘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둘도 알고 있었다.
저기서 박수를 치고 있는 하만과 관심 없는 척하면서 이쪽을 힐끗거리는 아우라도 강현보다 강했다.
다른 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둘의 경기는 귀여운 느낌일 거다.
“자, 구경 잘했으면 다시 경기를 시작하지.”
란돌프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