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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은혜는 다음에 꼭 갚지.
순식간에 멀어지는 설기의 모습에 강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집에서 잘 지내긴 했어도 역시나 야생이 설기의 고향이었다.
그렇게 설기를 떠나보낸 강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설기라면 강현이 어디에 있던지, 알아서 찾아올 거다.
이제는 제법 익숙한 길.
‘아니, 이걸 길이라고 부르진 않겠지.’
나무뿌리를 밟으며 이동하던 강현이 주변을 둘러봤다.
마음의 짐이 한 꺼풀 벗겨진 탓인지 숲 역시 새롭게 느껴졌다.
싱그러운 꽃내음이 강현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여기는 계절이 없나?”
늘 봄처럼 포근했다. 어깨를 으쓱한 강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지난번 산에서 봤던 나무.
산 위에서도 보일 정도로 유난히 커다란 나무가 하나 있었다.
‘저기네.’
멀리 보이기 시작한 나무 한 그루.
거대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무들과 달리 나뭇잎 색이 좀 더 진했다.
짙은 녹색.
너무나도 아름다운 빛깔.
나무를 확인한 강현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때, 강현의 옆을 작은 그림자들이 지나쳤다.
첫날 보았던 다람쥐 가족이었다.
갈색의 꼬리가 열을 맞춰서 살랑거렸다.
‘아직 있었구나.’
설기와 함께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녀석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설기는 아무리 새끼라도 맹수였다. 초식 동물들이 피하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다람쥐들의 뒤를 쫓다 보니 어느새 나무가 보였다.
고개를 들어서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끝이 보였다.
굵기 역시 다른 나무의 몇 배는 되어 보였다.
다람쥐 가족들은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가 숨었다. 얼마나 잽싼지 눈으로 찾으려고 해도 보이지 않았다.
곧 위에서 시선을 뗀 강현이 배낭을 내려놓았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네.”
햇빛이 없고 선선한 바람만 불어오고 있었다.
잠깐 쉬고 가기에는 이만한 자리가 없을 거다. 강현은 배낭 안에서 그라운드시트를 꺼내서 깔았다.
돗자리로 쓰기에는 얇았지만 밑에 풀이 깔려 있어서 괜찮았다.
그리고 맥주 한 캔과 햄버거 하나를 꺼냈다.
얼음물과 함께 넣어놨기에 차갑게 식은 햄버거였으나···.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네.”
한 입 베어 문 강현이 미소 지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흔들리는 나뭇잎이 마치 음악처럼 들려왔다.
서울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여유.
그렇게 맥주를 홀짝이고 있더니 어느 순간 새하얀 털 뭉치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 * *
타닥, 타닥.
짧은 발로 열심히 뛰어오는 설기.
순식간에 달려와서 강현을 덮쳤다.
쿵!
“컥!”
충격에 삼켰던 맥주가 역류할 뻔했다.
‘무슨 힘이···.’
차에도 치인 느낌이었다. 강현이 가슴팍을 쓸어내리자 설기가 조심스럽게 강현의 눈치를 봤다.
“끼잉, 끼잉.”
잘못했어. 괜찮아?
그리 말하는 듯했다. 결국, 웃음을 터트린 강현이 설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통증이 남아있긴 했지만 심한 것은 아니었다. 설기가 해준 걸 생각하면 사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돼.”
“컹!”
미안한지 할짝, 할짝 자신의 손끝을 핥는 설기를 보며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하지만 아직 새끼였다.
강현은 배낭에서 햄버거 하나를 더 꺼내서 설기에게 건넸다.
허겁지겁 먹어 치운 설기.
곧 똘망똘망한 눈으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강현은 익숙한 듯이 배낭에서 햄버거를 하나 더 꺼냈다.
그러나 강현을 바라보던 설기가 갑작스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응?”
새라도 지나가는 건가?
강현도 따라서 하늘을 보았지만, 청명하기만 했다.
강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설기가 짖었다.
“컹! 컹!”
앞발을 들며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미안, 그건 못 알아듣겠어.”
음식 평가라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그 외에는 아직 어려웠다.
고개를 갸웃하던 설기가 곧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현은 설기가 했던 행동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쏴아아아아.
쏟아지는 빗줄기.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강현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며 혀를 찼다.
하지만 이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비가 와야 식물도 자랄 수 있는 것이었다. 다행이라면 나무가 빗물을 막아주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텐트라고 챙겨왔어야 했나.’
오늘은 일박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폭우를 뚫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강현은 나무 가까이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울퉁불퉁한 뿌리 때문에 앉기는 힘들었지만 비를 맞는 것보단 나았다.
“컹! 컹!”
그때, 설기가 짖으면서 돌았다.
이제는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금방 그칠 거라고?”
“컹!”
고개를 끄덕인 설기가 곧 빗물을 향해 몸을 던졌다.
첨벙, 첨벙. 비를 맞으며 뛰어노는 설기.
흙탕물이 튀면서 새하얀 털이 더러워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강현은 그런 설기를 보며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이것도 운치가 있네.’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에 영혼마저 씻겨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 비가 질렸는지 설기가 돌아오는 게 보였다.
강현 옆으로 와서 물을 터는 설기.
‘...예상했지만.’
강현은 옷에 묻은 흙탕물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해맑게 웃는 설기를 보니 나무랄 수가 없었다.
그때, 설기가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렸다.
또 뭔가가 있는 건가?
무심코 고개를 돌린 강현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그건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갑옷.
아니, 갑옷을 입은 중년의 기사.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달려오던 기사가 강현과 설기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또 만났군. 여행자.”
비가 오고 있긴 하지만 낮이라서 전보다 잘 보였다.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중세의 기사.
“같이 쉬어도 되겠는가? 보다시피 상황이 안 좋아서 말이야.”
기사는 하늘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습니다. 제 땅도 아닌데요.”
“고맙군.”
강현의 말에 기사가 나뭇잎 아래로 들어왔다. 그리고 갑옷에 입은 물기를 털어냈다.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갑옷을 벗기 위해 등을 더듬었다.
하지만 물이 묻은 탓에 쉽지 않았다.
“도와드릴까요?”
“오, 그래 주겠나?”
기사는 선뜻 등을 맡겼다. 강현은 갑옷의 조임쇠를 풀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갑옷이 벌어짐과 동시에 아래로 물도 쏟아졌다.
“많이도 들어갔군. 어쩐지 무겁더라니.”
태연하게 말하는 기사. 강현은 질린 눈으로 그런 기사를 바라보았다.
무거운 갑옷을 입고 물까지 짊어진 상태에서 뛰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강현이 놀란 건 갑옷만이 아니었다.
갑옷을 벗으니 드러나는 몸. 옷이 젖은 탓에 굴곡이 전부 드러났다.
‘...몸이 아니라 흉기네.’
성난 근육들이 열심히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근육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옷 틈새 사이 사이마다 상처도 가득했다.
영화와 다른 실제 전사의 몸.
기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신발도 벗어서 물을 뺐다.
그때, 옆에 있던 설기가 강현의 허벅지를 쳤다.
“컹!”
“아, 더 줄까?”
고개를 끄덕이는 설기. 기사의 몸에 놀라서 설기를 잊고 있었다. 설기의 식성을 생각하면 햄버거 두 개로는 부족할 거다. 강현은 배낭에서 햄버거 하나를 꺼내서 건넸다.
꼬리를 흔들며 햄버거를 먹는 설기.
설기를 지켜보던 강현은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
기사가 설기가 먹는 햄버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나 노골적인 시선.
“...하나, 드릴까요?”
“그래도 되겠는가?”
기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다.
어차피 햄버거는 넉넉하게 가져왔다.
강현은 웃으며 배낭에서 햄버거 하나를 꺼내서 건넸다.
기사는 강현이 했던 것처럼 종이 포일을 벗겨내더니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곧 기사의 눈이 커졌다.
“...맛있군! 맛있어!”
감탄을 연발하면서 햄버거를 먹어 치웠다. 그런 기사의 행동에 강현이 머쓱하게 웃었다.
칭찬 같아서 낯간지러웠기 때문이었다.
곧 햄버거 하나를 먹어 치운 기사가 아쉬운 듯이 포일을 바라보았다.
두 눈 가득 떠오른 실망감.
강현은 웃음을 삼키고는 햄버거를 더 꺼냈다.
“하나 더 드릴게요.”
“...괜찮겠나? 자네가 먹을 것 아닌가?”
“전 또 만들면 됩니다.”
그리고 이미 하나를 먹었다. 그런 강현의 말에 기사의 눈이 커졌다.
“이걸, 직접 만든 건가?”
“예.”
“대단하군! 여행자가 아니라 요리사였어. 아니 여행하는 요리사인가!”
그리 말하며 웃음을 터트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받겠네.”
이번에는 전보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햄버거를 곱씹었다.
강현은 그런 기사를 보다가 맥주를 홀짝였다.
그러자 햄버거를 씹던 기사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건 뭔가?”
“...술입니다.”
“술?”
기사의 눈이 반짝였다. 그런 기사를 보며 강현이 물었다.
“드릴까요?”
“...아니, 괜찮네. 이미 충분히 받았어. 더 신세 질 순 없지.”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기사. 강현은 그런 기사를 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네.’
맥주를 꺼내서 건넸다. 선뜻 손을 뻗지 않는 기사를 보며 강현이 말을 보탰다.
“안 그래도 너무 많이 챙겨와서 곤란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그제야 기사가 손을 뻗었다.
기사도 강현의 말이 사실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부담감을 줄여주기 위한 거짓말.
서로 알면서도 넘어간 것이었다.
맥주캔을 받은 기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에게는 생소한 물건이었기 때문이었다.
강현은 맥주 하나를 더 꺼내서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 따면 됩니다.”
치익, 안에서 맥주의 거품이 올라왔다. 그를 본 기사가 감탄했다.
“호오, 아티펙트는 아닌 것 같은데. 신기한 물건이군!”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기사의 손가락이 커서 캔 뚜껑을 열기 쉽지 않았다.
결국, 강현은 새로 딴 캔을 기사에게 건넸다.
한 모금 마신 기사가 감탄했다.
“맥주군! 맥주가 이리도 깔끔하다니.”
기사는 캔을 살피고는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한 기사의 말에 강현의 눈이 빛났다.
‘이곳에도 맥주가 있는 건가?’
감상은 짧았다. 맥주와 햄버거를 먹는 기사를 보며 강현도 맥주를 홀짝였다.
기사는 맥주를 마시는 강현을 힐끗거렸다.
‘옷차림이 바뀌었군.’
장비도 변했다. 낯선 이가 마을에 들렸다면 기사의 귀에도 들어왔을 거다. 그러나 그런 소식은 받지 못했다.
‘...하긴, 상관없나?’
타인에게 자신의 것을 선뜻 양보할 수 있는 이였다.
마을에 문제가 되진 않을 거다. 게다가 애당초 강현이 악한 이였다면 하얀 늑대가 붙어있지도 않았을 거다.
그렇게 햄버거를 먹은 기사가 강현을 돌아보았다.
“강현이라고 했던가?”
기사의 물음에 강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소개하지. 난 로벤투스 기사단의 단장인 란돌프라네.”
영지의 기사가 아니라 기사단의 단장.
‘...높은 직책인가?’
중세 시대 때 기사의 위치를 생각하면 결코, 낮지 않을 거다.
란돌프의 말이 와닿지 않은 강현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를 오해한 란돌프의 눈이 빛났다.
‘역시.’
란돌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은혜는 다음에 꼭 갚지.”
“아뇨. 그럴 필요는···.”
은혜라니. 그렇게 거창한 일을 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란돌프는 고개를 저었다.
“그대의 요리는 훌륭해. 그러니 그만한 가치가 있네. 시간이 있으면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란돌프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