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이제 겨울이 왔다
놀란 강현을 향해 란돌프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에밀리야 님이나 노아도 할 수 있을 걸세.”
눈을 크게 뜬 강현이 에밀리야를 바라보았다.
에밀리야는 부드러운 미소로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이게 쉬운 거구나.’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다른 마을에 갔을 때, 그들은 강현이 아는 평범한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이들이 이상한 것이었다.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굳이 활을 안 쓰셔도 되지 않나요?”
그러한 강현의 물음에 란돌프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이 사냥의 묘미 아닌가. 너무 쉽기만 해도 재미가 없지.”
옆에 있던 로멘이 강현의 심정을 대변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기가 이점이 되는 게 아니라 반대였다.
‘역시 이상해.’
강현이 한숨을 내쉬자 새를 물고 있던 설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안 먹어?
그리 묻는 듯한 모습.
강현은 피식 웃은 후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덕분에 내일 아침 메뉴도 정해졌다.
* * *
식사 자리는 밤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로멘은 떠나기 전에 강현처럼 풀을 얻어 갔다. 체념한 듯 란돌프에게 몸을 맡기는 로멘을 보며 강현은 웃을 수 없었다.
그렇게 아침을 맞이한 강현은 푸르른 하늘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스토브를 켜고 물을 끓이려다가 멈췄다.
‘…오늘은 색다르게 해 봐야겠네.’
모처럼 장비를 가져오지 않았던가.
강현은 배낭에서 모카포트를 꺼냈다.
치이이익.
곧 끓는 소리와 함께 커피 향이 주변으로 퍼져 갔다.
매번 보는 광경.
그러나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졌다.
어제의 구름 모양이 오늘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구름뿐만 아니었다.
바람, 향 모두가 달랐다.
강현은 이런 것이 마음에 들었다.
늘 똑같아 보이는 일상에서 소소한 것들을 찾아가는 재미.
바쁜 사회에 있다면 잊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점점 자극적인 걸 찾는 거겠지.’
쉽게 얻을 수 있는 행복.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술이 덜 깼나 보네.”
아니면 아침이라서 그런가. 평소보다 감정적이었다.
피식 웃은 강현은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자신을 보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우왓.”
놀라서 들고 있던 커피가 쏟아질 뻔했다.
가까스로 몸의 균형을 잡은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모나?”
구석에서 강현을 바라보고 있는 건 익숙한 그림자였다.
강현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떠올랐다. 무려 한 달만이었다.
그것도 잠시.
“왔으면 부르지. 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강현이 일어나서 모나에게 걸어갔다. 그러자 슬금슬금 물러나는 모나.
심지어 등까지 돌리고 있었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행동.
강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수풀이 흔들렸다.
“역시 여기에 있었군.”
노아였다.
“안녕하세요.”
강현이 노아를 반갑게 맞이했다. 고개를 끄덕인 노아. 곧 둘의 시선이 모나에게 향했다.
등을 돌리고 있는 모나.
꼬리만이 한 번씩 바닥을 쓸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노아가 혀를 찼다.
“무슨 일 있었나요?”
강현이 걱정스럽게 묻자 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너를 많이 찾았다. 지난주에 너를 만난 걸 안 뒤로 계속 저 상태더군.”
강현뿐만 아니라 노아에게도 같은 식이란 소리였다.
그때, 설기가 텐트에서 나와서 하품했다.
그리고 모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
강현은 그제야 익숙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설기가 삐졌을 때랑 같네.’
왜 몰랐을까. 고개를 흔들었다.
모나에게 다가가서 손을 뻗었다.
“미안해….”
그러나 빠르게 도망치는 모나. 강현이 다가간 거리만큼 떨어진 후에나 멈춰 섰다.
그 모습에 강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단단히 삐졌나 보네.’
하루 이틀 가지고는 풀리지 않을 기세였다.
“설마 어제부터?”
강현의 물음에 노아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새벽에 나왔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설기가 슬그머니 다가가는 게 보였다.
“끼잉.”
위로라도 하는 건가. 몸을 비빈 후 모나의 뺨을 핥았다.
반응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강현 때와는 달리 도망치지 않았다.
강현만큼 설기에게 섭섭하진 않은 것이었다.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시간이 지나면 풀릴 거다.”
옆에 있던 노아가 담담히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강현. 그러나 속이 편하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고 진짜로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설기가 있으니 다행인가.’
설기마저 거부하지 않는 걸 보니 개선의 여지는 있어 보였다.
‘다음에는 모나가 좋아할 만한 걸 가져와야겠네.’
모나에게서 시선을 뗀 강현이 노아를 보았다.
“노아 씨. 드릴 게 있어요.”
강현은 모카포트가 든 상자를 건넸다.
“이건.”
“선물입니다. 커피를 내리는 기구예요.”
“커피라면 네가 들고 있는 그 건가?”
전에 본 적이 있기에 바로 알아챘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아가 상자를 옆구리에 챙겼다.
“고맙다. 잘 보관하지.”
사용하는 게 아니라 보관. 심지어 사용법조차 묻지 않고 있었다.
강현은 예상했던 반응이라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카샨 님 것도 안 챙겼지.’
차라리 술을 선물하는 게 나았다. 그러나 한쪽만 주고 한쪽은 안 줄 수 없기에 준비한 것이었다.
어차피 선물하는 건 강현의 마음 아니겠는가.
그걸 어떻게 사용할지는 선물 받은 이들이 결정할 문제였다.
그렇게 상자를 받아 든 노아도 멋쩍었는지 말을 붙였다.
“…하만은 좋아하겠군. 하만에게 부탁해 보지.”
노아의 말에 강현이 탄성을 뱉었다.
하만에 대해서 잊고 있었다.
‘…그래도 제자인데.’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모나에 이어서 하만까지.
시간이 지나면서 챙겨야 할 이들이 늘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만큼 강현 역시 이곳에 적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곳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뇨. 하만 씨 거는 제가 따로 준비할게요.”
굳이 둘이 같이 쓸 필요는 없었다.
‘그리 비싼 물건도 아니고.’
강현의 말에 노아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노아가 망설였던 이유가 짐작되었다.
‘같이 써도 된다고 말하고 싶으셨겠지.’
그러나 하만의 생각은 다를지 몰랐다. 게다가 강현의 성의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그냥 넘어간 것이었다.
강현은 노아가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이 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강현은 그런 노아를 향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모처럼이니 같이 식사라도 하실래요?”
아직 아침을 먹기에는 좀 일렀다.
그러나 설기도, 토리도 잠에서 깬 상태였다.
이대로라면 일찍 식사해도 나쁘지 않았다.
강현의 물음에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가벼운 식사 자리.
모나도 깨작깨작 먹긴 했지만, 끝끝내 강현을 보지 않았다.
‘먹는 양도 그렇고.’
평소와 달랐다. 그래도 먹는 것 자체는 포기하지 못했다는 게 모나다웠다.
그렇게 둘을 떠나보낸 강현은 짐을 챙겼다.
“갈까?”
“컹!”
힘차게 짖는 설기. 덕분에 머리 위에 있던 토리가 데구루루 굴러 내려왔다.
강현은 떨어지려는 토리를 잡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그대로 주머니 속으로 쏙, 숨는 토리.
땅에서 떨어지면 반응도 느려지는 토리였다.
강현은 토리의 귀여움에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천천히 숲을 지나쳐서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넘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강현을 맞이했다.
“으.”
저도 모르게 몸을 떠는 강현.
‘갈 때보다 더 추워진 거 같은데?’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때.
“컹! 컹! 컹!”
창고 밖을 보며 짖는 설기.
의아해하던 강현이 창고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강현의 눈이 커졌다.
“…눈?”
창고 밖에는 새하얀 눈이 내려오고 있었다.
눈을 본 설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슬그머니 발을 내미는 설기. 그러나 눈이 발 위에 떨어지자 쏙, 안으로 넣었다.
그 모습에 강현이 실소를 흘렸다.
“눈이 처음이겠구나.”
강현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 꼬리와 귀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강현은 먼저 창고 밖으로 나왔다.
뽀드득, 뽀드득.
간밤에 얼마나 눈이 온 걸까.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났다. 그런 강현을 본 설기가 용기를 내서 창고 밖을 나왔다.
뒤뚱뒤뚱 걷는 설기.
전에 난방 위에서 봤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망가졌네.’
강현은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차가움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강현에게는 설기와 같은 털이 없었다.
당연히 추위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방에 도착하자 벗어났던 패딩을 걸쳤다.
차가운 방에 나눴던 패딩이라 차갑긴 마찬가지였지만, 금방 온기가 올라왔다.
패딩의 지퍼를 끝까지 올린 후에나 강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시 밖으로 나가자 이제 적응이 되었는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설기가 보였다.
새하얀 눈 위를 돌아다니는 설기.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강현은 그런 설기를 보고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집은 나중에 가야겠네.’
저렇게 좋아하는데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 정도의 눈이라면 차도 잘 다니지 않을 거다.
그러다가 문뜩 주머니 안에 있던 토리를 떠올렸다.
지퍼를 내리자 토리가 쏙 고개를 내밀었다.
“토리도 놀래?”
강현의 말에 슬쩍 손을 내미는 토리.
하지만 곧 고개를 젓고는 패딩 안으로 들어갔다.
강현만큼이나 추위에 약한 모습이었다.
강현은 그런 토리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리를 위해서 불을 피우려는 것이었다.
아궁이가 아니라 마당에 망가진 화로대를 이용해서 불을 피웠다.
찌그러져서 제대로 고정되지 않았지만, 불을 피우기에는 충분했다.
‘얘는 여기에 놔둬야겠네.’
이제 이걸로 요리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버리기는 아까웠다. 화로 자체로는 기능하기 때문이었다.
강현은 안 쓰는 농기구와 솥뚜껑을 이용해서 지붕을 만들어 줬다.
그러자 그럴싸한 모양이 나왔다.
화로가 작아서 어렵지 않았다.
곧 작은 화로에서 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입에서 나온 새하얀 김이 연기를 따라서 올라갔다.
토리도 슬쩍 고개를 내밀더니 화로 앞으로 나왔다.
솥뚜껑 위로 떨어지는 눈.
뚝, 뚝, 뚝.
마치 빗물처럼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다.
강현은 배낭에서 의자를 꺼냈다.
그렇게 불을 쐬고 있자 설기가 다가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강현은 숨을 삼켰다.
설기의 몸집이 두 배나 커졌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털이 아니라 눈이었다.
한숨을 내쉰 강현이 설기의 몸에 묻은 눈을 털어 냈다. 그러자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직 몸 안에 털이 남았는지 몸을 흔드는 설기.
강현의 패딩뿐만 아니라 화로에도 튀어서 연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화로 앞에 있다가 봉변당한 토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설기를 노려봤다.
강현은 토리의 뺨을 간지럽혀 주고는 설기를 보았다.
아직 눈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얼굴에 묻은 눈들.
특히나 입 주변에 많았다.
“…너 눈이라도 파먹었어?”
강현의 말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설기.
강현은 설기의 얼굴을 거칠게 닦아 냈다.
“끼잉.”
설기가 앓는 소리를 냈지만, 피하진 않았다.
그렇게 눈을 다 털자 강현의 곁으로 와서 앉았다.
셋은 멍하니 눈을 바라보았다.
눈 내리는 산은 셋의 넋을 빼놓기 충분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12월 초.
첫눈치고는 좀 이르긴 했지만, 이제 겨울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