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오늘은 마시고 죽는 거여!
결승선을 지난 설기가 보란 듯이 턱을 세웠다.
“아우우우.”
하울링.
그 모습을 보던 소년이 웃음을 터트렸다.
새끼인 설기가 그러한 행동을 해 봤자 귀여울 뿐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응언과 강현이 결승선을 지나쳤다. 결국, 설기를 제외하면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했다. 무언가 변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짧았다.
만일 거리가 더 있었다면 응언을 따라잡을 수 있었을 거다.
‘그 이상은 모르겠지만.’
강현은 숨을 고르며 설기를 보았다.
강현 역시 설기가 지나간 후에나 발견할 수 있었다.
선생님들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설기를 보고 있었다.
우승은 어디일까?
‘…저 마을이겠지.’
노인의 마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았다.
설기는 참가자도 아닐뿐더러 마을조차 달랐다.
관중석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강현과 응언은 소년에게 다가갔다.
“역시 잘 달리네.”
“정말 빠릅니다.”
둘의 말에 소년이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이쿠, 뭐 이리 빨라.”
뒤를 돌아보자 중년인이 뛰어오는 게 보였다.
“오랜만에 달리니 힘이 차네.”
멈춰 선 중년인이 옆구리를 잡았다. 그런 중년인을 본 소년이 의아해했다.
“도 대표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아무리 시간이 많이 지났다지만, 뛰는 자세조차 엉성했다.
중년인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어, 양궁.”
일행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도 대표로 뛰었다고 했지, 달리기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뛰었다’가 그런 의미도 있으니.’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중년인은 선생님들한테 다가가더니 입을 열었다.
“거 아무나 상 주면 되잖습니까. 대단한 상품도 아니고 애들 경기도 있는데.”
기껏해야 농협 상품권. 그것도 오만 원권이었다.
“이쪽들도 누구에게 주든 불만 안 가질 거예요. 저쪽은 시끄럽긴 하겠지만, 못마땅하면 직접 뛰어야지. 안 그래?”
단상 근처를 보며 중년인이 말했다.
강현과 응언은 물론이고 소년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단상에 있는 선생님에게 거는 것이었다.
그러자 중년인이 소년의 등을 두드렸다.
“우린 이만 가자.”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가 끝난 마당에 계속 남아 있을 이유는 없었다.
강현이 설기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달려오는 설기. 두 눈이 반짝였다.
마치 나 잘했지? 라고 묻는 것처럼 꼬리가 흔들렸다.
강현은 피식 웃고는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입에 물고 있는 바통을 건네받았다.
얼마나 강하게 물고 있었는지 이빨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강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바통에 묻은 침을 닦아 냈다.
옷이 더러워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것까지 선생님들께 맡길 수는 없었다.
그러자 중년인이 신기하다는 듯이 설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애가 참 똑똑해. 바통을 빼앗으려고 했는데, 쏙! 하고 피해 가더라고.”
바통이 중요하다는 걸 아는 것이었다.
강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아직 모르고 있네. 모처럼 인연이니 통성명이나 하자고. 난 장만기.”
“응언입니다.”
“이강현입니다.”
일행들의 시선이 소년에게 향하자 소년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곽도현이요.”
“어? 같은 현이네?”
중년인인 장만기의 말에 강현과 소년의 시선이 부딪혔다.
멋쩍은 웃음.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좋아. 나중에 이 아저씨가 술…. 아니, 밥 한번 사 줄게. 그쪽들도 같이.”
곽도현이 중학생이란 걸 깨닫고 급히 말을 고친 장만기가 호탕하게 웃었다.
같이 서 있을 때도 느꼈지만,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밥이라면 강현 씨네 가면 됩니다. 요리 잘합니다. 텔레비전에도 나왔었습니다.”
응언의 말에 장만기와 곽도현의 눈이 커졌다.
“역시….”
곽도현은 무언가 짐작 가는 게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달리 장만기는 몰랐었는지 놀란 눈빛으로 강현을 돌아보았다.
“이야, 대단하신 동생이었네. 그러면 안 먹어 볼 수 없지.”
그렇게 단상으로 향하자 민호가 강현을 맞이했다.
“수고했습니다.”
“컹!”
“그래, 설기도 수고 많았어.”
민호의 인사에 설기가 빙그르르 돌았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침 회의도 끝났는지 교장으로 보이는 이가 단상 위에 섰다.
[아, 아. 우승은 소금 마을입니다. 그리고 특별상으로… 음, 누구? 설기? 아, 설기에게 특별상으로 고급 사료가 제공됩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강현은 실소를 흘렸다.
‘사료라니.’
줘도 먹지 않는다. 동네 다른 개들에게 나눠 줘야 했다.
못마땅한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노인이 있었지만, 일행들은 개의치 않았다.
강현은 슬쩍 주변을 살폈다. 웅성거리는 소리.
“조그만 게 영리하네.”
“또 얼마나 잘 달려?”
“크게 될 놈이야.”
아무도 설기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그제야 강현도 안도할 수 있었다.
‘그래도 설렁설렁 뛰었나 보네.’
아니라면 벌써 문제가 되었을 거다. 강현은 그렇게 설기, 민호와 함께 천막으로 향했다.
걷고 있으니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장님 괜찮으실까요?”
노인에게 지기 싫어했다. 강현의 물음에 민호가 볼을 긁적였다.
민호 역시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둘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아이쿠, 둘 다 수고했어. 그리고 잘했다, 설기야.”
이장이 설기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휙 피하는 설기. 하지만 이번에는 이장도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손을 뻗었다.
휙, 휘익.
이리저리 고개를 흔드는 설기.
이장의 숨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설기야.”
강현의 나지막한 부름에 설기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밀었다.
결국, 이장이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몇 번 쓰다듬자 설기가 슬그머니 고개를 뺐다. 여기까지란 뜻이었다.
“고놈, 누굴 닮았는지 참 까칠혀.”
주변에서 웃음을 터져 나왔다.
강현이 이장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져서 죄송해요.”
강현의 말에 이장이 눈을 크게 떴다.
“뭔 소리여. 이겼잖어?”
“예?”
“민호도 둘보다 빨랐고. 강현, 그짝도 꼬맹이만큼이나 잘 달리더구먼.”
꼬맹이는 같이 달렸던 곽도현을 말했다.
“우리가 둘뿐이라 그렇지 넷이 나갔으면 이긴 거여. 그리고 다른 마을 다 합쳐도 이 녀석 하나 못 이기잖어?”
이장이 흡족한 표정으로 설기를 돌아보았다.
“자, 그러니 가서 잔치를 열어야지. 이걸로는 기별도 안 가.”
그리 말한 이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과 달리 비틀거리는 이장. 그러나 당장이라도 떠날 모습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등에 손바닥이 날아왔다.
“가긴 어딜 가! 애들 경기 안 봐?”
짝 소리와 함께 이장이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는 눈을 껌뻑였다.
“경기?”
때마침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제 마지막 경기인 계주가 시작됩니다.]
그제야 이장이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남았어? 진작 말을 허지.”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 이장이 슬쩍 자리에 앉았다.
강현 역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빼꼼 토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어디 있었어?’
아까부터 보이지 않았다.
토리는 엉금엉금 기어 오더니 강현의 발 옆에 드러누웠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
또 어디선가 먹고 온 게 분명했다. 지구만 오면 식탐이 폭발한다.
강현은 사람들 모르게 토리를 들어서 무릎 위에 올렸다.
그와 함께 아이들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성인과 달리 노랑팀과 분홍팀 각각 여섯 명이 운동장에 있었다.
‘…절반이 넘네.’
전교생 중 몇 명 빼고는 다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주자로는 상후와 철민이가 있었다.
탕!
총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뛰기 시작했다.
“노랑팀! 파이팅!”
“분홍팀 이겨라!”
서로의 응원이 들려왔다. 운동장을 달리는 아이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지막 주자가 결승점을 통과했다.
마무리 체조를 하고 폐회식을 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마을로 돌아갔다.
강현의 마을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운동회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는지 마을에 돌아가서 새롭게 술판을 벌였다.
“좋아! 오늘은 마시고 죽는 거여!”
“그러다가 진짜 가. 작작 마셔.”
옆에서 박 씨 할머니의 잔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장은 무시하고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이장뿐만 아니라 이미 취기가 오른 사람들 역시 호응하며 술잔을 들었다.
그를 본 박 씨 할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후야, 너는 저런 건 배우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할머니.”
고개를 끄덕이는 상후. 그 모습을 본 강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운동회가 막을 내렸다.
* * *
운동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현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비가 온 듯 축축하게 젖은 땅.
그것이 강현의 땀 때문이란 걸 모르지 않았다.
숨을 고른 강현이 란돌프를 돌아보았다.
“…진도가 너무 빠른 것 아니에요?”
저번과는 달랐다. 그러자 란돌프가 태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늑대의 가호인가? 그걸 받아서 회복력과 체력이 늘지 않았는가? 당연히 그만큼 훈련도 늘어야 하지.”
란돌프가 그리 말한 후 웃음을 터트렸다. 강현은 란돌프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대체 그걸 언제….”
그러자 란돌프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찾아왔었지. 이런 건 공평해야 한다고.”
그리 말한 란돌프가 고개를 주억였다.
“실력만 있는 게 아니라 마음가짐도 훌륭하더군.”
강현이 울상을 지었다. 이럴까 봐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강현은 힐끗 옆을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부러운 듯이 이쪽을 바라보는 요정이 하나.
뜨거운 시선에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어떻게 해야겠어.’
점점 과열되고 있었다. 열을 빼 줄 수단이 필요했다.
그런 강현의 머릿속에 운동회가 떠올랐다.
강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란돌프 씨. 전에 모였을 때, 노아 씨랑 숲을 돌았잖아요?”
“그랬지.”
란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괜찮았나요?”
강현의 물음에 란돌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괜찮았냐니. 무슨 말인가?”
의아해하는 란돌프를 대신하여 에밀리야가 나섰다.
“상대를 헤치려는 게 아니니 신의 뜻을 어긴 건 아니에요.”
“아, 그쪽 말이군.”
란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검을 겨누고 싶었는데, 아쉬워.”
입맛을 다시는 란돌프. 그걸 보며 강현은 생각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경쟁 자체는 가능하다는 거네.’
싸우지 않고 서로의 기량을 알아볼 수단은 얼마든지 있었다.
굳이 달리기를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당장만 해도 강현이란 매개체를 통해서 경쟁하고 있었다.
곧 강현이 고개를 저었다.
‘먼저 이번 일부터 해결해야지.’
당장 눈앞의 문제부터 풀어야 했다.
“란돌프 씨, 노아 씨를 만났다면 이야기는 들었나요?”
“그래, 우리 영주님을 직접 보고 결정하겠다더군. 그게 맞는 순서이지.”
고개를 끄덕이는 란돌프. 둘의 이야기에 사정을 모르는 에밀리야가 의아해했다.
그제야 강현도 아차 싶었다.
인간과 수인의 만남은 둘만의 일이 아니었다.
옆에 사는 요정들에게도 영향이 생길 거다.
강현의 시선이 향하자 란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해도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제가 이번에….”
“잠깐.”
강현이 입을 열려는 찰나 란돌프가 끼어들었다.
혹시 생각이 바뀐 건가?
돌아보자 란돌프가 진지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이럴 게 아니라 먹으면서 이야기하지.”
“아.”
그러고 보니 식사가 아직이었다. 강현이 에밀리야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같이 드실 거죠?”
강현의 물음에 에밀리야가 싱긋 웃었다.
“예, 부탁드려요. 그리고 두 분의 사정도 궁금하네요.”
고개를 끄덕인 강현은 배낭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