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래도 나쁘진 않네요.
빗줄기가 점점 줄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구름 사이로 푸르른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
“보다시피 아직 근무 중이라.”
란돌프는 허리에 찬 검을 두드렸다. 갑옷을 벗었음에도 검만은 계속 차고 있었다.
란돌프는 갑옷을 걸쳤다.
그리고는 잠깐 고민하더니 몸을 숙였다. 신발을 만지니 달칵, 소리가 났다.
손바닥 크기의 작은 단검.
‘저기다 숨길 수도 있구나.’
강현은 짧게 감탄했다. 단검의 손잡이는 고급스러운 천으로 둘러있었다.
그리고 손잡이 끝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혹시 다른 기사나 병사를 만난다면 이걸 보여주고 내 이름을 말하게.”
강현의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했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당하지 않게 란돌프 나름의 배려였다.
강현은 란돌프가 건넨 물건과 저 한마디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너무 깊숙이는 들어가지 말게. 맹약이 있긴 하나 이족들은 인간에게 호의적이진 않아.”
거기까지 말한 란돌프의 시선이 설기에게 향했다.
“물론, 저 녀석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주의해도 나쁠 건 없지. 그럼 또 보게나, 강현.”
여행자가 아니라 강현이라고 불렀다.
그리 말한 란돌프가 자리를 떠났다.
강현은 멍한 눈으로 란돌프가 한 말을 떠올렸다.
“이족?”
이민족을 말하는 건가? 이곳의 시대적인 배경이 중세라면 있을 법했다.
그보다.
“...설기가 있어서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강현은 설기를 돌아보았다.
평범한 늑대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강현의 시선에 설기는 길게 하품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천진난만한 모습.
오히려 무슨 일 있냐고 강현을 바라보았다.
피식 웃은 강현이 입을 열었다.
“란돌프라···.”
이세계의 주민. 그것도 무려 기사였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
“컹!”
강현의 물음에 뒤늦게 설기가 답했다.
그렇게 강현은 이세계에서도 인연이 생겼다.
* * *
이세계에 다녀오고 이틀 뒤.
강현은 매장 앞에 놓인 물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자전거?”
낡은 자전거.
낡긴 했으나 아직 쓸만해 보였다.
누가 놓고 간 걸까? 아니면 설마 버리고 가기라도 한 건가.
강현의 눈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어찌할지 모르고 주변을 둘러보던 강현의 눈에 휘적휘적 걸음을 옮기는 이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성범이가 어릴 때 타던 자전거네.”
“성범이요?”
“상후네 아비. 점례 할멈이 고마워서 가져다줬나 보네.”
역시나 이장. 마을의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이장의 말에 강현은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난감한 것은 변함없었다.
그러나 이장은 강현과 다르게 생각했다.
“잘됐네. 요즘 장 보러 읍내까지 나가지? 택시 타고?”
“예.”
강현의 대답에 이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 아깝게 그러지 말고 이거 타고 다녀. 샛길이 있어서, 옆 마을에 있는 슈퍼까지 이걸로 삼십 분이면 가. 거기가 읍내 마트보다 싸.”
강현은 눈을 껌뻑였다. 삼십 분이라니. 적은 거리가 아니었다.
차로 이십 분 걸린다는 걸 생각하면 가깝긴 했으나 자전거로 가볍게 나갈 거리는 아니었다.
심지어 평지가 아니라 언덕길이었다.
강현이 머뭇거리자 이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택시 타고 다니면 돈은 어떻게 벌 것이여! 내가 바구니 달면서 손봐 줄 테니 그리 혀. 운동도 되고 좋네!”
“...예, 감사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양도 얼마 안 되는데 매번 택시 타고 나갈 순 없었다.
그리 말한 이장이 자전거를 끌고 가려고 할 때, 멀리서 한 중년인이 달려왔다.
강현도 오다가다 몇 번이나 본 마을 사람이었다.
“이장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여?”
“멧돼지가 위에 밭을 엉망으로 만들어놨어요.”
“뭐? 또?”
이장의 눈썹이 하늘로 쏟았다.
“내 이놈의 멧돼지들, 이번에는 가만 안 둘 것이여!”
이장은 두리번거리더니 바닥에 굴러다니는 부지깽이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다가 휙, 돌아보았다.
“자전거는 나중에 손봐 줄 테니 여기 놔둬. 알겠어?!”
“...예.”
강현의 대답을 들은 후에나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가자!”
그리 말하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중년인은 강현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이장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떠나는 둘을 본 강현은 볼을 긁적였다.
“멧돼지라···.”
강현도 수진을 통해서 마을 사람 하나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긴 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라고.
그러나 문제는 상처가 아니었다. 올해 수확이 엉망이 된 것이었다.
강현은 이장이 떠난 자리를 보았다.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걱정스러운 강현의 목소리에 설기가 몸을 일으켰다.
짧은 다리로 위풍당당하게 걸음을 옮기는 설기.
뒤늦게 설기를 본 강현의 입이 열렸다.
“설기야, 어디 가?”
“컹!”
뒤도 안 돌아보고 짖더니 그대로 사라지는 설기. 그런 설기를 보며 강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곧 식사 시간인데.”
다른 건 몰라도 식사 시간은 철저한 설기였다.
의아해하던 강현은 곧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알아서 돌아올 거다.
그리고 강현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설기가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강현의 옆에 자리 잡는 설기를 보며 강현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 *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곧 부서진 나무를 보며 얼굴이 굳었다.
“어때?”
“...맞는 것 같네요.”
“그렇다니깐! 어서 허가나 내줘.”
“이장님 그리 쉽게 나는 게 아니에요.”
군청에서 나온 공무원이 곤란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를 본 이장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작년에도 그렇게 어물쩍거리다가 밭 다 망친 거 아녀! 벌써 올해도 두 번 째잖어!”
어제 나타났던 멧돼지는 결국, 놓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읍내로 나갔다 온 이장이었다.
허가받지 않은 사냥터에서 사냥꾼을 고용하려면 군청의 허가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이장의 호통 소리에 공무원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진정하시고. 일단 올무 허가를 신청할 테니···.”
“아니, 고놈들이 올무로 잡혀? 얼마나 영리한 놈들인데!”
당장 밭이 피해당하고 있었다. 밭마다 올무를 설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애가 타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공무원도 어쩔 수 없었다.
“이 산 뒤로 도로 개발이 들어가서 총기 허가가 나기 힘들어요.”
“개발은 개뿔! 사람도 안 다니는데 도로를 뚫어서 뭐혀?”
“안 다니니 조금이라도 다니게 하려는 거죠.”
공무원이 울상을 지었다.
그때 멀리서 한 청년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이, 이장님!”
“이 순경?”
옆 마을 파출소에 근무하는 순경이었다. 옆 마을에 있지만 이장이 있는 마을까지 담당이어서 오고 가면서 친분이 있었다.
멧돼지 때문에 같이 온 것이었다.
“차, 찾았어요!”
“뭘?”
“메, 멧돼지요!”
이 순경의 말에 이장의 눈빛이 변했다.
“그려. 총이 없으면 때려잡으면 되지. 이 순경, 안내혀!”
그리 말하고 달리는 이장. 마을 사람들 역시 분노한 표정으로 이장의 뒤를 따랐다.
그를 본 공무원이 다급하게 이장을 말렸다.
“위험합니다. 다쳐요!”
그러나 이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듣지도 않았다. 공무원은 울상을 지으며 그들을 말리기 위해 뒤따랐다.
하지만 그러한 공무원의 우려와 달리 상황은 심각하지 않았다.
이 순경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이장의 발걸음이 멈췄다.
산에서 내려와 마을로 향하는 길목.
“...뭣이여. 단체로 잠이라도 자는 겨?”
나란히 누워있는 멧돼지 세 마리. 덩치가 사람보다 컸다.
“죽은 것 같은데요?”
마을 사람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게다가 마치 누가 옮긴 것처럼 가지런히 누워있지 않은가. 일행들의 시선이 이 순경에게 향했다.
“제, 제가 찾았을 때는 저 상태였어요.”
그러자 이장이 휘적, 휘적 걸어 나갔다.
“위, 위험해요!”
공무원이 식겁하며 소리쳤지만, 이장은 듣지도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부지깽이로 쿡, 쿡 찔렀다.
미동도 하지 않는 멧돼지.
“맞네. 죽어부렸어.”
그제야 다른 이들도 와서 멧돼지를 살폈다. 그중에는 군청에서 나온 공무원도 있었다.
“대체 왜···.”
“알게 뭔가. 산에서 독버섯이라도 집어먹었겠지.”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이장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골칫거리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장의 목소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이제 어쩌죠?”
“뭘 어쪄. 잔치 때, 먹어야지. 괜찮지?”
마지막 물음은 공무원을 향한 것이었다. 공무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래도 검사는 해야 해요.”
ASF 검사.
공무원은 힐끗, 멧돼지를 봤다.
무언가 석연치는 않지만.
‘...뭐, 상처는 없으니 괜찮겠지.’
불법으로 사냥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허가도 어렵지 않았다.
* * *
잔치가 열렸다.
강현의 환영회 겸 멧돼지 퇴치 기념.
강현은 그 자리에서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익힐 수 있었다.
숫자가 많지 않은 탓도 있지만, 마을에 생활하면서 본 이들도 제법 있기에 어렵지 않았다.
곳곳에 있는 불판에 고기들이 올라간다. 마을 전체에 고기 냄새가 가득했다.
한 마리만 해도 마을 하나가 먹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남은 둘은 군청과 근처 마을에 나눠줬다.
돈을 주고 팔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필시 조상님이 내준 것이여. 이런 거 욕심내면 오히려 화가 돼.’
마을 사람들도 그러한 이장의 뜻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잔치에서 가장 인기 있는 건 당연히 설기였다.
자리를 옮겨 다니며 고기를 얻어먹고 있었다.
그런 설기가 마지막에 도착한 건 역시나 강현의 옆이었다.
정확히는 강현이 있는 자리.
“그치? 내가 굽는 게 가장 맛있지?”
고기를 굽고 있던 이장이 그 모습에 히죽, 웃었다.
설기가 돌아온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강현과 민호가 굽겠다고 했지만, 끝까지 집게를 건네지 않는 이장이었다.
이장의 시선이 강현과 설기에게 향했다.
“둘이 아주 복덩이여, 복덩이. 안 그래도 요놈들 때문에 매년 골치가 아팠는데 둘이 오고 나니 해결되고. 요놈들이 지들을 잡아먹으라고 마을 입구에 턱, 하니 누워있는 거 아녀?”
코가 붉어진 이장이 기분 좋게 떠들었다.
이장의 말에 강현이 옆을 힐끗거렸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기를 받아먹는 설기.
‘...아니겠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과한 상상이었다.
“덕분에 마을이 활기차졌어.”
거기까지 말한 이장이 탄성을 뱉었다.
“아니, 둘이 아니라 셋이었네. 내가 중요한 한 사람을 빼먹었어.”
이장이 시선이 향한 곳은 수진이었다. 볼록하게 올라온 배.
“이 마을에 아이라니 대체 몇 년 만이여. 이게 바로 겹경사지.”
이장의 말에 수진이 배시시 웃었다.
민호와 수진, 상후까지.
강현이 이곳에 와서 친해진 이들이 전부 옆에 있었다.
점례 할머니는 다른 할머니들과 함께 한 쪽에서 화투를 즐기고 있었다.
주위를 훑어보던 강현의 시선이 수진과 마주쳤다.
“정신없죠?”
강현은 부정할 수 없어서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이야 친한 이들과 삼삼오오 모여있지만 방금까지는 너도 나도 강현에게 다가와서 술을 따라줬다.
덕분에 취기가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이렇게 술을 마셔 본 적은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네요.”
강현의 말에 수진과 민호가 미소 지었다.
생소한 경험.
마을. 단순히 그곳에 사는 게 아니라 처음으로 하나의 집단에 속하게 되었단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강현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에이, 이 비린 게 뭐가 좋다고.”
노인의 불평이 강현의 귀까지 들렸다.
잔치가 한창이었는데 떠나는 한 할머니.
허리는 구부정했으나 걸음만은 꼿꼿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