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저건, 이미 병기야.
구이용으로 가져온 소시지와 소고기를 작게 자른다.
그리고 냄비에 기름을 넉넉하게 두르고 고기와 소지기를 같이 볶았다.
치익.
연기와 함께 올라오는 고기 향에 강현이 미소 지었다.
처음은 센 불.
소고기의 육즙이 빠져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이후 불을 줄인다.
‘원래는 베이컨으로 기름을 내는 것이지만.’
베이컨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대신 강현은 기름에 고기의 향이 충분히 배어들 수 있게 볶아 줬다.
그렇게 향이 배어들면 고기와 소시지를 건진다.
이후 그 기름에 채소를 넣어 준다.
양파와 당근, 버섯, 마늘.
그렇게 볶다가 버터를 넣어서 풍미를 더 해 준다.
재료들이 볶아지자 강현은 만들어 온 토마토소스를 꺼냈다.
‘넉넉하게 챙기길 잘했네.’
아침에 먹으려고 챙긴 것이었다.
지금 쓰더라도 아침에 쓸 양은 충분했다.
그렇게 물과 토마토소스, 건져 냈던 고기와 소시지를 넣고 마지막으로.
강현은 꺼내 놓았던 와인을 부었다.
그러자 로멘과 란돌프의 눈이 커졌다.
“아니, 포도주를?”
강현은 의외란 듯이 로멘을 돌아보았다.
란돌프가 아까워할 거라는 건 예상했었지만, 로멘도 저리 반응할 줄은 몰랐다.
둘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와인을 붓고 끓이는 강현.
끓기 시작하자 토마토와 와인, 고기의 향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낯선 향에 일행들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일행의 표정도 바뀌었다.
이어서 충분히 졸여 준 후 불을 껐다.
강현은 완성된 요리를 보며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미 향만으로 맛이 짐작이 갔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음.”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강현.
토마토와 와인의 신맛이 날아가서 단맛이 부드럽게 퍼져 갔다.
‘나쁘지 않아. 베이컨이랑 전분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없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갑작스럽게 만든 것치고는 훌륭했다.
비프 부르기뇽.
프랑스 가정 요리 중 하나.
그렇게 고개를 들자 자신을 바라보는 네 쌍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눈동자에 깃든 열망을 읽은 강현이 미소 지었다.
“그럼, 먹을까요?”
넷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일행들은 그릇에 담긴 비프 부르기뇽을 보며 눈을 껌뻑였다.
“…이건, 스튜인가?”
“예.”
강현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반적인 스튜와는 달랐다. 한국인이라면 갈비찜을 떠올릴 거다.
일행들은 천천히 숟가락을 떴다.
그리고.
“음!”
“흐음.”
저마다 감탄사를 토했다.
이미 설기는 정신없이 먹고 있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
옆에서 토리도 버섯 하나를 먹더니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또 한 입. 다시 부르르 떠는 토리를 보니 저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좋군!”
로멘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런 로멘을 보며 강현은 남은 와인을 꺼냈다.
“반 잔씩은 돌아가겠네요.”
네 개의 잔에 술을 따랐다. 강현의 예상대로 겨우 절반도 안 되는 양.
그러나 일행들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와인을 마신 후, 란돌프가 입을 뗐다.
“잘 어울리는군.”
지금 마시는 와인이 재료로 들어갔으니 잘 어울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세 입맛을 다녔다.
말을 하지 않지만, 술이 부족한 것이었다.
피식, 웃은 강현은 배낭에서 소주를 꺼냈다.
“비록 한 병뿐이지만….”
로멘과 에밀리야를 돌아보자 둘 다 고개를 저었다.
란돌프와 달리 그들의 잔에는 와인이 남아 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여유 있게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네.”
로멘의 말에 에밀리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컥벌컥 들이켜야 좋은 게 아니었다.
덕분에 란돌프도 편하게 마실 수 있었다.
소주병의 뚜껑을 여는 란돌프.
‘아니, 잡아 뜯는 거지.’
콰드득.
페트병을 딸 때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슬쩍 내려놓은 뚜껑을 보자 다시 잠글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일회용.
‘그래도 많이 발전했네.’
처음에는 그조차도 불가능했다.
소주를 마신 란돌프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이거지. 좋은 음식과 좋은 술. 그리고 좋은 사람들.”
다른 이들도 공감하는지 웃음을 흘렸다.
그때, 로멘이 에밀리야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요정 아가씨는 강현의 모험담을 듣지 못했겠군.”
모험담.
거창한 말에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그러나 에밀리야의 눈은 반짝였다.
“예. 강현 씨만 괜찮다면 듣고 싶네요.”
말하면서 강현을 바라보았다. 흥미로워하는 그녀의 눈빛에 강현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두 분은 듣지 않았어요?”
“그런 이야기는 들어도 들어도 재미있는 법이지.”
“옳소!”
옆에 있던 란돌프가 맞장구를 쳤다.
쓴웃음을 흘린 강현은 다시 이야기를 풀었다.
사실 강현도 그동안 남들에게 이야기할 수 없어서 답답했다.
‘여행이 어땠냐고 물어볼 때마다 얼버무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곳에서라면 아무 거리낌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에밀리야뿐만 아니라 둘 역시 처음 듣는 이들처럼 흥미진진하게 강현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리고 강현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넷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정말 좋은 경험을 하셨네요.”
와인 잔을 내려놓은 에밀리야가 강현을 보며 웃었다.
강현은 쑥스러움에 웃음을 흘렸다. 사실 강현에게는 큰 모험이었지만, 이들에게 이야기하기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에밀리야의 경우 종족 전쟁을 직접 겪었다.
게다가 란돌프와 로멘은 또 어떤가.
둘이 처음 만난 건 전장에서라고 했다.
‘…잠깐만.’
거기까지 생각한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자신이 이야기할 게 아니라, 오히려 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쪽 이야기들이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셋이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가 있을 거다. 벌써 제법 만났지만, 그에 대해서는 간단히만 언급하고 있었다.
‘아픔이겠지.’
진짜 전장은.
강현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치열하고 잔혹할 거다.
당연히 흥미로 물어볼 만한 것도 아니고, 쉽사리 꺼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강현은 슬며시 셋을 보았다.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셋.
강현은 이 자리가 그들에게 있어서 쉼터가 되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그러하듯.
그때, 강현과 눈이 마주친 에밀리야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숲의 현자란 분이 정령목을 다루셨다고요?”
“예.”
강현이 끄덕이자 에밀리야가 턱에 손가락을 올렸다.
“한번 만나 보고 쉽네요. 정령목은 귀해서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물며 직접 계약까지 했다니.”
만일 가까이 있었다면 직접 만나 볼 기세였다.
아니, 실제로 위치는 그리 멀지 않았다.
그녀의 걸음이라면 많이 걸리지 않을 거다.
하지만 앤이 있는 곳은 인간의 영역이었다.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난 그 남매가 보고 싶군.”
란돌프가 불쑥 입을 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동생이 아니라 오빠 쪽이었다.
“비록 견습이지만, 왕실 기사단 소속이었다면 제법 실력이 있겠지. 두말라 왕국의 기사와는 겨뤄 본 적이 없어.”
“그 말이 자네의 입에서 나오니 이상하군. 스스로 금칠이라도 하려는 건가?”
왕국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왕실 기사단.
로멘의 지적에 란돌프가 멋쩍게 웃었다.
“옛날입니다. 옛날.”
그 뒤로 아녜스의 이야기도 나왔다. 로멘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어느 때보다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흐뭇해하는 기색이 옆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강현은 로멘이 자꾸 모험담을 들으려는 것도 아녜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럴 거면 한번 찾아가시지.’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다들 저마다의 방식이 있는 것이었다.
그걸 강요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오헨하우어에 대해서 언급하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웃으며 이야기하던 에밀리야가 강현을 돌아보았다.
강현은 그녀의 진지한 눈빛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올라왔다.
“…그나저나 전투가 벌어졌다니 위험했네요.”
“아니, 그렇게 위험하지는….”
“근접이라면 검술과 체술이 있지만, 이번처럼 누군가를 쫓거나 다수와 겨룰 때는 그것만으로 부족해요.”
이제 누군가를 쫓을 일도 없었고, 다수와 겨룰 일도 없을 거다.
“…확실히 장거리를 공격할 수단이 부족하군.”
방어만 할 수는 없었다. 란돌프마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활까지는 아니어도 비상수단 정도는 배우는 게 좋아요. 마침 제가 비도술을 알고 있거든요.”
그녀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불시에 당한 공격. 그 때문에 피하는 게 늦어 버렸다.
그리고 에밀리야의 말에 로멘과 란돌프도 흥미를 보였다.
“요정이 비도도 다뤘나?”
“저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둘의 대화에 그녀가 웃으며 입을 뗐다.
“요정의 기술이 아니라 고블린의 것이에요. 전에 우연히 배울 수 있었거든요. 물론, 그때 배운 것과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요.”
얼마 전처럼 이야기했지만, 벌써 백여 년 전의 일이었다.
“…고블린. 그렇군. 요정은 그들이랑 사이가 나쁘지 않겠어.”
인간과 달리.
로멘의 말에 담긴 뜻을 읽은 에밀리야가 쓴웃음을 지었다.
옆에 있던 란돌프도 고개를 끄덕였다.
“고블린의 비도가 매섭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습니다.”
“약초를 다루는 솜씨도 좋은 친구들이죠.”
에밀리야가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둘은 어색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곧 란돌프가 강현을 돌아보았다.
“확실히 비상수단으로는 충분하겠어.”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옆에 있던 로멘조차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 자네는 식칼을 가지고 다니니 잘 어울리겠군.”
“….”
비상시라고 해도 식칼을 던질 생각은 없었다.
강현은 에밀리야를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운 눈빛.
저 기대를 차마 외면할 순 없었다.
‘…그동안 많이 도와주긴 했으니깐.’
이제는 체력도 올랐을뿐더러 란돌프와 노아의 수업도 익숙해졌다.
결국, 강현의 고개가 움직였다.
그러자 에밀리야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제 저도 강현 씨와 대련할 수 있겠군요!”
기뻐하는 그녀. 강현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비도로 어떻게 대련을 한다는 말인가.
서로에게 던지는 걸까? 상상이 잘 가지 않았다.
그러던 강현은 곧 무언가를 떠올렸다.
‘…대련이 목적이면 배울 굳이 필요가 없지 않나.’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저리 기뻐하는데 물을 끼얹을 순 없었다.
한숨을 내쉬는 강현.
그때, 웃고 있는 란돌프의 눈이 마주쳤다.
그 모습이 괜히 얄밉게 느껴졌다.
“…란돌프 씨도 매번 활을 가지고 다닐 수 없으니 같이 배워 보는 건….”
“음?”
란돌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활을 잘 쏘긴 하지만, 평소에 들고 다니지 않았다. 란돌프 역시 장거리 공격 수단이 없었다.
그러나 란돌프가 입을 열기도 전에 로멘과 에밀리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둘의 웃음에 고개를 갸웃하는 강현.
란돌프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장거리 수단쯤은 있다네. 물론, 에밀리야 님처럼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아니야.”
자리에서 일어난 란돌프가 하늘을 두리번거렸다.
“저 녀석이 좋겠군.”
그리 중얼거리더니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 하나를 주웠다.
의아해하는 강현을 향해 씩, 웃고는 돌을 던졌다.
펑!
공기가 찢어졌다. 순식간에 나무를 부수고 날아가는 돌멩이.
옆에 있던 설기가 벌떡 일어나더니 돌이 날아간 방향으로 쫓아갔다.
어안이 벙벙해진 강현이 눈을 껌뻑이고 있자, 로멘이 어깨를 두드렸다.
“단장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네. 저건, 이미 병기야. 병기.”
“….”
그리고 숲속으로 사라졌던 설기가 머리가 없는 새를 물고 왔을 때, 그 의미를 실감했다.
호탕하게 웃은 란돌프를 보며 강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