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평화로워졌어
‘혼혈도 요정처럼 오래 사는구나.’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런 강현의 생각을 읽었는지 여인이 입을 열었다.
“혼혈이라고 모두 나 같은 건 아니야. 평범한 인간보다는 오래 살겠지만, 요정만큼은 못 살아.”
속내를 읽힌 강현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여인은 어째서….
하지만 강현의 의문은 이어지지 못했다.
여인이 불쑥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난 전쟁 중에 태어났어. 이 의미, 알겠지?”
여인의 말에 강현의 눈이 커졌다.
금실이 좋았냐는 물음의 답이었다.
전쟁. 그것만으로 많은 것들이 예상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실례되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강현의 걱정과 달리 대수롭지 않게 넘긴 여인이 토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네 쪽 차례야.”
“아….”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입을 열려고 할 때, 여인이 손을 들었다.
“잠깐만.”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오두막으로 걸어갔다.
강현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갑작스럽게 오두막으로 사라진 여인을 바라보았다.
오두막에서 여인이 나온 건 조금 시간이 지난 뒤였다.
여인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그릇에 담긴 걸쭉한 회색의 무언가.
강현이 그것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한 건 너무나도 이질적인 모양새이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그릇을 강현 앞에 놓았다.
“이건….”
“내가 아침에 먹다 남은 거.”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강현은 침음성을 삼켰다.
“열매와 풀, 고기를 으깨서 끓인 거야. 아, 참고로 고기는 이 녀석들도 포함이야.”
여인이 테이블 한쪽을 가리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꿈틀꿈틀.
애벌레 하나가 열심히 기어가고 있었다.
이걸 보여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음식이란 말에 관심을 보이던 설기마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여인은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영양 자체는 충분한 녀석이야.”
그리 말한 여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 내게 요리에 대해서는 묻지 마.”
“아.”
그제야 여인이 이걸 가져온 이유를 깨달았다.
처음 강현이 물었던 질문의 답이었다.
“먹는다는 목적 자체가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지. 그렇다면 그걸로 충분해. 난 돈이 안 되는 일에는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 싫거든.”
여인의 말에 강현은 물끄러미 그릇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강현의 예상을 벗어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건 강현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 먹어 봐도 될까요?”
강현의 물음에 여인의 눈이 커졌다.
강현의 대답은 여인의 예상에 없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 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여인. 강현은 손으로 수프도 죽도 아닌 무언가를 찍어서 입에 넣었다.
비리고 쓴맛.
맛을 본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요리라고는 할 수 없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음식이었다.
힐끗 설기를 보았다.
붕붕.
격하게 고개를 젓는 설기.
설기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처음부터 줄 생각도 없었지만, 웃음이 나왔다.
‘하긴. 어제 많이 먹었으니.’
강현은 다시 그릇을 보았다.
“언제부터 이렇게 드신 거예요?”
“…이상한 걸 묻네.”
여인은 강현을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미간을 좁혔다.
“내가 여기에 정착하고 나서니깐, 이십 년은 넘었겠군.”
담담하게 내뱉는 여인.
‘이십 년이나.’
강현은 숨을 삼켰다. 강현이였다면 하루도 버티기 힘들었을 거다.
‘기껏해야 한두 끼 정도겠지.’
강현은 대단하다는 생각보다는 안쓰러움이 떠올랐다.
“자, 이제 네 이야기를 해 봐.”
여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입을 열었다.
강현은 토리와 만나게 된 이야기를 그녀에게 풀었다.
강현의 이야기가 끝나자 그녀는 한참이나 담배를 피웠다.
“…그 요정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
“에밀리야요. 혹시 아시나요?”
“…아니, 비슷한 이름을 들어 봐서.”
여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강현은 여인이 무언가를 숨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걸 굳이 캐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궁금한 것을 물었다.
“저….”
“앤이라고 불러.”
“예. 앤 씨는 정보상이라고 하셨잖아요.”
“숲에만 있으면서 무슨 정보를 파냐고?”
앤은 강현이 물으려고 한 질문을 알고 있었는지 담배를 뿜으며 말했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앤이 테이블 위에 파이프를 털었다.
새까맣게 탄 재가 흩날렸다.
“정확히 말하면 정보상이 아니야. 비슷할 뿐이지.”
“그럼…?”
“내가 파는 건 지식이 아니라 지혜다.”
놀란 강현을 본 앤이 입꼬리를 올렸다.
“둘의 차이를 아나 보네. 왕도에는 저기 있는 젊은 놈처럼 똑똑한 녀석이 많지. 당연히 지혜를 빌리려는 사람도 많아. 하지만 이런 외딴곳에는….”
“상대적으로 적죠.”
강현의 말에 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곳에 지식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는 귀족 정도야. 평민들이 쉽게 묻기 힘들지. 그래서 나를 찾는 거야.”
“…그래서 현자군요.”
지혜가 절실한 이들에겐 앤이 현자로 보일 거다.
“그래, 대가를 받고 지혜를 빌려주다 보니 어느새 그런 우습잖은 별명이 붙었지.”
강현은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게 있었다.
“앤 씨는 그동안 숲 밖으로 안 나가셨죠?”
앤이 입고 있는 옷은 그녀의 몸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흘러내리는 것이었다.
직접 사 입으면 저런 옷을 입을 리가 없었다.
“그렇지. 마지막으로 나가 본 게 십 년 전이군.”
그녀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역시 강현의 예상이 맞았다.
“그런데도 재물이 필요하신 건가요?”
숲에서 나가지 않으면 쓸 일도 없을 거다.
“너…. 영리해 보였는데 멍청한 질문을 하는구나?”
앤이 한심하게 바라보자 강현이 헛기침했다.
“재물은 많을수록 좋은 거야. 앞일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지. 위급할 때 의지할 건, 자신의 무력과 황금. 이 두 가지뿐이야.”
앤이 진지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한 세기를 살아온 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무게가 달랐다.
“게다가 대가를 받지 않으면 저런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들러붙겠지.”
앤이 숲 너머를 턱짓했다.
노인이 있는 방향.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시간을 싸게 넘길 생각은 없어. 내 가치를 낮추는 일이지. 그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어.”
단호한 앤의 말에 강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강현으로서는 처음 만나는 성향의 사람이었다.
‘말투는 험하지만.’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강현이 물었던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답해 주고 있었다.
앤은 파이프에 마른 잎을 넣었다.
‘이런 건 어느 세계도 비슷한가 보네.’
강현의 시선을 알아챘는지 앤이 파이프를 흔들었다.
“전에 난쟁이들에게 받은 것이지. 지금은 구할 수 없는 녀석이야.”
고개를 끄덕이던 강현은 밖에 있는 노인에 대해서 떠올렸다.
“그런데 아까….”
“아, 문?”
강현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보려던 건 다른 것이긴 했지만, 그것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마법인가요?”
강현의 물음에 앤이 실소를 흘렸다.
“요정은 마법을 쓰지 못해. 요즘 인간은 그런 것도 가르치지 않나 보군.”
앤이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랬던가.
“그럼 아까 그건….”
강현의 물음에 앤이 뒤를 돌아보았다.
“저 녀석의 힘이지.”
앤의 시선 끝에는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앤을 따라 시선을 돌린 강현은 나무 옆에 있는 설기와 토리를 볼 수 있었다.
‘언제 갔지?’
나무 옆에서 둘이 뒹굴고 있었다.
둘을 노는 걸 보던 강현은 이상한 점을 알아챘다.
‘…둘이 아니야?’
어째서인지 나무가 둘과 놀아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세히 보니 일반적인 나무와 달랐다.
곧 무언가를 알아챈 강현의 눈이 커졌다.
“…정령?”
“정령목이야. 나와 계약을 맺은 녀석이지.”
강현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뿌리가 닿는 곳 모두가 저 녀석의 영역이야. 들어오려면 저 녀석의 허락이 필요해. 너희는 저 녀석의 마음에 든 모양이야.”
강현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무를 바라보았다.
마치 강현에게 인사라도 보내듯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그럼 저 아이… 때문에 숲에 머무시는 거예요?”
강현의 호칭에 앤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 아이라고 부르기에는 강현보다 나이가 많았다.
“어느 정도는. 저 녀석이 한 자리에 오래 머물수록 힘이 강해지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그런가?
강현은 놀란 눈으로 나무를 보았다.
강현의 머릿속에 뿌리로 걷는 나무가 떠올랐다.
기괴한 광경.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그건 아니야.”
앤이 강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동할 때는 씨앗으로 움직여. 그리고 새롭게 싹을 틔우지.”
“아….”
한 자리에 오래 머물수록 힘이 강해진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머쓱해진 강현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럼 어째서 이 숲에서만 계시는 건가요?”
정령목 때문이 아니라면.
앤이 강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것도 실례되는 질문이었나.
강현이 아차 싶었다.
앤이 대답을 잘해 주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곳의 분위기 때문인가.
평소라면 잘 하지 않았던 질문까지 던졌다.
강현은 사람들이 앤에게 답을 구하러 오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앤에게는 묘한 힘이 있었다.
앤이 담배 연기를 뿜었다.
“말했잖아. 혼혈이라고.”
담배 연기 탓에 주변이 뿌옇게 흐려졌다.
“나와 같은 자들은 인간에게도, 요정에게도 배척받아.”
“…!”
강현이 숨을 삼켰다.
숙연해진 분위기. 그 속에서 앤의 눈이 암울하게 빛났다.
“수많은 신 중에 우릴 바라보는 신은 없지. 이 세상에 우리가 있을 곳은 없다는 소리야.”
그리 말한 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는 끝이야. 날이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머물고 내일 떠나. 저 녀석 덕분에 춥진 않을 거야.”
앤이 나무를 턱짓하고는 휘적휘적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강현은 그런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말이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강현의 눈에 접시 하나가 들어왔다.
“음.”
곧 무언가를 결심한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날.
앤이 오두막에서 나온 건 아침이 지나고 해가 높게 솟아올랐을 때였다.
오두막에서 나온 앤은 강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안 갔어?”
“인사는 드리고 가야죠.”
강현의 대꾸에 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이상한 놈이야.”
고작 하룻밤이었지만, 앤의 독설에도 익숙해졌다.
웃음을 흘린 강현이 입을 뗐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강현의 말에 앤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어서 가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한두 발자국 걷던 강현의 발걸음이 다시 멈췄다.
“…나중에 시간 되시면 숲에 놀러 오세요. 아, 이 숲 말고 로벤투스에 있는 숲이요. 제가 앤 씨처럼 식견이 높은 건 아니지만….”
거기까지 말한 강현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곳 사람들은 혼혈이라고 해서 누군가를 배척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아요.”
강현의 말에 앤의 표정이 무심해졌다.
“그때에는 좀 더 제대로 된 요리를 대접할게요.”
“…알았으니 그만 꺼져.”
앤의 손짓에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몸을 돌렸다.
그렇게 설기, 토리와 함께 숲을 떠나는 강현.
그걸 본 앤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다가 문뜩 이상한 걸 깨달았다.
‘…그때에는?’
앤의 시선이 돌아갔다. 어제 이야기를 나누던 테이블.
그 위에 올려진 접시.
접시는 앤의 것이었지만, 내용물은 달랐다.
아직 김이 올라오는 수프.
그리고 옆에 놓인 커다란 잎 위에 고기와 과일이 올라가 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앤이 짧게 혀를 찼다.
그때, 뒤에 있던 나뭇잎이 흔들렸다.
나무를 노려보는 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먹어 보면 되잖아.”
앤의 대답에 나뭇가지가 다시 한번 흔들렸다.
의자에 앉은 앤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수프를 떠먹였다.
“음.”
미간을 구기는 앤.
맛이 없었던 것인가? 아니었다.
잊고 있던 혀의 감각을 깨워 주고 있었다.
맛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했다.
다시 한번 수프를 떠먹은 앤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녀석. 정말 쓸데없는 짓을 했어.”
이걸 먹은 이상 전처럼 으깬 죽을 먹기 힘들 거다.
“숲이라….”
앤의 시선이 강현이 떠난 곳으로 향했다.
그와 함께 어제 들었던 이름이 떠올랐다.
에밀리야.
그녀도 알고 있는 이름. 그러나 그녀가 알고 있는 이와 달랐다.
왜냐하면 그녀가 알고 있는 이는 그렇게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담배 연기를 뿜었다.
“세상이 바뀌긴 했나 보네. 평화로워졌어.”
어쩌면 강현이 말했던 게 그녀의 본 모습일지도 몰랐다.
앤의 시선이 뒤에 있는 나무에게 향했다.
“…난 여기 너무 오래 머문 걸까?”
그녀의 물음에 나뭇가지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