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비매품입니다
다음날 강현이 매장 문을 열기도 전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정말 급했나 보네.’
실소를 흘린 강현은 잠긴 매장 문을 열었다.
“이렇게 일찍 오시면…. 어?”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이를 보며 눈을 껌뻑였다.
문 앞에 서 있는 이가 강현의 예상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세나 씨?”
“제가 좀 일찍 왔죠?”
“저도 있어요!”
세나 뒤로 소현도 얼굴을 빼꼼 내밀더니 배시시 웃었다.
“아뇨, 다른 사람이랑 착각해서. 일단 들어오세요.”
강현은 둘은 안으로 안내했다. 매장 안은 아직 어두운 상태.
그러나 둘이 들어오자 매장이 환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잠시만요.”
강현은 행주를 들고 와서 테이블을 닦았다.
“아직 준비가 덜 돼서 식사는 좀 걸려요.”
“아뇨. 천천히 해 주셔도 돼요. 저희가 일찍 왔는걸요.”
둘이 테이블에 앉았다.
소현이는 무언가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곧 눈을 빛냈다.
“안녕, 흰둥아.”
흰둥이는 또 누구란 말인가.
설기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소현이를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한 설기의 모습에 소현이 울상을 지었다.
“잠깐 못 봤다고 절 잊었나 보네요.”
속상해하는 소현을 보며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잊은 게 아니다. 강현이 기억하기로는 전에도 이런 반응이었다.
잊은 건 오히려 소현이였다.
‘…이름도 잘못 기억하고 있었잖아.’
그러나 굳이 생각을 내뱉진 않았다. 대신 세나를 돌아보았다.
“아침 일찍부터 어쩐 일이세요?”
“전에 감사 인사를 건네고 싶다고 했잖아요. 좀 더 일찍 왔어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었다.
“괜찮습니다. 요즘 새 앨범 준비로 바쁘시잖아요.”
강현의 말에 세나의 눈이 커졌다. 세나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소현 역시 놀란 눈으로 강현을 돌아보았다.
“그거 비밀인데!”
소현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던가?
“어떻게 아셨, 아….”
말을 이어 가던 세나가 탄성을 뱉었다.
“…윤섭 오빠군요.”
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섭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아쉽네요. 제가 직접 전해 드리고 싶었는데.”
한숨을 내쉰 세나가 강현을 보았다.
“이게 다 강현 씨 덕분이에요.”
“아닙니다. 세나 씨가 열심히 한 덕분이죠.”
강현의 대답에 세나가 미소 지었다.
“그래서 이렇게 일찍 나오신 거예요?”
“아뇨. 원래라면 천천히 출발하려고 했는데.”
“제가 일찍 가자고 했어요!”
옆에 있던 소현이 불쑥 입을 열었다.
강현은 의아한 시선으로 소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소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멤버들이 알면 같이 가려고 할 테니, 몰래 나온 거예요.”
어째서?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대답은 세나에게서 나왔다.
“다른 멤버들도 같이 온다고 했으면 윤섭 오빠가 허락하지 않았을 테니깐요.”
그런 뒷사정이 있었던 걸까.
세나 혼자면 모를까, 멤버 전체라면 강현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때, 강현의 눈에 시계가 들어왔다.
“잠깐 차라도 드시겠어요? 전 준비가 남아서.”
“아, 예. 편하게 하셔도 돼요.”
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밀리야에게 받은 차를 타 줄 생각이었다. 에밀리야 이외의 사람에게는 처음 타 주는 것이었다.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에 있던 소현이 신기한 듯이 강현을 바라보았다.
“역시 강현 셰프.”
“응?”
“다른 사람이라면 저희랑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하려고 할 텐데…. 저희 같은 미인들보다 일이 우선이라니.”
그리 말한 소현이 박수를 쳤다.
칭찬인가, 욕인가. 강현은 기분이 미묘해졌다.
그리고 보통은 스스로 입으로 미인이란 말은 잘 안 하지 않던가.
오히려 옆에 있던 세나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배우를 할 정도로 미모가 출중한 세나와 현역 아이돌.
하지만 강현은 에밀리야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요정이 왜 요정이겠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강현이 주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속삭임에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매니저님 말씀이 맞았네요.”
“소현아, 쉿.”
강현이 힐끗 뒤를 돌아보자 소현이 당황해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나도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매니저라고 하면 윤섭이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신경 쓰였지만 저리 나오니 묻기도 애매했다.
강현은 주방으로 들어가서 차를 내렸다.
‘…근데, 이 찝찝한 기분은 뭘까.’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보며 강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 * *
강현이 가져다준 차를 마신 세나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거 무슨 차예요?”
“저도 선물 받은 거라 잘 모르겠네요.”
강현의 대꾸에 세나가 눈을 껌뻑였다.
“지난번 과일도 그렇고, 비밀이 많으신 분이네요.”
강현은 조용히 웃으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아직 할 일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세나는 돌아가는 강현을 보다가 차를 홀짝였다.
마치 숲에 들어온 느낌.
마신 순간 머리가 맑아졌다.
그런 세나를 본 소현도 차를 마셔 보았다.
“우와.”
저절로 흘러나오는 감탄사.
“맛있다! 선배님….”
소현이 은근한 목소리로 세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우아한 자세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몰랐는데, 저 차 좋아했나 봐요.”
“이게 특별한 거야.”
세나가 웃으며 소현의 말을 정정했다.
차를 자주 마시는 세나도 놀랄 정도의 맛.
세나의 말에 소현이 그럴 줄 알았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죠? 강현 셰프는 요리뿐만 아니라 차도 잘 타나 보네요.”
“그러네.”
세나는 주방 쪽을 힐끗거렸다.
재료도 특별한 것이지만, 차를 타는 강현의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 * *
준비를 끝낸 강현이 힐끗 시간을 확인했다.
‘좀 이르긴 하지만.’
굳이 오픈 시간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강현은 둘에게 걸어갔다.
“주문을….”
딸랑딸랑.
강현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매장 문이 열렸다.
“이 셰프! 나, 왔어!”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던 대표가 세나와 소현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연예인?”
맙소사. 강현은 속으로 탄성을 뱉었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도 아니고, 서울에서 잘 나가는 레스토랑 오너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매장 단골 중에는 유명인도 제법 많았다.
심지어 세나는 몇 번이나 오기까지 했다. 괜히 자신까지 부끄러워지는 강현이었다.
“예! 유니즈의 소현입니다!”
소현이 귀엽게 윙크했다.
“…굳이 소개할 필요 없어.”
이번에는 세나가 부끄러운지 작게 이야기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 씨구나. 그럼 있을 수 있지.”
뭐가 있을 수 있다는 걸까.
안면이 있는 세나와 대표는 살짝 고개만 숙여서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곧 대표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그보다 황대길 선생님은? 요리는 어떤 건데?”
“먼저 이분들 주문부터 받고요.”
“아차차. 실례했어. 그래, 일부터 봐야지.”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쪽 테이블에 앉았다.
강현이 세나와 소현의 테이블로 다가오자 세나가 입을 열었다.
“황대길 선생님이요? 이곳에 계세요?”
“예. 어쩌다 보니.”
강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강현의 말에서 사정이 있음을 짐작한 세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옆에 있던 소현이 대표를 힐끗거리며 입을 뗐다.
“저분은 누구세요?”
들어왔을 때 놀란 건 잠깐이고, 둘에게는 눈길조차 건네지 않고 있었다.
오직 강현을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강현만큼이나 독특한 반응.
강현이 대답하기도 전에 대표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 셰프의 비즈니스 파트너지.”
“…비즈니스 파트너?”
눈을 껌뻑이던 소현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어감만 보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대표의 복장도 한몫했다.
소현이 실례되는 말을 뱉기 전에 세나가 입을 열었다.
“강현 씨가 일하던 매장의 오너셔.”
“아하.”
세나의 말이 끝나자 소현은 불손한 눈빛을 거뒀다.
곧 세나가 미안한 얼굴로 강현을 돌아보았다.
“바쁘신데 저희가 괜히 와서 방해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닙니다. 매장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니깐요.”
사실 따지고 보면 저쪽이 방해꾼이었다.
강현의 말에 세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전 고기요! 스테이크!”
소현이 재빨리 외쳤다.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는 듯이 강렬한 기세.
그러자 세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안심 스테이크랑 안초비 샐러드, 봉골레. 이렇게 주세요.”
“예.”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주방으로 돌아갔다.
옆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리들이 테이블에 올라갔다.
“우와.”
눈을 반짝이는 소현.
곧 세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포크를 들어 올렸다.
“잘 먹겠습니다!”
스테이크를 입에 넣은 소현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너무 맛있어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저렇게 반응이 좋으면 강현으로서도 보람을 느낄 수밖에 없다.
대표가 소현의 감탄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인지 대표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대표만 반응한 게 아니었다.
“끼잉.”
어느새 다가온 설기가 아련한 눈빛으로 소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밥이 아직이었구나.’
평소보다 일찍 매장을 열어서 아직 밥시간은 아니었지만, 슬슬 허기가 질 거다.
설기의 눈빛을 본 소현의 눈이 떨려왔다.
“희, 흰둥아. 이건 안 되는데….”
“끼이잉.”
설기의 표정이 더욱 애처롭게 변했다. 결국, 소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 한 조각만이야.”
고기 한 점을 설기에게 건넨다.
건네는 손 역시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걸 날름 받아먹는 설기.
“…맛있어?”
설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세나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고기를 얻어낸 설기는 다시 소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와 다름이 없는 눈빛.
그뿐만이 아니라 토리 역시 테이블 위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강현이 나섰다.
“설기야, 금방 만들어 줄게.”
그러자 설기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까까지의 표정이 거짓말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자리로 갔다.
‘너도.’
강현은 테이블 위로 올라온 토리의 목덜미를 잡았다.
발버둥 치면서 접시를 향해 나아가려는 토리.
그러나 강현의 손을 빠져나갈 순 없었다.
결국, 커다란 두 손이 축 늘어졌다.
강현은 토리를 주머니 속에 넣고는 대표에게 걸어갔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어제 말한 요리부터 먹어 보고 정할게.”
“선생님은 한 시쯤 오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시피를 숙지하고 있어서 강현 혼자서라도 할 수 있었지만, 예의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이 요리의 주체는 황대길이었다.
“그럼, 차를 내올게요. 마시고 계세요.”
주방으로 돌아간 강현이 금세 차를 내렸다.
세나와 소현에게 줬던 것과 같은 차.
아니나 다를까, 차를 한 모금 마신 대표의 눈이 번뜩였다.
“이야, 비법이 뭐야? 이 차도 내가 살게!”
“비매품입니다.”
강현은 그리 대꾸하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이제 설기와 토리의 밥을 할 차례였다.
화구에 불을 켜고 팬을 올렸다.
스테이크와 리소토.
오늘의 점심 메뉴였다.
그렇게 식사하고 있자 황대길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