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갑자기 한가해졌네
매장 안으로 들어온 황대길은 홀을 보더니 미소 지었다.
“오늘은 떠들썩하구나. 식당은 이래야지.”
“선생님.”
마침 식사를 마친 세나와 소현이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세나 양, 오랜만이네. 그때 본 아가씨도 있구먼. 이 늙은이는 신경 쓰지 말고 편히 있다 가게나.”
손을 흔들어 인사를 받아준 황대길이 걸음을 옮겼다.
“오신다는 분이 둘은 아니겠고. 저 양반인가?”
“예.”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표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송민제입니다.”
“황대길이라네.”
황대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대길을 실물로 확인한 송민제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까의 어리숙한 모습이 사라졌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옷을 벗어서 의자에 거는 황대길을 보며 강현이 입을 뗐다.
“선생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침을 늦게 먹어서 괜찮네. 바로 시작해도 되겠나?”
“예. 준비해 놨습니다.”
강현의 대꾸에 황대길이 미소 지었다.
“엄한 이가 자꾸 주방에 드나들어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선생님께서 제 주방에 오시는 것만으로 영광이죠.”
그런 강현의 말에 황대길의 눈이 커졌다.
“이런, 이 친구가 아부만 늘었군.”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웃음을 흘렸다.
강현은 황대길의 말에 볼을 긁적였다.
‘진심이었긴 한데.’
옆에서 정말 많은 걸 배우고 있었다.
강현도 기술적인 부분은 탁월했지만, 연륜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황대길 정도의 실력자와 합을 맞출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있겠는가.
강현은 황대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에 담아 두고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둘을 보며 일행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둘의 태도가 무척이나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언제 저리 친해진 걸까?’
특히나 예전의 둘을 알고 있었던 세나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 * *
주방으로 들어온 황대길은 앞치마를 두르고 손을 씻었다.
“오늘은 넉넉하게 만들어야겠구먼.”
시식용뿐만 아니라 세나와 소현도 있었다.
황대길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둘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둘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몇 년 동안 함께 일한 것처럼 움직임이 맞아떨어졌다.
‘확실히 센스가 있어.’
황대길이 흐뭇하게 웃었다.
제자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질 정도였다. 제자들도 이제 위치에 오른 요리사였지만, 배울 게 있을 거다.
‘당장 나도 그러고 있으니.’
하지만 나중의 일이었다.
황대길은 요리에 집중했다.
얼마 뒤, 네 개의 접시 위에 어만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유난히 많은 양은 설기의 몫이었다.
‘방금 밥을 먹었는데.’
너무 많은 거 아닌가? 강현의 시선이 설기에게 향했다.
그러나 강현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꼬리를 흔들고 있는 설기. 벌써 기대감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강현은 실소를 흘리고 접시를 설기의 앞에 놓았다.
바로 먹기 시작하는 설기.
하지만 토리는 배가 부른지 바닥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를 테이블로 서빙했다.
“저희도 주는 거예요?”
“예. 서비스니깐 부담가지지 마세요.”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세나와 소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황대길과 강현의 합작.
조금 배가 부르긴 했지만, 먹어 보고 싶은 게 당연했다.
“선배님! 오길 잘했네요.”
소현의 말에 세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먹고 괜찮다면 감상을 들려주게나.”
“예, 선생님.”
“맡겨 주세요!”
황대길의 말에 소현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황대길은 강현과 함께 대표에게 걸어갔다.
“이게 그 음식이군요.”
어만두를 본 대표가 눈을 반짝였다.
“먹어 봐도 되겠습니까?”
“들게나.”
황대길의 말에 대표가 젓가락을 들었다. 어만두 하나를 입으로 넣는 대표.
그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놀라움은 잠깐. 곧 진지한 표정으로 맛을 음미했다.
황대길과 강현은 그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하나를 먹고 부족했는지, 또 다른 하나를 집었다.
이번에는 소스에 찍어서 입으로 넣었다.
“음.”
작게 고개를 주억이는 대표.
입 안에 있는 걸 삼키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셰프가 걱정한 이유를 알겠네요. 맛이야 두 분이 만든 것이니 당연히 맛있지만, 색이 독특하네요. 어울릴만한 구성을 짜는 게 쉽지 않겠습니다.”
그리 말한 대표가 턱을 쓸었다.
색은 음식의 색깔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맛을 뜻했다.
대표의 말대로 맛이 너무 튀었다.
올리려면 단품 요리로 올려야 했다. 양식 코스와는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고급 레스토랑의 경우, 단순히 맛있는 요리를 올리는 게 전부가 아니라 매장의 색에 맞는 요리를 찾아야 했다.
고민하던 대표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메뉴에 올려 볼게요.”
“괜찮겠어요?”
강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먼저 제안하긴 했지만, 강현도 쉽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대표가 입꼬리를 올렸다.
“보아하니 한두 번으로 끝날 것 같진 않은데, 맞습니까?”
대표의 물음에 황대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언제까지라고는 확답할 수 없겠지만, 몇 번 더 해 볼 생각이네.”
황대길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황대길의 눈길을 받은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도 많은 공부가 되었다.
둘의 대답에 대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렇다면 괜찮습니다. 지금은 청담의 레스토랑에 올리다가 나온 메뉴들로 새롭게 하나 만들죠.”
매장을 하나 더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대표의 말에 강현의 눈이 커졌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너무 크게 벌리는 게 아닙니까?”
걱정스러운 강현의 말에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사업을 확장하려고 생각 중이었어. 이번에 건물을 하나 매입했거든.”
대표가 눈을 찡긋했다.
“물론 이 셰프 덕분이야.”
“…와, 소문으로만 듣던 건물주가.”
뒤에서 소현의 감탄사가 들려왔지만, 일행들은 자연스럽게 못 들은 척했다.
강현도 건물주이긴 했지만, 대표와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다.
당연히 강현이 잘한다고 해서 대표가 말한 건물을 살 정도는 아닐 거다.
‘하긴, 다른 사업도 하니깐.’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야 강현도 부담이 적었다.
게다가 강현과 황대길의 레시피라면 맛은 보장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오히려 그게 나을 수도 있지.’
강현의 시선이 황대길에게 향했다. 최종 결정은 그가 하는 것이었다.
둘의 대화를 듣고 무언가 생각하던 황대길이 입을 뗐다.
“두 가지 조건만 들어주면 상관없네.”
“예. 말씀하십시오.”
대표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대길이 말을 이었다.
“한 가지는 내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네. 당연히 내 몫까지 강현을 줘도 상관없네. 아니, 오히려 그리 부탁하지.”
“선생님?”
강현이 놀란 눈으로 황대길을 돌아보았다.
황대길은 강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으로 판다면 선입견이 생길 수밖에 없지. 난 객관적인 반응을 알고 싶은 것이네. 물론, 강현이란 이름까지는 말리지 않겠네.”
황대길은 자신의 목적을 확실하게 밝혔다.
돈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려면 얼마든지 다른 수단이 있었다.
강현 역시 유명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황대길과 비교할 건 아니었다.
황대길의 이름이 나온다면 음식 평론가들조차 조심스러워질 거다.
강현은 대표를 돌아보았다.
황대길의 이름이 없다면 사업성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하지만 대표는 웃고 있었다.
“…재밌겠네요.”
오히려 입맛을 다시는 대표.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표의 성격을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다.
“또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강현은 이 대답은 알 것 같았다.
이미 논의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곧 황대길의 입이 열렸다.
“지금 나온 이 정도가 최저한의 퀄리티라네.”
“…!”
여기서는 대표뿐만 아니라 세나와 소현조차 숨을 들이켰다.
오직 강현만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다른 이가 만들어 팔 수 있게 개량한 것이야. 이 정도의 퀄리티를 내지 못하면 다른 음식이 되어 버려.”
그럼 팔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황대길의 말에 대표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 말씀은, 이건 두 분의 최선이 아니란 말씀이시죠?”
황대길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그 요리도 먹어 볼 수 있겠습니까?”
대표의 말에 황대길이 강현을 돌아보았다.
“부탁해도 되겠는가?”
이번에는 같이 하는 게 아니었다. 황대길의 말에 멈칫한 강현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일어나는 강현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대표.
그런 대표를 향해 황대길이 입을 열었다.
“둘이 하나, 강현 저 친구가 혼자 하나 마찬가지라네.”
이 요리를 완벽히 숙달했다는 뜻이었다.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움은 없었다.
강현을 스카우트한 건 대표였다. 강현의 재능과 능력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렇게 주방으로 향하던 강현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세나와 소현을 보았다.
“두 분도 드셔 보겠어요?”
“예!”
“괜찮다면 부탁드려요.”
강현이 시선이 테이블 위의 접시로 향했다.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
“너무 무리하는 건….”
“아뇨! 더 먹을 수 있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대답하는 소현.
옆에 있던 세나 역시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억지로라도 먹어야죠.”
둘의 반응에 강현이 웃음을 흘렸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컹!”
다급히 짖는 설기.
“…그래, 네 것도 준비할게.”
그제야 설기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어처구니없는 눈빛으로 설기를 보다가 주방으로 향했다.
잠시 후에 나온 요리.
어만두를 입에 넣은 일행들인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탄성을 뱉었다.
“맛있어!”
소현의 감탄.
그리고 대표는 실소를 흘렸다.
“…무슨 뜻인지 알겠네요.”
방금 먹은 것과 달랐다. 배가 어느 정도 부른 상태에서도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황대길의 말대로 전에 나온 어만두가 최소한의 기준이었다.
그 이상으로 벌어지면 전혀 다른 요리가 되어버린다.
‘요리사를 구하는 게 힘들겠어.’
그러나 반대로 기대가 되었다.
첫 작이 이 정도의 퀄리티라면 다른 요리들은 어떨까?
‘이건 잡아야 해.’
대표의 눈이 번뜩였다.
“하죠. 아니, 하게 해 주십시오.”
대표의 말에 황대길과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환하게 웃는 대표. 곧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뭔가?”
“새로운 매장이 정해지면 여기서 두 분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을까요? 물론, 따로 비용은 드리겠습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헤드 셰프만이라도….”
대표의 말에 강현이 슬쩍 황대길을 보았다.
황대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모르는 이에게 맡기는 것보단 직접 가르치는 게 나았다.
“그렇게 하게.”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계약이 성사되었다.
대표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계약서를 준비한다고 서울로 올라갔다.
행동력 하나는 놀라웠다.
그리고 세나와 소현 역시 오후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울로 향했다.
한산해진 매장.
바빴던 점심과 달리 저녁은 한산했다.
‘…갑자기 한가해졌네.’
이세계의 일도 끝났으니 며칠은 좀 쉴 수 있을 거다.
그리 생각한 것도 잠깐.
다음 날 새벽. 설기가 깨워서 주방에 내려온 강현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홀 바닥에 물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강현이 모르는 사이에 비라도 온 걸까.
그러나 그럴 리가 없었다.
강현은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물은 화장실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수도가 터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