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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82)화 (282/282)

<282화>

“……그러게. 작년에 전장에서 돌아온 후로는 이렇게 둘이 있을 여유가 없었지.”

키제프는 지난 삼 년간 무려 다섯 번이나 원정 토벌과 전장을 다녀왔다. 그럴 때마다 죽을 만치 괴로워하면서도 꿋꿋이 떠났다.

그래서일까.

나날이 성숙해지는 키제프의 붉은 눈동자를 가만 들여다보면, 불꽃이 일렁였다. 마냥 아름답던 소년이 아니라, 이제는 남자의 눈을 하고 있달까.

재킷을 벗어 소파에 걸친 키제프가 루시엘을 응시하며 앉았다. 시선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움찔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못 긴장해 있는 루시엘의 팔을 잡으며, 나직이 그가 불렀다.

“루시엘.”

순식간에 키제프의 눈빛이 사뭇 진해졌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 생기로 반짝이는 눈이 사랑스럽다. 손으로 덧그리고 싶을 만큼 앉아 있는 그녀의 옆태가 고왔다.

“오늘도 날 홀려 놓는군.”

사르르, 눈이 곱게 접히는 키제프의 눈웃음이야말로 사람을 홀리는 듯한 미소였다.

살짝 풀린 셔츠의 단추 사이로 드러난 그의 속살에 루시엘의 진홍 눈동자가 여지없이 흔들렸다.

“…….”

루시엘은 어쩐지 어색하고 볼이 자꾸만 화끈거려서 가느다란 숨을 토했다. 그저 낯선 공간에 둘이 있어서 긴장한 것만은 아닐 터였다.

별궁에서도 같이 지냈지만, 한 번도 이런 낯선 분위기인 적은 없었는데.

저를 뚫어지게 보는 그의 눈이 핏빛 가넷, 혹은 머나먼 우주의 별 같았다. 루시엘이 어색함에 눈을 굴리면서 말했다.

“저기. 키제프, 배는 안 고파?”

“안 고픈데. 다른 게 고파.”

“…….”

평소 같았으면 장난치지 말라면서 피했을 테지만, 왠지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두근, 두근.

내내 심장 박동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단정하게 맞물려 있던 키제프의 입술이 달싹이더니, 그녀의 뺨을 손등으로 어루만졌다.

“……루시엘. 난 항상 네 모든 것에 갈급했던 것 같아.”

“응?”

“너를 누군가에게 빼앗길까 불안했던 적도 있고, 너를 내게 묶어 두려고 했었지.”

“키제프.”

“네가 주는 사랑이 늘 고팠고, 내 사랑을 더 표현하고 싶었는데. 꽉꽉 눌러 놔서 그랬는지도 몰라.”

“……그러기엔 많이 표현한 것 같은데.”

루시엘이 말갛게 웃어 보이자, 키제프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닌데. 우리 이제는 계약 따위가 아니라 진짜 부부니까, 얼마든 해도 되잖아.”

“무엇을?”

루시엘이 가만히 그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고개를 주억이다가 물었다.

“그 말, 있잖아.”

루시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키제프가 말했다.

“언제부턴가 너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이 됐어.”

“…….”

“사랑해.”

루시엘은 그 말을 듣자마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사랑해, 루시엘.”

그가 내내 불안했던 건 아마도, 이 말을 하지 못해서, 듣지 못해서였을까?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려도 내게는 너뿐이야. 너 역시 그렇다면 들려줘.”

“바보. 내 눈빛, 행동, 마음도 전부 알잖아.”

“……말로 해 줘. 아주 정확한 문장으로. 다른 가족에겐 잘만 하면서.”

키제프가 눈을 곱게 흘겼다.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봐.”

누구보다 사랑하는 남자가 눈앞에 있고, 그는 루시엘의 대답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그래, 나 한 번도 내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구나.’

문득 깨달은 마음.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어린애였다.

그런데도 키제프는 언제나 그녀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보면서 사랑하고 보듬어 주었다.

죽어 가던 전생의 루시엘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 마주쳤던 그에게 그저 용서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어쩌면 그 슬픈 얼굴에서 너의 상냥함을 알아본 건지도 몰라.

키제프 폰 벨슈타인.

이번 생에 유일하게 루시엘이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줄 남자.

단 하나의 사랑.

루시엘이 슬플 때도, 힘들 때도, 즐거울 때도.

매 순간 그는 누구보다 열렬하게 사랑해 주었다. 그러니 이제는 루시엘도 응답해 줄 차례였다. 가슴 끝까지 차오른 충만감에 루시엘이 천천히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나도…… 너를 사랑해. 키제프.”

루시엘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누가 내 심장을 깃털로 간지럽히나?’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면서 뺨을 붙잡고는, 키제프가 다가왔다.

“나도 너무 사랑해, 루시엘.”

그의 높은 콧날이 루시엘의 뺨을 눌러 왔다. 둘의 입술이 겹쳐지며 열리자, 뜨거운 속살이 서로를 어루만지듯 얽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하고 감미로웠다.

두근, 두근.

그러곤 단단히 휘감아 이내 잡아끌듯이 놔주지 않았다. 짜릿한 키스에 루시엘은 깜짝 놀라,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뜨거운 숨결이 끝없이 넘어오고 삼켜졌다. 숨을 쉴 수조차 없이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이 사람이라고 외치는 것처럼 심장이 열렬하게 표시를 낸다.

깊이 빨려드는 강렬한 키스에 루시엘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숨이 가빠 그와 떨어졌다.

그 틈에 키제프가 추격하듯 쫓아와 루시엘의 흰 목덜미에도 입술을 꾹 눌러 도장처럼 찍었다. 향긋하고 보드라운 살결에 정신이 아뜩해질 것만 같았다.

파아아, 또로로롱.

그녀의 떨리는 심장 가까이에서 깊은 울림을 내며, 손바닥처럼 큼지막한 선홍빛 하트가 맺혔다.

키제프의 눈이 일순 커졌다. 루시엘이 그간 만들어 낸 하트 중에 가장 커다랗고, 빛깔도 아름다웠다.

그 어떤 보석보다 선명한 루시엘의 감정. 사랑이었다.

“하트 더 커졌어. 아직 내 사랑에 비하면 멀었지만.”

키제프가 미소 지으면서 루시엘의 이마와 입술, 양 볼에 키스하며 품에 꼭 안았다.

루시엘은 그의 어깨에 기대면서 새로 만든 페어리 하트를 살폈다. 반짝반짝 영롱한 빛을 내는 동시에 보석 자체에서도 심장박동같이 둥둥 울렸다.

‘새로운 힘을 가진 걸까……?’

심장의 두근거림이 도무지 멈추질 않는다. 루시엘이 키제프의 뺨을 쓸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 감정이 얼마만큼 커다랗게 되었는지, 내 힘이 너와 얼마만큼 이어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나 약속할게. 널 마음껏 사랑하기로…….”

루시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뜨겁게 다시 맞닿은 입술이 깊게 키스를 이어 갔다. 둘의 연회는 이제 시작이었다.

훅 뜨거워진 열기는 좀처럼 식지 않았다. 혀가 얼얼해질 때까지 키스하고 약간 눅진해진 그의 단단한 가슴으로 폭 고꾸라졌다.

달콤한 체 향이 나는 그녀의 은발과 포근한 살결에 코를 박으며, 키제프가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꿈보다 아름다운 현실.

제게 고백하는 루시엘이 사랑스럽고 애틋해서, 뭐라고 설명할 수조차 없는 기분이었다.

키제프는 오늘을 잊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루시엘의 얼굴을 사랑스럽게 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잊은 게 있었다.

생일 선물.

키제프가 주머니에서 벨벳 상자를 꺼내고, 진주 목걸이를 꺼내 걸어 주고는 그녀의 하얀 목에 쪽 입을 맞췄다.

뽀얀 피부라 그런지 드레스 위로 하얀 진주 목걸이가 더없이 잘 어울렸다. 그의 눈빛에서 꿀이 녹아내렸다.

“기가 막히네. 예뻐.”

“고마워, 이렇게 예쁜 진주는 처음 봐. 생일 선물인가?”

루시엘이 목걸이를 매만지면서 물었다.

“응. 진주는 네가 못 만드는 거 같아서.”

“나 대신 조개들이 열심히 만들지.”

루시엘이 사과를 베어 문 듯, 상큼하게 웃었다. 어김없이 그 촉촉한 입술에 쪼듯이 키스하며 키제프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시엘, 백조 타러 가자.”

“……노 저으려고?”

“그럴 팔뚝과 근력은 있는데. 마법이란 편리한 수단이 있지.”

두 사람은 신이 나서 배에 올라탔다.

잔잔한 호수의 물결은 요요하게 빛났고 쏟아지는 달빛, 총총 빛나는 별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 아래 새하얀 백조 배가 둥실 둘을 태우고, 유유히 노닐었다.

그새 차가워진 밤바람이 둘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나부끼게 했다.

키제프의 재킷도, 그의 온몸이 루시엘을 품어 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빛은 달콤하고 제 곁을 채우는 온기는 아늑했다.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열려서일까. 루시엘은 온전히 자유롭게 지금을, 이 감정을 누렸다.

파아아.

또로롱, 또롱!

루시엘의 심장이 끝없이 울리는 것처럼, 수없이 보석이 맺히며 떨어졌다.

생애 가장 행복한 건 바로 이 순간.

벨슈타인에 처음 왔던 아홉 살의 어린 루시엘이 행복해지기로 한 날부터 정확히 팔 년이나 흐른 지금까지.

루시엘은 차곡차곡 행복을 쌓고 있었다. 앞으로의 미래도 그럴 계획이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그리고 이 남자와 함께.

누구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대로 보석을 만들어 내는, 크리스털 페어리로.

루시엘은 곁에 있는 그에게 다시금 속삭여 주었다.

“사랑해, 키제프.”

“내가 더 사랑해.”

<完>

-외전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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