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좀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
한바탕 소란이 끝나고 수풀 사이로 사람들이 나타났다.
새롭게 나타난 이들은 어딘가 익숙했다.
‘…카브리의 경비들이잖아.’
검문 때 보았던 복장.
심지어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갑옷을 입은 이들도 병사들 사이로 보였다.
그들도 일행을 발견하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병사 하나가 오헨하우어가 들고 있는 주머니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기사를 향해 무언가를 속닥이는 병사.
기사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이들의 표정마저 변했다.
“일당이 더 있었던 건가.”
기사의 중얼거림.
그때, 누군가가 강현의 어깨를 잡았다.
오헨하우어였다.
그는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게. 내가 해결하지.”
그러더니 앞으로 걸어 나섰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듯하네. 나는 국왕 폐하에게 대학사의 학위를 수여 받은 오헨…. 오헨하….”
입을 열면서 품을 뒤지던 오헨하우어의 입이 멈췄다.
“…잠시만 기다리게.”
오헨하우어의 손이 분주해졌다.
당연히 오헨하우어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시선도 싸늘해졌다.
결국, 오헨하우어의 손이 멈춘 건 한참 뒤였다.
“…음, 오헨하우어라네. 왕도에 연락해 보면 내 신분을 증명할 수 있을 걸세.”
강현은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까의 사내가 빈 주머니만 놓고 간 게 아니었다.
병사들의 시선이 기사들에게 향했다.
거짓말이라고 말하기에는 우헨하우어의 외견이 너무나 그럴듯했다.
“…영지로 끌고 간다.”
선두에 있는 기사가 입을 뗐다.
그러자 병사들이 움직였다.
강현과 오헨하우어를 에워싸는 병사들.
그 순간, 설기가 이를 드러냈다.
“그르르르릉.”
아까보다 강하게 적의를 드러내는 설기.
병사들은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기사 몇몇이 흠칫하며 설기를 돌아보았다.
“설기야, 괜찮아.”
강현은 재빨리 설기를 진정시켰다. 여기서 설기가 나서면 일이 더 복잡해질 거다.
“끼잉.”
강현의 말에 설기가 강현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기사들을 향한 채였다.
고개를 돌리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토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입에 불꽃을 머금은 것이었다.
안 뿜어?
그리 묻는 듯한 모습에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토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화르륵.
입에서 불꽃과 함께 검은 연기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를 눈치챈 이는 없었다.
“오른 경, 포박할까요?”
병사의 물음에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놔둬. 이 인원을 뚫고 도망치진 못할 거다.”
기사의 시선이 오헨하우어를 향했다가 떨어졌다.
오헨하우어가 한 말이 마음에 걸린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오헨하우어가 다시 강현에게 다가왔다.
“이거, 어쩔 수 없이 저들과 가야겠구먼. 마을에 도착하면 해결될 걸세.”
오헨하우어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도 돌아가는 사정은 파악했다.
현대도 아닌 중세 시대.
끌려갔다가는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감옥 같은 곳에 가나?’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일행들은 병사들에게 포위된 채 걸음을 옮겼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말을 잃어버린 탓에 모두 걷고 있었다.
그렇게 병사들과 일행들이 걷는 소리만이 숲에 울렸다.
그 침묵을 깬 건 다름 아닌 오헨하우어였다.
“오른 경이라고 했나?”
선두에 있던 기사가 고개를 돌렸다. 강현도 설마 하는 심정으로 오헨하우어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만.”
“성인가? 이름인가?”
“성입니다.”
오른이 담담히 내뱉었다.
“오, 그럼 왕도에 있는 오른 자작을 아는가?”
“…모르는 이입니다.”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오헨하우어가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이라면 여기서 대화가 끝날 거다. 그러나 오헨하우어는 보통이 아니었다.
“그도 똑똑한 친구지. 특이하게도 천문학에 관심이 많아. 그가 아카데미에 수학할 때의 일이라네….”
맙소사. 강현은 실소를 흘렸다.
처음에 이야기를 들어 주던 기사도 오헨하우어의 말이 길어지자 당혹스러운지 걸음을 빨리했다.
오헨하우어에게 함부로 대하기 찝찝해서 자리를 피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헨하우어의 걸음도 기사와 같이 빨라졌다.
그리고 강현은 슬쩍 속도를 줄였다.
하지만 누구도 강현을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현을 핑계 삼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행들은 둘과 멀찌감치 떨어져서 걸어갔다.
* * *
일행들이 카브리에 도착했을 때, 의심은 어느 정도 풀린 뒤였다.
만일 사내와 한패였다면 저렇게 신이 나서 떠들진 못했을 거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구나.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른이란 기사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할 일이 있다며 다른 기사에게 일행들을 맡겼다.
“아쉽군. 다음에 또 이야기하세.”
“….”
오른은 오헨하우어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도망쳤네.’
‘도망쳤어.’
입을 열진 않았지만, 다들 같은 생각을 했다.
잠깐 사이에 오른 기사의 볼이 홀쭉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헨하우어는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있었다.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일행들은 어디론가 끌려갔다.
아니, 안내라는 표현이 정확했다.
강현의 걱정과 달리 낡긴 했어도 제대로 된 방이었다.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도 있었다.
‘…오헨하우어 님 덕분이지.’
그가 아니었다면 병사들이 이렇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거다.
단순히 수다만 떠는 게 아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 중에는 왕도에 머무는 학자가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이야기들도 많았다.
거짓으로 지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려 반나절 동안 쉬지 않고 말했으니.’
그 모든 게 이 자리에서 지어낸 것이라면, 그게 더 대단한 일이었다.
오헨하우어를 바라보고 있자 시선을 오해한 오헨하우어가 입을 뗐다.
“왕도에 연락해 본다고 했으니 곧 풀려날 수 있을 걸세.”
오헨하우어의 말에 강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을 때, 병사 하나가 들어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죄송한데 며칠 더 머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으음, 왜 그런가?”
“왕도에 연락할 수 있는 수정구가 망가졌습니다. 도둑들이 무슨 짓을 한 모양입니다.”
병사의 말에서 강현은 사내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예상했긴 했지만.’
역시나 성에서 무언가를 훔쳐 달아나던 것이었다.
오헨하우어의 주머니도 그가 훔친 것일 수도 있었다.
다른 영지에 연락하지 못하게 미리 손을 써 둔 모양이었다.
“…얼마나 걸리겠는가?”
“적어도 닷새는 걸릴 거라고.”
병사가 오헨하우어의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확실하게 신분을 증명하기 전까지는 머무셔야 합니다.”
“…알겠네.”
오헨하우어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닷새. 즉, 더 걸릴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그건 곤란한데.’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이제 슬슬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때, 강현의 머릿속이 반짝였다.
“…신분만 증명할 수 있으면 되는 건가요?”
병사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오헨하우어를 볼 때와 달리 눈빛이 곱지 않았다.
얘는 뭐지?
그런 눈빛. 그러나 이게 정상이었다.
슬쩍 오헨하우어의 눈치를 살핀 병사가 입을 뗐다.
“아, 예. 이번 일과 연관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신분이어야 합니다.”
아무 신분만으로는 안 된다는 소리였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에겐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받은 게 있었다.
무려 두 개나.
강현은 그중 하나를 쓰기로 했다.
“혹시 영지의 마법사님을 뵐 수 있을까요? 그분이 제 신분을 증명해 줄 겁니다.”
“…마, 법사님요?”
병사가 놀란 듯이 강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건 오헨하우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의 시선을 받은 강현은 머쓱하게 웃었다.
* * *
잠시 뒤,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병사들과 함께 들어왔다.
나이는 이십 대 중후반 정도 되었을까.
로멘의 딸이라면 조금 더 나이가 많을 줄 알았는데, 여인은 강현의 또래처럼 보였다. 일하다가 왔는지 구겨진 로브 자락과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다.
“바빠 죽겠는데 부르고 난리야.”
투덜거리던 여인은 오헨하우어와 강현을 차례대로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아는 얼굴은 없는데?”
그녀의 말에 병사들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강현이 나섰다. 그러나 곧 중요한 걸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이름조차 모르네.’
볼을 긁적인 강현이 입을 뗐다.
“…로멘 님 따님분, 맞으시죠?”
강현의 말에 여인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곧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알아?”
“예.”
강현은 품에서 나침반을 꺼냈다.
나침반을 이리저리 살피던 여인이 실소를 흘렸다.
“아버지 것이 맞네. 내가 빌려 달라고 할 땐 그렇게 안 빌려주더니.”
여인은 태도에 병사들도 의심을 거뒀다.
“근데 난 왜 불렀어? 여긴 왜 있는 거고?”
여인이 의아하다는 듯이 강현을 보았다. 보아하니 제대로 이야기조차 듣지 않고 온 모양이었다.
“저, 마법사님.”
뒤에 있던 병사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병사의 이야기를 들은 여인이 오헨하우어와 강현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된 거네. 사정은 알았어. 저쪽 신분은 내가 보증할 테니 풀어 줘.”
“…하지만.”
“하지만은 뭐? 내 보증만으로 부족하다는 거야?”
여인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아, 아닙니다.”
병사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여인은 문을 턱짓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병사들이 나가자 여인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원래 이렇게 험악한 도시는 아니야. 어제 일이 있어서 다들 날카로우니 이해해 줘.”
“일이라면….”
“영주 부인이 아끼는 보석이 도둑맞았어.”
강현와 오헨하우어가 탄성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병사들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그보다 그쪽은 아버지와 어떤 사이야? 아버지가 나에 대해서 말했다면, 보통 사이는 아닐 텐데. 게다가 이 녀석까지.”
여인이 나침반을 두드렸다.
여인의 말에 강현은 입을 다물었다.
무슨 사이라고 해야 할까?
“…친구입니다.”
그보다 정확한 표현은 없었다.
강현의 대답에 여인의 눈이 커졌다. 강현의 대답은 여인의 예상 속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에게 친구가 있었다고?”
“….”
굉장히 실례되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강현은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좀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 그럼 이 빚도 없는 걸로 해 줄게.”
“빚… 이요?”
“몰랐어?”
여인이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마법사란 족속들은 누군가에게 빚지는 걸 싫어해. 설령 부모 자식 간이라도 말이지.”
놀란 강현이 오헨하우어를 돌아보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도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란 소리였다.
“그런 아버지가 나를 거론해서까지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면 보통 사이는 아닐 거란 말이야.”
여인의 말에 강현이 볼을 긁적였다.
그런 사정이 있는 줄 몰랐다. 알았다면 영주가 준 서신을 꺼냈을 거다.
‘그래서 가족 이야기를 안 하셨구나.’
그러나 이미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강현은 다른 이야기들은 제외하고 로멘에 대해서만 말했다.
“…그러니깐, 가끔 숲에서 만나서 밥 먹는 사이? 이야기도 나누고?”
“아, 술도 몇 번 했어요.”
강현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여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다.
너무 생략했나?
말하고 보니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