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좋아, 출동해
아우라뿐만 아니었다.
다른 요정들도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나.’
앞에 두 경기를 졌음에도 실망하지 않은 이유는 달리기에서 승리할 수 있을 거란 믿음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승리하긴 했으나.
강현은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현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해맑게 쳐다보는 설기.
설기의 꼬리가 좌우로 살랑거리고 있었다.
“하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집에 가면 삼 일간 고기 없을 줄 알아.”
“컹?”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설기가 눈을 껌뻑였다.
자기가 뭘 잘 못 했냐는 눈빛.
하지만 강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끼이잉.”
설기의 꼬리가 축 처졌다.
불쌍해 보였지만, 강현은 애써 외면했다.
강현은 설기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는 사이 수인족 전사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온몸이 젖은 전사.
강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을 두려워해서 어찌 되나 싶었는데.’
역시나 이변은 없었다.
인간의 기사는 한참이 지난 뒤에나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사내.
란돌프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사내를 내려다본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경기가 끝났다.
그리고 강현은 하만과 제니퍼를 돌아보았다.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란돌프가 외쳤다.
“다음으로는 많이 먹기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한눈에 봐도 덩치 큰 수인과 인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요정 쪽에는….
‘어?’
요정 쪽을 확인한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익숙한 얼굴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떠나지 않고 계속 자리를 지킨 것이었다.
아우라.
옆에 수인과 인간이 서니 더 왜소하게 보였다.
‘정말 나가는 건가?’
강현의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선생님.”
옆에서 하만이 불렀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쌓여있는 토스트.
한쪽에는 베이컨과 달걀.
다른 한쪽에는 과일과 채소.
두 종류였다.
공평성을 위해서였다.
선수들은 이 토스트를 번갈아 가면서 먹어야 했다.
선수들 앞에 네모난 돌이 놓였다.
테이블.
하만과 강현이 토스트를 들고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란돌프는 모래시계를 꺼냈다.
“삼십 분 동안 이 음식을 많이 먹는 이가 이긴다. 시합 도중 물은 자유롭게 마셔도 된다.”
란돌프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사 셋이 커다란 물통을 가지고 왔다.
굳은 얼굴로 서로를 노려보는 수인족 전사와 인간족 기사.
덩치만 보면 란돌프와 비교해도 작지 않았다.
‘아우라 씨는 안중에도 없나 보네.’
둘은 서로를 경계할 뿐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모를 아우라가 아니었다.
아우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바로 시작하지.”
모래시계를 돌린 란돌프가 호각을 불었다.
촤르르.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셋은 토스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음!”
“허!”
수인족 전사와 인간족 기사가 탄성을 내뱉었다.
아우라 역시 놀라서 눈을 껌뻑였다.
방금까지 올라왔던 분노가 사르륵 녹아내리는 느낌.
그러나 곧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음식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수인족 전사와 인간족 기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지금 같은 것이 떠올라 있었다.
‘이거면 할 만하겠는데?’
이렇게 맛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토스트가 사라진다.
빠르게 먹어 치우는 둘.
거의 물 마시듯이 토스트를 입안으로 쑤셔 넣고 있었다.
그와 달리 아우라는 차분하게 씹어 삼키고 있었다.
“아우라! 힘내라!”
“지지마! 돌슨!”
“체엔, 속도가 느리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응원 소리.
수인족 전사와 인간족 기사의 손이 좀 더 빨라졌다.
그러나 아우라는 변함이 없었다.
‘포기한 건가?’
관중들은 그리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체급에서 너무 차이가 났다.
애초부터 요정들은 과식하지 않는다.
그들을 보고 있던 강현이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안 돼.”
“….”
움찔, 몸을 떠는 하얀 털 뭉치.
“저건 시합용이야. 다 끝나면 나눠 줄게.”
어차피 저만한 양을 다 못 먹을 거다.
게다가 아직 재료도 조금 남았다.
강현의 말에 설기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와 꼬리가 축 처졌다.
아직 미련이 남았는지, 테이블 위에 올라온 토스트를 힐끗거리는 설기.
하지만 아까 혼난 것 때문에 섣불리 다가가지 않고 있었다.
그때.
“컥.”
목에 걸렸는지 수인족 전사가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다급히 옆에 있는 물통을 들이켰다.
벌컥, 벌컥.
물통을 내려놓은 수인족 전사가 다시 토스트를 집었다.
그러나 아까보다 속도가 느려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인간의 기사도 물통을 들이켰다.
“돌슨! 덩칫값을 해야지!”
“느리다! 체엔!”
응원에도 둘의 움직임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이어서 또 목이 막혔는지 물을 들이켜는 둘.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인간족의 기사가 손을 들었다.
“더, 더…. 우욱. 못 먹겠습니다.”
속이 거북한지 힘겹게 말을 이어 가는 인간족.
그러자 동료들에게서 야유가 들려왔다.
“우우우! 돌슨, 자신만만하다며!”
“자신만 믿어 달라고 하더니.”
동료들의 외침에 기사는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기사가 뒤로 물러났다.
기사는 더 못 먹겠다고 말했지만, 기권이 아니었다.
누가 오래 먹는 게 아니라 많이 먹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사가 먹은 양은 수인족 전사가 먹은 토스트보다 적었다.
“잘한다! 체엔!”
“그대로만 가!”
동료들의 응원에 토스트 하나를 입으로 가져간 전사가 움직임을 멈췄다.
전기가 떨어진 장난감처럼 정말로 딱, 멈춰 섰다.
“응?”
“체엔, 왜 그래?”
의아해하는 동료들의 물음에도 전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다른 이들도 무언가 심각하다는 걸 알았다.
“우웁.”
빵빵하게 부푼 볼.
갑자기 전사가 한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걸 본 동료들은 기겁했다.
“으악! 이쪽으로 오지 마!”
“다른 곳으로! 다른 곳으로 가란 말이야!”
“입에서! 입에서 뭔가 나오고 있어!”
도망치는 동료들.
전사는 그들을 지나쳐 숲 너머로 사라졌다.
그리고 뒤늦게 들려오는 소리.
“우웨에에에엑.”
처절한 소리에 사람들이 몸서리쳤다.
“끝났네.”
“그래, 끝났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람들.
“그래도 이기긴 한 건가?”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도중에 불상사가 벌어지긴 했지만, 인간족 기사보다 많이 먹은 건 확실했다.
기사는 남은 토스트를 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욕심이 생겼지만, 더 먹었다가는 수인족 전사와 비슷한 상황이 될지도 몰랐다.
이럴 바에는 겸허히 패배를 맞이하는 게 나았다.
‘…인간의 존엄이라도 지켜야지.’
그때.
작은 소리가 기사와 관중들에게 들려왔다.
얌얌얌얌얌.
그제야 사람들은 또 다른 선수가 있었다는 걸 기억했다.
아우라.
그녀는 방금 소란에도 미동도 없이 토스트를 먹고 있었다.
야금야금.
사람들은 그런 아우라를 보며 감탄했다.
“대단한 집중력이야. 흔들림이 없어.”
“그래, 필시 전사로서의 능력도 뛰어나겠지.”
처음과 같은 속도.
조급해하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자신의 속도를 지켜 가고 있었다.
부동심.
전사가 가져야 할 덕목이었다.
“그래도 너무 차이 나는데?”
“아니야.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약속한 삼십 분은 아직이었다.
“잠깐만, 지금까지 물을 한 모금도 안 마셨어!”
“허, 작은 몸에 대단하군.”
처음에는 긴가민가하게 바라보던 이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대로라면….”
우승을 노려볼 수도 있었다.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우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토스트를 먹을 뿐이었다.
얌얌얌얌얌.
토끼가 당근을 먹는 것처럼 토스트가 입안으로 사라져갔다.
“…힘내라! 요정 아가씨!”
“할 수 있어!”
조금씩 응원이 들려왔다.
요정이 아니었다.
인간과 수인. 그들이 아우라를 응원하고 있었다.
“시커먼 아저씨들한테 지지 마라!”
“그래, 저런 아저씨 따위 이겨 버려!”
앉아서 쉬고 있던 기사가 동료들을 향해 눈을 흘겼지만, 동료들은 오히려 ‘뭐? 어쩌라고.’ 하고 기사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억울한 맘을 담아서 입을 열었다.
“…난 아저씨가 아니야.”
나이도 기사 중에서는 어린 편에 속했다.
그러자 기사들의 야유가 들려왔다.
“우우우!”
“우우. 그 얼굴로 총각 행세냐!”
까드득.
이가 갈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움직였다가는 안에 있는 게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너무 급하게 먹었어.’
아직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평소보다 덜 먹었다.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물이 함정이었다.
기사의 시선이 아우라에게 향했다.
차분하게 씹어서 삼키는 아우라.
토스트 하나를 더 집는 아우라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졌네.’
방금 걸로 기사가 먹은 양을 따라잡았다.
기사는 모래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기사의 시선이 수인족 전사가 먹다 남긴 토스트로 향했다.
차이는 열 개 정도.
‘…그래, 기왕 이리되었으니 이겨라.’
기사는 아우라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 * *
기사뿐만이 아니었다.
수인, 인간, 요정이 하나 되어 아우라를 응원하고 있었다.
“얼마 안 남았어!”
“요정 아가씨! 힘내!”
“할 수 있다!”
하나, 또 하나.
토스트가 줄어갔다. 그리고 모래시계의 모래도 점차 줄어갔다.
그리고 모래시계가 멈췄을 때.
아우라의 손도 같이 멈췄다.
“…잘 먹었습니다.”
일어나서 입을 닦는 아우라.
그녀의 앞에 놓인 토스트는 수인족 전사가 먹다 남긴 토스트보다 하나 적었다.
즉, 수인족 전사보다 하나 더 먹었단 소리였다.
“해냈어!”
“멋지다! 대단한 끈기야!”
“크,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 존경스럽군.”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모두 진심으로 아우라를 축하해 주고 있었다.
패배한 기사 역시도 박수를 쳤다.
숲으로 떠난 수인족 전사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번 경기의 승자는 요정이다!”
란돌프가 경기가 끝났음을 알리자 다시 한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란돌프는 손을 들어서 그들을 진정시켰다.
“다음 경기는 점심을 먹고 한다. 모두 즐기도록!”
강현이 하만과 제니퍼를 보았다.
둘은 강현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들의 차례였다.
하만이 남은 재료로 다시 토스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제니퍼가 잔에 음료수를 따랐다.
강현은 바로 도우를 펴기 시작했다.
점심은 피자와 토스트였다.
거기다 아침에 먹고 남은 꼬치와 어묵탕까지.
호화스러웠다.
사람들이 경기가 끝나고 남은 토스트를 집었다.
그리고 몇몇은 시합이 끝난 아우라에게 다가갔다.
“요정 아가씨. 아까는 대단했어.”
인간과 수인들이었다.
사람들의 칭찬에 아우라가 쑥스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그런 아우라를 요정들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강현의 눈이 남은 토스트로 향했다.
다른 곳과 달리, 수인족 전사가 먹던 토스트는 다들 손을 안 대고 있었다.
하나씩 집어 먹어서 손이 닿았을 리가 없는데, 피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럴 만하지.’
머리로는 이해해도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아니어도 먹을 게 많았다. 굳이 찝찝한 걸 먹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강현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끼잉, 끼잉.”
아래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니 설기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강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언제 왔는지 모나가 씩씩거리고 있었다.
마치 시동이라도 걸듯이.
코에서 김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잔뜩 흥분한 둘을 본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출동해.”
“컹!”
“바압!”
둘이 동시에 뛰쳐나갔다.
목표는 당연히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수인족 전사의 토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