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시원한 바람이 어느 순간부터 잠잠해졌다.
강현은 정령목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신기하네.”
마치 동화 속 세상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아니, 새삼스러울 필요도 없나?’
강현의 시선이 옆에 있는 설기에게 향했다.
강현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
“아무것도 아니야.”
강현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옆에 있던 수풀이 흔들렸다.
“이야기는 잘 나눴는가?”
“우왓!”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서 뒷걸음치는 강현. 고개를 돌리자 어제 보았던 노인이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콜록. 역시 이 나이에 노숙은 힘들구먼.”
“괘, 괜찮으세요?”
강현은 얼른 노인을 부축했다. 노인이 그런 강현을 보며 미소 지었다.
“…고맙네.”
“아닙니다. 그보다 어제부터 계속 계셨던 거예요?”
“그렇다네.”
노인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강현처럼 텐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담요 하나만을 깔고 바닥에서 잔 것이었다.
강현의 질문에 노인은 수염을 쓸어내렸다.
“배우러 온 이가 어찌 제 안식만 찾겠는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강현은 노인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힐끗 옆을 확인했다.
설기는 노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알고 있으면 좀 알려 주지.’
태연하게 하품하고 있는 설기를 본 강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에 노인은 옷을 정리했다.
그때.
꼬르륵.
어디에서 난 소리인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허헛. 이거 초면에 실례했군.”
노인이 멋쩍게 웃었다. 강현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보다 과일이랑 열매 좀 드릴까요?”
강현의 물음에 노인의 눈이 커졌다.
“염치없지만 부탁하네.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
노인의 말에 강현은 배낭에서 과일과 열매를 꺼냈다.
아침에 앤의 식사를 만들면서 남은 것이었다.
고기도 있긴 했지만, 이미 설기의 뱃속으로 들어간 뒤였다.
‘어차피 간식으로 챙겨온 것이니.’
정말로 배가 고팠는지 노인이 허겁지겁 과일을 먹었다.
강현은 그런 노인을 보며 배낭에서 물도 꺼내서 건넸다.
목에 걸릴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강현의 뜻을 읽었는지 노인이 먹는 속도가 줄었다.
그렇게 과일과 열매를 모두 먹은 뒤에 물을 입으로 가져갔다.
“고맙네. 덕분에 살았어.”
노인이 물통을 돌려주었다.
강현은 그런 노인을 살폈다.
어제보다 추레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기품이 흘러나왔다.
“난 오헨하우어라고 하네.”
“아, 이강현입니다.”
노인의 말에 강현도 소개했다. 그러자 노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강현? 독특한 이름이야. 이 왕국의 사람은 아닌가 보군.”
오헨하우어가 수염을 쓸어내렸다.
“음, 내가 아는 왕국 중에는 그런 식으로 이름을 짓는 곳은 없는데….”
오헨하우어의 말에 강현은 속으로 뜨끔했다.
강현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오헨하우어 님께서는 오늘도 앤 씨를 찾아가십니까?”
“아아, 아닐세.”
강현의 질문에 오헨하우어가 고개를 저었다.
강현은 의아한 시선으로 오헨하우어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노숙을 한 건가.
강현의 시선에 오헨하우어가 입을 뗐다.
“내가 기다린 건 자네야.”
“예?”
오헨하우어가 쓴웃음을 흘렸다.
“그녀를 찾아간 건 어제로 두 번째일세. 오늘 간다고 해도 결과는 다르지 않겠지. 하지만 자네들이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궁금해서 도저히 발을 뗄 수 없었네.”
강현을 바라보는 오헨하우어의 눈이 빛났다.
마치 세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
오펜하우어의 시선에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사실 강현의 이야기는 알려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앤에 대해서는 함부로 이야기하기 꺼려졌기 때문이었다.
“음…. 앤 씨는 오헨하우어 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다를 겁니다. 그녀가 파는 건 어디까지나….”
“지혜지. 하지만 그녀가 가진 지식 또한 가치가 없는 건 아니라네.”
“…!”
강현의 눈이 커졌다. 강현의 반응을 본 오헨하우어가 미소 지었다.
“내가 원하는 건 종족 전쟁 이전의 지식이네. 세력이 큰 종족들의 기록은 아직 남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종족들의 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네. 그중에는 이미 멸망한 종족들도 있겠지.”
오헨하우어가 수염을 쓸어내렸다.
“누군가는 그들을 기억하고 후대에 전해야 하지 않겠는가?”
오헨하우어의 말을 들은 강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오헨하우어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앤 씨에 대해서도.”
“그녀에게 요정의 피가 흐른다는 것쯤은 알고 있네. 그런 것도 조사하지 않고 먼 길을 떠날 정도로 무모한 사람은 아니야.”
오헨하우어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오헨하우어를 보며 강현은 슬쩍 오헨하우어의 뒤를 바라보았다.
오헨하우어가 노숙했던 자리.
‘…충분히 무모한 것 같긴 한데.’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어색하게 웃었다.
“물론 그것 말고도 그녀와 토론하고 싶은 주제도 있다네. 조사하면 할수록 그녀의 식견은 놀랍더군.”
허허롭게 웃는 오헨하우어를 보며 강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앤 씨가 싫어할 만하네.’
곧 오헨하우어가 강현을 돌아보았다.
“자, 그럼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는가? 이럴 게 아니라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지. 산책은 머리를 깨워 주거든.”
오헨하우어가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렇게 일행들이 걷기 시작했다.
강현은 걸으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대단한 건 아닙니다. 그녀가 제가 온 곳에 흥미를 보여서 그에 관해서 대화를 나눈 게 전부입니다.”
그녀에 대해서 들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앤, 본인이 해야 할 이야기였다.
“온 곳?”
“로벤투스에 있는 숲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 아이의 고향도 거기죠.”
강현이 옆에 걷는 설기를 가리켰다.
오헨하우어가 자신을 바라보자 설기가 턱과 허리를 폈다.
위풍당당한 모습.
하지만 꼬리는 촐싹대게 흔들리고 있었다.
“경계의 숲인가!”
경계의 숲?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란돌프나 노아에게 들었던 이름은 달랐다.
‘다들 멋대로 부르나 보네.’
강현은 실소를 흘렸다.
“그래, 하얀 늑대, 들어본 적이 있네. 남쪽의 수호신이라 불린다지? 실제로 볼 줄은 몰랐군.”
오헨하우어는 설기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러더니 곧 팔짱을 꼈다.
“그렇군. 하얀 늑대라면 그녀가 흥미를 보일만 하지.”
오헨하우어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에게는 나쁘지 않은 오해였다.
곧 오헨하우어가 강현을 돌아보았다.
“자네는 여행 중인가?”
“예. 이제 돌아가려고 합니다.”
강현의 대꾸에 오헨하우어가 환하게 웃었다.
“잘되었군.”
“예?”
“나도 로벤투스로 가려고 했네. 이런 게 또 인연이 되는군.”
“로벤투스로요?”
강현이 놀라서 되묻자 오헨하우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서 답을 구하지 못했으니 다른 곳에서 구해야지.”
강현의 눈이 커졌다.
로벤투스에 그런 이가 있다는 건 듣지 못했다.
오헨하우어의 목적지는 로벤투스가 아니었다.
그 너머.
바로 요정에게 직접 묻겠다는 것이었다.
‘…수인일 리는 없으니.’
수인들이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었다.
게다가 수인 역시 인간과 수명이 비슷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강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오헨하우어를 보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요정들이 목적이었겠네.’
앤은 그저 지나가는 길에 들렸을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오히려 의심이 들었다.
‘…종족 전쟁 이전의 지식은 핑계고 토론하러 온 거 아닌가.’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그리고 로벤투스 영지의 마법사가 그렇게 현명하다고 들었네. 그와도 이야기를 한번 나누고 싶군. 서로의 지식을 나누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이지.”
오헨하우어의 눈이 반짝였다.
그 모습을 보자 의심에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강현은 오헨하우어의 앞에서 말을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만일 강현이 이세계 사람이 아니란 걸 알면 어찌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헛기침한 강현이 입을 뗐다.
“동행은 상관없는데, 저는 말을 탈 수 없어요.”
걸어서 로벤투스까지 가야 했다.
싫고 좋고를 떠나서, 오헨하우어에게는 힘든 일정일 수도 있었다.
그러자 오헨하우어가 눈을 크게 떴다.
“말을 못 타면 마차를 타면 되네. 비용은 걱정하지 말게. 이렇게 말동무나 해 주면 된다네.”
허허롭게 웃는 오헨하우어.
강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마차도 못 타요. 동물들은 이 아이를 무서워해서.”
강현이 설기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설기.
뒤늦게 오헨하우어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음, 어쩔 수 없군.”
오헨하우어의 대답에 강현은 속으로 안도했다.
그러나 그 안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모처럼이니 나도 걸어가겠네.”
“…!”
“이거 젊었을 때가 생각나는군. 아, 자네는 어떤 책을 좋아하는가?”
“제가 글자를 몰라서….”
강현의 대답을 들은 오헨하우어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그럼 가는 길에 내가 가르쳐 주면 되겠어. 자네는 영민하니 금방 배울 걸세.”
오헨하우어의 말에 강현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마을에서 읽기 쉬운 책을 구해 봐야겠군.”
들뜬 모습으로 말하는 오헨하우어를 보니 강현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정말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은 것이었다.
그 후로도 오헨하우어는 한참을 떠들었다.
글을 배우기에는 어떤 책이 좋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왕국의 학자들 이야기까지.
숲을 빠져나왔을 때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러다가 문뜩 설기가 보이지 않는 걸 깨달았다.
“그 뒤에 겐포스가 스승에게 말했…. 음? 왜 그런가?”
“아뇨. 설기가 안 보여서.”
“아, 하얀 늑대라면 뒤에 있네.”
오헨하우어의 말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저 멀리 설기가 보였다.
‘언제 저기까지….’
이유를 짐작하긴 어렵지 않았다.
강현의 눈꼬리가 올라가자 설기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저 녀석.’
오헨하우어의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도망친 것이었다.
더 괘씸한 건 설기 혼자가 아니란 것이었다.
설기의 머리 위에 토리가 올라타 있었다.
물밀 듯 밀려오는 배신감.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아,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그렇군. 겐포스와 스승의 대화였지?”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강현은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오헨하우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컹! 컹!”
뒤따라오던 설기가 갑작스럽게 짖었다.
자연스레 오헨하우어의 입도 멈췄다.
“음, 무슨 일인가?”
오헨하우어의 물음에 강현은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온다고?”
“컹!”
쪼르르 강현의 옆으로 다가온 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숲을 벗어나긴 했지만, 아직 사람이 다닐만한 길은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풀이 흔들렸다.
수풀 사이로 튀어나온 그림자 하나.
‘…두건?’
그러나 머리에 쓰고 있지 않았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는 두건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일행들이 사내를 보고 놀랐던 것처럼 사내 역시 일행들을 보자마자 눈이 커졌다.
누군가 있을 거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곧 사내의 눈이 강현과 오헨하우어를 훑었다.
그 모습에 강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원인을 알기도 전에 사내가 오헨하우어를 향해 달려갔다.
쿵!
“아이쿠.”
사내와 부닥친 오헨하우어가 뒤로 자빠졌다.
그렇게 오헨하우어를 자빠트린 사내는 그대로 숲 너머로 도망쳤다.
“괜찮으세요?”
“…괜찮네.”
강현이 황급히 오헨하우어를 부축했다.
그리고 사내가 떠나간 자리를 노려봤다.
‘일부러 부딪혔어.’
자리에서 일어난 오헨하우어가 흙을 털어 냈다.
강현은 그 모습을 보다가 설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막을 수 있었지?’
강현의 물음에 설기가 뒷발로 목을 긁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강현의 옆에서 낯선 이를 경계하던 설기. 그러나 사내가 오헨하우어에게 관심을 보이자마자 엉덩이를 내리깔았다.
오헨하우어가 어찌 되든 관심 없다는 뜻이었다.
강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런 설기를 탓할 순 없었다.
“음, 뭔가 놓고 갔군.”
오헨하우어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돌렸다.
오헨하우어의 손에는 못 보던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주머니.
그러나 안이 텅텅 비었다.
‘…불안한데.’
그걸 보자마자 불안함이 엄습했다.
그리고.
“컹! 컹!”
설기가 다시 한번 짖었다. 사내가 나타났던 방향.
그러나 이번에는 사내와 상황이 달랐다.
두두두두.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땅의 진동.
말을 타고 오는 것이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강현은 설기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르르르.”
설기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와 함께.
“휘이이잉!”
“워, 워어. 진정해.”
“말들이…!”
“큭!”
숲 너머가 아수라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