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281)화 (281/282)

<281화>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이면서 키제프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갰다. 그녀에게도 데뷔탕트 볼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미 결혼을 했으니 상대를 찾으러 온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인 사교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하여 두 사람이 발을 떼자마자, 여기저기서 몰려드는 귀족들의 인사가 쏟아졌다. 웃으면서 화답해 주고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침 수로 옆 테이블에 클로디아가 웃으면서 루시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국의 별 클로디아 황녀님을 뵙습니다. 참, 황위 계승자가 되셨다는 소식도 들었어요. 축하드립니다.”

“서신으로 축하해 주었잖아요, 어서 오세요, 두 사람이 도착하니 온실이 더 환해지는 것 같네요. 유리온실은 봐도 봐도, 만족스러워요. 황실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 되었어요.”

“황녀님의 마음에 드신다니 기뻐요.”

“저뿐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은데요?”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루시엘과 키제프에게 짧게 환호를 보내 주었다.

루시엘이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키제프와 손을 꼭 잡았다. 이내 그녀가 두 사람을 데리고 연회장의 한 곳으로 향했다.

“두 사람 나를 따라와요. 첫 춤은 출 거지요?”

“황녀님?”

클로디아를 따라가 보니 영애가 레이스 양산을 쓴 채 앉아 있으면, 그 뒤로 춤을 신청할 영식들이 가면을 쓰고 선택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어떤가요, 재미있는 전통이에요. 가면을 쓰고도 공자비의 선택을 받을 수 있겠어요?”

“……제 유일한 상대는 그녀뿐인데 굳이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클로디아가 은근히 키제프를 자극했다.

“혹시 공자비가 다른 사람을 뽑을까 봐 겁이 나시는 건 아니지요?”

“걱정하지 마, 키제프. 내가 널 못 알아볼 리 없잖아.”

“……좋습니다. 부인, 이따 봐.”

키제프가 의지를 불태우며, 영식들이 가면을 고르는 공간의 커튼을 헤치고 들어갔다.

그런데 낭패였다. 주변 영식 중에 키제프처럼 금발에 하얀 슈트를 입은 사람이 또 있었다.

게다가 키까지 비슷했다. 그 남자에게 첫 춤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키제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자꾸 눈이 마주치니, 그는 인사까지 청했다.

“벨슈타인 공자시지요? 반갑습니다. 카프넨 폰 카르한입니다.”

카르한이라면 남부 해안 지역의 공작가, 아흰 공자의 가문이었다. 그의 형인 모양이었다.

남부 사람 특유의 건강미가 돋보이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백금발, 근육질의 몸은 얼마나 좋은 건지 슈트로도 전혀 가려지지 않았고 유들유들한 인상이었다.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섹시한 외양을 가져, 묘하게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다.

“키제프 폰 벨슈타인입니다.”

그가 청하는 악수에 힘주면서 키제프가 답했다.

“우리 가문의 가호석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제 동생에게 들었는데 벨슈타인 공자비께서 뛰어난 안목과 능력을 지니셨다고요.”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하지만 답을 듣기 전 클로디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엘 폰 벨슈타인 공자비와 춤추고 싶은 남성분은 가면을 쓰고, 나와서 그녀의 뒤에서 선택을 기다려 주세요.”

웃음을 터트린 카르넨은 금색의 사자 가면을 재빨리 집으면서 말했다.

“저도 일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도전, 해도 되겠지요? 댄스 상대가 아니면 대화할 기회도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쉽지만 영원히 그 기회는 없겠습니다. 제 아내는 저와만 춤출 테니까.”

그리 살벌한 눈빛을 보낸 키제프가 검은 흑표범 가면을 썼다.

이어서 다른 영식들이 앞다투어 가면을 골라 썼고, 커튼을 걷고 나온 일곱 명이 루시엘의 뒤에 섰다. 가면이 일곱 개였던지라, 실상 경쟁에서 진 사람은 가면을 차지하지도 못했다.

“무려 일곱 명의 영식이 공자비의 춤 상대가 되고 싶어 하시네요. 아니, 결혼한 분의 인기가 이렇게 많을 일인가요?”

클로디아가 미소를 터트렸다. 레오니를 학술원에 데려다주느라, 뒤늦게 따로 마차를 타고 도착한 벨슈타인 공작 부부가 그 모습을 보았다.

“우리 딸 넘보는 놈들이 너무 많은데. 암조를 보내 저놈들 신원을 알아내야겠어. 아니, 키제프 이놈은 뭐 하고.”

“루이, 다 들리겠어…….”

이내 루시엘이 뒤돌아서 양산을 접은 다음, 가면을 쓴 남성들을 쭉 돌아보았다.

하필이면 하얀 슈트에 비슷한 체격, 금발이 몇 명이나 있었지만, 루시엘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리 비슷한 차림을 해도 수없이 눈에 담았고 마음에 담은 제 남편을 찾는 일은 너무 쉬웠다.

살짝 빗어넘긴 짙은 금발과 흑표범 가면이 크게 느껴질 만큼 작은 얼굴, 자신을 항상 안아 주던 너른 가슴, 압도적으로 긴 다리 길이.

솔직히 제 남편보다 더 이상적인 신체 조건을 가진 남자는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루시엘이 다가가서 그의 앞에 섰다.

“흑표범님, 저와 춤추시겠어요?”

다 알고 있음에도 괜히 긴장되고 설렜다.

“영광입니다, 레이디.”

슬쩍 올라가는 단정한 입매, 낮고 다정한 목소리를 확인한 루시엘이 드레스를 살포시 붙잡고는 우아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키제프도 고개를 주억이며, 루시엘의 손을 마주 잡고는 손등에 키스했다.

마침 부드러운 춤곡이 시작되어 두 사람은 댄스 플로어로 이동했다.

“정말 완벽한 커플이에요.”

모두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결혼식 날의 어설픈 왈츠가 괜스레 떠올라 루시엘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다.

키제프의 손은 루시엘의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코앞에서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빙글빙글 돌았다.

“나인 줄 어떻게 알았지?”

“널 몰라볼 수가 없잖아. 나 이제 네가 어디 있든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

루시엘의 말에 키제프는 심장이 쿵쿵 뛰어서 멈칫하느라 하마터면 스텝이 꼬일 뻔했다. 귓불까지 붉어진 채였다.

“……괜찮아?”

“안 괜찮아. 누구 때문에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거든.”

키제프는 그리 말하면서도 춤을 완벽히 리드하고 있었다. 서로를 향한 눈빛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따뜻한 숨이, 천천히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루시엘도 두근거렸다.

빙그르 도는 루시엘의 허리를 잡아 주며, 키제프가 귓가에 속삭였다.

“이 춤 끝나기 전에, 여기서 나가자. 둘이 조용히 있고 싶어.”

루시엘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장 눈에 띄어 백조처럼 어여뻤다. 그녀의 눈웃음 한 번에도 마음이 일렁여서 주체하기 어려웠다.

‘이 정도면 중증이긴 해. 심각할 정도로.’

뭣보다 다른 남자들이 루시엘을 계속 주시하는 시선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곡이 끝나면 루시엘에게 춤 신청이 쇄도할 테니, 그 전에 자신이 독차지할 계획이었다.

“응? 아직 연회는 한참인 거 같은데?”

“오늘따라 너무 예뻐서. 나만 보려고.”

“흑표범 씨도 잘생겼어요.”

루시엘이 놀리자, 그가 가면을 벗어던지고는 그녀를 안아 들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납치할 거야.”

“어어? 누가 안 간다 했나? 나 걸어갈 수 있어…….”

“어머나.”

귀족들이 놀라면서도 좌우로 갈라졌다. 마치 그녀는 제 것이라고 뭇 남자들에게 경고라도 하는 듯한 행동에 공작이 잘했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공작은 곁에 있던 아내 솔리아페의 손등에 키스하고는 근사하게 눈을 휘며 속삭였다.

“……우리도 오랜만에 춤출까.”

“루이? 나 춤 못 추는 거 알잖아.”

“괜찮아. 리드는 내가 해. 나만 따라와.”

능숙한 솜씨로 그녀를 리드하는 공작의 댄스 실력에 공작 부인 솔리아페는 주변 여성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샀다.

* * *

두 사람은 나란히 손을 잡고 말없이 터벅터벅 밤길을 걸었다.

“키제프, 어디 가는데?”

“둘이 있을 곳.”

키제프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아담한 궁을 가리켰다.

“다 왔다. 오늘 여기서 머물 거야.”

“……우리 맘대로 그래도 돼?”

“응. 말해 뒀어.”

황성 시녀장에게 가장 한적하고 근사한 궁이 어디냐 물었더니, 이곳 스완궁이라고 일러주었다.

“조용하니 좋네.”

“근사해, 황성에 이런 궁이 다 있었어?”

루시엘도 감탄을 쏟으며 둘러보았다. 근처에 커다란 연못이 펼쳐져 있었고, 백조 모양의 하얀 배도 한 척 매여져 있었다.

“백조 배도 있다.”

그 뒤로는 하얀 천막이 달린 테라스 정원과 야외 욕조가 있었고 멀리 유리온실의 연회 풍경을 바라볼 수도 있었다.

아무도 없이 정말 둘만이 있는 듯해 아늑하게 느껴졌다.

궁 안으로 들어오자 화려한 방과 응접실에는 우아한 가구들이 정돈되어 있고, 침실에는 커다란 침대가 두 개나 있었다.

욕실 옆 드레스룸 안에는 갈아입을 옷까지 있고, 티룸까지 있었다.

응접실로 들어선 그녀가 신이 난 듯 진홍빛 눈을 빛내면서 소파에 앉았다.

“멀리 여행이라도 온 기분이네.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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