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냄비 위에 물을 붓고, 먹기 좋게 썰어 놓은 감자를 넣는다.
물이 보글보글 끓으면 된장을 넣고 풀어 준다.
된장이 들어가는 걸 본 란돌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뭔가?”
“장입니다. 전에 드셨던 고추장 같은 거예요.”
“그런가?”
강현의 설명에 란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긴 게 좀…. 그렇군.”
란돌프의 중얼거림을 들은 강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외국인에게도 생소하게 다가오는데, 이곳은 더 심할 거다.
뒤에 있는 에밀리야도 말은 하지 않지만 내심 신경 쓰고 있는 게 보였다.
웃음을 흘린 강현이 냄비를 확인했다.
‘된장은 끓이면 끓일수록 좋지.’
점점 맛이 우러난다. 게다가 감자가 충분히 익을 수 있을 시간이 필요했다.
강현은 옆을 돌아보았다.
옆에는 작은 냄비가 끓고 있었다.
희미하게 올라오는 쌀의 향.
밥을 짓는 것이었다.
‘슬슬 시간이네.’
불을 끄고 뜸을 들이기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제 국을 끓이는 냄비를 보자 감자가 조금씩 익는 게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강현이 다진 마늘은 크게 한 숟가락 넣었다.
“음?”
란돌프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늘과 된장이 섞이면서 흔히 알고 있는 찌개의 향으로 변해 갔다.
그 위에 고춧가루와 함께 양파와 버섯, 주키니 호박을 넣어 줬다.
끓어오르던 물이 잠잠해지더니 얼마 안 가서 다시 끓어올랐다.
여기에 고추장을 넣어 주면 풍미와 단맛이 강해진다.
‘내 취향은 여기서 청양 고추를 넣는 거긴 한데.’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오늘은 그냥 가기로 했다.
넣지 않아도 고춧가루와 고추장 때문에 맵긴 할 거다.
킁, 킁.
옆에 누워 있던 설기가 고개를 들었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강현은 피식 웃고는 간을 봤다.
‘조금만 더 끓이면 되겠네.’
이것만 있어도 강현은 충분하겠지만, 설기에겐 고기반찬이 필수였다.
강현은 그리들에 양념갈비를 올렸다.
크고 둥근 철판, 밑이 움푹 파여 있어서 국물 요리에도 쓰였다.
치지직.
달궈진 그리들에 양념갈비가 올라가자 연기가 자욱하게 올라왔다.
그와 함께 설기의 꼬리가 살랑거렸다.
강현은 고기를 익히면서 찌개를 마무리했다.
파와 두부를 넣어 주고 한 번 더 끓여 준 후, 냄비를 꺼냈다.
된장찌개 완성.
이제 양념갈비만 익으면 되었다.
설기와 란돌프의 눈은 양념갈비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와 달리 에밀리야는 된장찌개에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강현이 그릇에 밥을 옮기자 마침 양념갈비도 다 익었다.
한 덩어리를 설기에게 건네고 나머지는 먹기 좋게 썰어 줬다.
“정말 먹음직스러워 보이는군.”
란돌프가 짧게 감탄했다. 처음의 걱정스러운 기색은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란돌프의 시선이 강현을 향했다. 란돌프뿐만 아니라 에밀리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슬쩍, 양념갈비에 입을 가져가던 설기도 눈치를 보더니 입을 닫았다.
그들의 눈에 담긴 염원을 읽은 강현이 미소 지었다.
“그럼 먹을까요?”
“잘 먹겠네.”
“잘 먹을게요.”
“컹!”
에밀리야는 된장찌개를, 설기와 란돌프는 바로 양념갈비를 집었다.
그것만 봐도 서로의 취향을 알 수 있었다.
“음!”
“어머.”
음식을 입에 넣은 둘의 눈이 커졌다.
“이리 먹으니 또 다르군!”
란돌프는 전에 갈비를 먹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양념이 된 갈비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에 먹었던 스튜도 괜찮았지만, 제겐 이쪽이 맞네요.”
된장찌개가 마음에 드는지 에밀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먹었던 스튜는 김치찌개를 말하는 것이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육식을 선호하지 않는 요정이니 된장찌개가 나았다.
에밀리야의 말을 들은 란돌프가 된장찌개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허, 좋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더니 강현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술이 없는가?”
“아, 잠시만요.”
잊고 있었다. 강현은 디팩을 열어서 소주를 건넸다.
환하게 웃으며 소주 뚜껑을 연 란돌프가 의아해했다.
“강현, 자네는 안 마시는가?”
“예.”
쓴웃음을 지은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은 좀….”
최근에 너무 많이 마셨다.
가볍게 한두 잔 하는 건 상관없지만, 최근에는 그것을 넘어섰다.
‘회복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마실 수는 없었다.
강현의 말에 란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휴식도 중요해.”
그리 말한 란돌프가 소주를 병째 들이켰다. 강현을 힐끗 에밀리야를 보았다.
술을 마시지 않는 에밀리야.
마셔야 한다면 전처럼 마시겠지만, 먼저 찾지는 않았다.
고기와 마찬가지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음에는 차라도 챙겨 와야 하나?’
요정에게 찻잎을 준다는 게 좀 그렇지만, 품질을 떠나서 새로운 것이라면 흥미를 보일 거다.
에밀리야에게도 도움받은 일이 많으니 그 정도는 가능했다.
‘토리도 있고.’
강현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흙을 가지고 장난치는 토리.
지구와 달리 먹을 것에 흥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강현은 토리의 머리를 한 번 두드려 줬다.
* * *
어느 정도 식사가 끝나 가자 란돌프가 입을 열었다.
“그럼 슬슬 이야기해 볼까?”
“아, 예.”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토리와 장난치고 있던 에밀리야도 자세를 바로 했다.
강현은 차근차근 사정을 설명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부터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까지.
강현의 이야기가 끝나자 에밀리야가 신기하다는 듯이 강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강현이 당황해하자 그녀가 미소 지었다.
“강현 씨는 정말 상냥하네요.”
“예?”
뜬금없는 말에 강현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나 그녀는 웃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 옆에 있던 란돌프도 고개를 끄덕였다.
쑥스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헛기침을 한 강현이 입을 열었다.
“일이 생각보다 커진 바람에 에밀리야 씨도 알아 두셔야 할 것 같아서요.”
“예, 고마워요.”
에밀리야가 싱긋 웃고는 턱을 괴었다.
“음.”
생각에 잠긴 그녀를 보며 강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역시 곤란한 건가요?”
“아뇨, 오히려 반대에요. 이번 일이 잘된다면 요정들에게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강현이 의아해하자 에밀리야가 웃으며 말했다.
“요정들은 풀이나 나무를 다루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철이나 광물을 다루는 건 특기가 아니랍니다. 나이가 어린 요정들이라면 상관없지만, 대전쟁 이전의 시대를 겪은 요정들에게는 불편한 점이 있죠.”
“아.”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했다.
수인이나 인간과는 달랐다.
그와 함께 새로운 의문도 떠올랐다.
‘…에밀리야 씨는 대체 몇 살인 걸까?’
순간, 강현의 생각을 읽은 것인가, 에밀리야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강현은 재빨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에밀리야는 그런 강현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요정이라고 해서 모두가 반기는 건 아닐 거예요. 하지만 적어도 전 찬성합니다.”
“…혹시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강현의 물음에 에밀리야가 입을 열었다.
“요정끼리만 어울리다 보면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발전하지 못하면 퇴보하는 수밖에 없죠. 저희 요정들이야 수명이 기니, 그만큼 발전도 퇴보도 느리지만….”
에밀리야의 시선이 란돌프를 향했다.
그러자 란돌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라네. 고이면 썩는 법이지.”
에밀리야가 강현을 보며 말했다.
“나중에 결과가 나오면 알려 주세요. 저도 궁금하네요.”
그녀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자신이 아니라 란돌프에게 말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때, 란돌프가 손뼉을 쳤다.
“그럴 게 아니라 같이 오는 건 어떤가?”
“예?”
에밀리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만큼 놀라운 제안이었다.
“어차피 이 숲에서 진행될 테고, 강현도 있으니 호위란 명목으로 와도 나쁘지 않지.”
“예?”
이번에는 에밀리야가 아니라 강현이 되물었다.
그러자 오히려 란돌프가 의아해했다.
“그럼 자네가 주최자인데 당연히 와야지. 안 올 생각이었나?”
“아….”
생각해보니 그랬다.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가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텐데요.”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네. 인간과 수인이 다시 교류하는 영광스러운 자리 아닌가. 자네가 빠진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리 말한 란돌프가 강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물론 내가 있는 이상 자네가 위험에 빠질 일은 없겠지만, 인간도, 수인도, 아닌 요정이 중재자 역할로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지.”
듣고 보니 그랬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럴싸했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란돌프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게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요정에게 호위받을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강현의 시선이 에밀리야에게 향했다. 그러자 에밀리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께 폐가 아니라면 참여하고 싶네요.”
“영주님은 흔쾌히 허락할 거야. 아마 요정을 직접 볼 수 있으니 좋아하겠지. 수인족의 족장은 어떤가?”
란돌프의 물음에 강현이 카샨을 떠올렸다.
그녀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거 같아요.”
“그럼 되었네.”
란돌프가 호탕하게 웃었다.
“영주님께는 내가 허락을 맡을 테니 자네는 노아가 오면 물어보게. 그리고 영주님께서는 한 달 뒤 정도면 괜찮다고 하셨네. 수인들의 일정에 맞추겠다고 했으니 그것도 물어보게나.”
“예, 알겠어요.”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란돌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슬슬 가 봐야겠군.”
란돌프의 말에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은 일찍 가시네요?”
“내일이 헤나 생일이라….”
“아.”
헤나는 란돌프의 딸 이름이었다. 란돌프의 이야기를 들은 강현은 다급하게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무언가가 나올 리가 없었다.
“다음에 올 때 선물 챙겨 올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란돌프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강현도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해 주고 싶어서요.”
강현의 말에 란돌프가 머리를 긁적였다. 란돌프 역시 아버지인가. 강현은 란돌프가 쑥스러워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에밀리야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챙겨 올게요.”
란돌프가 입을 열려다가 닫았다. 강현의 선물을 받기로 했는데 에밀리야만 거절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둘 다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네.”
“예.”
“걱정하지 마세요.”
둘의 대답에 란돌프가 멋쩍게 웃었다.
“그럼 다음에 보지.”
그리고는 수풀을 향해 뛰어갔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란돌프.
마치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강현과 에밀리야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설기가 돌아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 * *
강현과 에밀리야는 먹은 걸 정리했다.
그렇게 정리가 끝난 뒤에도 에밀리야는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빤히 강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담스러워진 강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따로 할 말이 있나요?”
“혹시 추적술에 관심이 있나요? 이건 상당히 유용….”
“아뇨.”
강현은 에밀리야의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잘랐다.
에밀리야의 긴 귀가 처졌다.
“아니면 단검술이라도? 요리하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괜찮습니다.”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설령 도움이 된다고 해도 배울 생각이 없었다.
칼질은 지금 정도로도 충분했다.
“…예, 그럼 가 볼게요.”
시무룩하게 몸을 돌리는 에밀리야.
훈련으로 경쟁하는 둘을 보니 다시 소외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강현은 그런 에밀리야를 보며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저, 에밀리야 씨. 저번에 찻잎을 주셨잖아요.”
“예. 혹시 부족하신가요?”
에밀리야의 귀가 다시 쫑긋 올라갔다. 강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차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데 다음에 차 마시는 방법을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강현의 말에 에밀리야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요! 차를 우리는 건 요정을 따라올 종족이 없죠.”
환하게 웃는 에밀리야를 보며 강현도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