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편히 즐기게나
설기와 달리 토리는 강현의 주머니에 쏙 들어와 있었다.
강현은 피식 웃고는 천막의 테이블에 앉았다.
당숙진은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때, 아주머니 한 분이 오셔서 전과 제육볶음과 막걸리를 가져다줬다.
전과 제육볶음은 방금 셋이 만들었던 것이었다.
숨을 내쉬자 하얀 김이 올라올 정도로 추웠다.
천막도 있고, 난로도 있었지만, 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곳곳에 놓인 천막들은 정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다들 즐기고 있었다.
“자네도 그만 보고 들게나.”
황대길이 말하자 매장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던 당숙진이 헛기침했다.
종이컵 위에 차오르는 막걸리.
“허, 참.”
오늘 도대체 몇 번이나 탄식을 뱉었는지 모르겠다.
당숙진은 황대길을 따라서 종이컵을 들어 올렸다.
마시자 시원한 막걸리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이 시간에 술을 마시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당숙진.
아직 점심도 전이었다. 당숙진의 말에 황대길이 웃음을 흘렸다.
“이것도 같이 드십시오.”
“아, 응언 씨.”
응언이 대접과 국자를 놓고 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건 바로 뜨끈뜨끈한 어묵탕이었다.
셋이 한 게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니 난로들 위에 무언가가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어묵탕서부터 고구마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마을 사람들이 각자의 집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런 마을을 구경하던 당숙진이 강현을 돌아보았다.
“이 친구야 그렇다 쳐도 자네가 여긴 왜 있는 건가?”
질책이 아니었다.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었다.
눈살을 찌푸린 당숙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이 친구 때문인가?”
전공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황대길에게 배울 게 많을 거다.
그러한 당숙진의 말에 황대길의 눈썹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황대길이 입을 열기 전에 강현이 나섰다.
“이곳 생활이 잘 맞아서요.”
의아해하는 당숙진.
이어서 황대길이 설명했다.
“반댈세. 나 때문에 강현이 있는 게 아니라, 강현 때문에 내가 여기 온 것이라네.”
“음?”
당숙진의 눈이 커졌다. 믿기지 않는다는 당숙진의 시선에 강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강현 말대로 이곳 생활이 나쁘지 않아.”
당숙진이 한동안 황대길과 강현을 번갈아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둘 다 여기 있었구먼.”
낯선 목소리와 함께 그림자 둘이 일행에게 다가왔다.
“또 매장에 틀어박혀 있는 게 아닌가 걱정했더니, 먼저 먹고 있던 건가?”
섭섭한 듯 말하는 이는 정기훈 작가였다.
그 옆에 있는 건 이정환.
이정환의 손에는 접시가 들려 있었다.
강현과 황대길을 찾으러 매장에 다녀온 것이었다.
“지인이 와서 먼저 먹고 있었네.”
“지인?”
그제야 정기훈 작가와 이정환의 시선이 당숙진에게 향했다.
정기훈 작가는 당숙진의 얼굴이 낯이 익은지 눈살을 찌푸렸다.
기억을 더듬는 것이었다.
“아, 그, 중식의….”
“…당숙진이요. 두 분은.”
“저 친구는 정기훈이고 난 이정환이라네. 동네 친구지.”
이정환이 웃으며 말했다.
동네 친구.
그 말에 당숙진의 시선이 황대길 쪽으로 또르르 옮겨 갔다.
황대길은 담담히 고개만 끄덕였다.
셋이 이 마을에 같이 산다고?
아니, 강현까지 넷이었다.
당숙진은 힐끗 마을을 확인했다.
혹시나 카메라가 있는지 보려는 것이었다.
그런 게 아니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 누구도 여길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지나가면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익숙한 모습. 하루 이틀 지낸 게 아니란 걸 당숙진이 모를 리가 없었다.
결국, 당숙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반갑소이다.”
당숙진의 인사에 둘 역시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 * *
술잔이 오가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당숙진은 셋이 마을에 오게 된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저 친구의 말대로네.’
강현.
이 무리의 중심은 강현이었다.
화가, 피아니스트, 요리사.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들끼리 술잔을 나누고 있었다.
셋의 이야기를 들으니 강현에 대한 인상이 달라졌다.
‘훌륭한 청년이야.’
요리 실력만큼이나 난 사람이었다.
물론, 마을의 역할이 컸다.
‘다른 곳이었다면 이렇게까지는 변하지 않았겠지.’
당숙진이 강현을 힐끗 보았다.
당숙진이 알던 강현은 지금의 강현과 달랐다.
고슴도치 같은 사람.
과거의 강현은 다가오는 이들에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놀라운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어묵탕 국물을 홀짝인 당숙진이 황대길에게 입을 열었다.
“저 친구랑 같이 연구한다고?”
“그렇네. 내가 많이 배우고 있지.”
황대길의 말에 당숙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당숙진이 아는 황대길이라면 예의상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당숙진을 보며 황대길이 입을 열었다.
“나이로 보면 안 되네. 강현은 이미 일가를 이루었어.”
일가(一家).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다는 소리였다.
강현의 나이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지만.’
재능만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만한 경험이 받쳐 줘야 했다.
그러나 황대길이 허튼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황대길이 평소에 얼마나 칭찬에 야박한지 알기 때문이었다.
제자에게도 쉽게 칭찬하는 일이 없었다.
당혹스러워하는 당숙진을 보며 황대길이 웃었다.
“물론, 자네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거야.”
강현 역시 황대길의 눈에 부족한 점이 보였다.
황대길이 말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더더욱 의아해하는 당숙진을 향해 황대길이 입을 열었다.
“나중에 그의 요리를 먹어보면 알 걸세.”
“허….”
당숙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축제였다. 이런 날에 자신을 위한 요리를 해 달라고 할 순 없었다.
원래라면 하룻밤만 머물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저리 말하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막걸리를 홀짝이던 강현은 당숙진의 뜨거운 시선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나저나 자네들의 지인들은 아직인가?”
황대길의 물음에 정기훈 작가가 입을 열었다.
“저녁 전까지 오라고 했으니 슬슬 올 걸세.”
이정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본 행사는 저녁부터였다. 저녁에 바비큐와 캠프파이어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점심은 간단한 안줏거리로 준비한 것이었다.
“마침 저기 하나 오는군.”
이정환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한 노인이 마을을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많은 사람 중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건 노인이 들고 있는 물건 때문이었다.
바이올린 케이스.
저런 걸 들고 올 사람은 이정환의 지인밖에 없었다.
곧 노인도 이정환을 발견했는지 휘적휘적 걸어왔다.
“진짜 잔치 중이군. 음, 이분들은 내가 생각하는 그분들인가?”
노인이 이정환의 곁에 있는 일행들을 발견하더니 눈을 빛냈다.
일행들은 일어서서 인사를 나눴다.
노인의 얼굴은 강현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뉴스에서 몇 번이나 본 유명인이었다.
“갑자기 악기를 가져오라고 해서 뭔 일인가 싶었는데, 설마 여기서 연주하라는 건가?”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여는 노인.
그런 노인을 향해 이정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런 곳에서는 연주를 못 하겠는가?”
“이 추위에?”
“못하겠으면 안 해도 되네. 연주 안 한 지도 오래되었을 테니 손가락이 굳었을 테지.”
“연주를 안 해서가 아니라 날씨 때문이지! 그리고 누가 못한다고 했나?”
툴툴대던 노인이 젓가락을 들어서 전을 먹었다.
이미 다 식은 전.
그 모습을 본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로 가져올게요.”
그러자 노인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네. 이런 곳에선 이런 게 또 맛이야.”
그리고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옆에 있던 정기환 작가가 막걸리를 권유했지만,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연주가 끝나고 맘 편히 마시겠소. 술 마시고 실수라도 하면 저 친구 잔소리가 쏟아질 테니.”
노인이 이정환을 턱짓했다.
이정환도 첫 잔만 마시고 그 뒤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좀 늦는다고 하네.”
미리 연락한 걸까? 이정환이 의아해하자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오기 전에 위에서 맞춰 볼 모양이야.”
노인의 말에 이정환이 실소를 흘렸다.
“여기서 맞춰 봐도 충분한데.”
고작 캐럴 두 곡이었다. 그들의 실력이라면 연습을 안 해도 충분했다.
그러자 노인이 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의 공연이니 다들 설레하는 거지. 이제 다들 할 일 없는 뒷방 늙은이들 아닌가?”
노인의 말에 이정환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자네의 공연 때문에 다들 헛바람이 찬 거야.”
그들의 심정이 이해되기 때문이었다.
은퇴한 이들이 공연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름값이 있기에 시선이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은퇴했다고 해 놓고 거창하게 열 수도 없었다.
“그럼 자네도 그들이랑 같이 오지 그랬나?”
이정환의 말에 노인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이정환을 보았다.
“그래도 누구 하나는 자네와 맞춰 줘야 하지 않겠어?”
이정환을 위해서 일찍 온 거란 말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정환이 눈을 껌뻑이다 웃음을 터트렸다.
강현은 그런 둘을 보며 어묵탕 국물을 홀짝였다.
우정.
아니었다.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는 끈끈한 무언가가 두 사람을 엮고 있었다.
같은 시대, 같은 길을 걷는 이들끼리의 교감.
강현으로서는 짐작하기 힘든 것이었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이정환이 이번 일을 흔쾌히 받아들인 게 마을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공연에서 느끼던 감정.
이제는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감각.
이정환은 지인들에게도 그 감정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을 거다.
‘여기만큼 좋은 곳은 없지.’
자신들끼리 연주하는 것과 관객이 있는 건 달랐다.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슬쩍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두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전 먼저 일어나 볼게요.”
“나도 같이 일어나지.”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대길과 당숙진이 따라서 일어났다.
그러나 곧 황대길이 당숙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는 쉬게. 손님 아닌가?”
“아니….”
“맞습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할게요. 이제 아까처럼 바쁘진 않을 거예요.”
강현의 말대로 먼저 온 손님들은 식사가 끝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이 가져온 음식들도 많았다.
이제 새로 오는 이들 것만 만들면 되었다.
나머지는 저녁 바비큐 준비뿐.
둘이 해도 충분했다.
황대길에 이어서 강현의 대꾸에도 쉽사리 앉을 수가 없었다.
이 자리도 나쁜 건 아니었지만, 셋이 주방에서 요리하는 게 더 낫기 때문이었다.
당숙진 역시 이렇게 정신없이 요리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아니, 이렇게 손발이 맞는 상대는 과거에도 드물었다.
좀 더 어울리고 싶었다.
머뭇거리는 당숙진을 오해한 황대길이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편히 즐기게나.”
그리고 강현과 함께 매장으로 향하는 황대길.
당숙진은 미련이 남은 얼굴로 둘이 떠나는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그렇게 매장으로 돌아온 강현이 가장 먼저 본 건 배가 산처럼 커진 설기였다.
“맙소사.”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대체 얼마나 먹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