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루시엘은 전신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백합 자수가 놓인 연보라색 드레스는 루시엘의 길고 가느다란 목선과 어깨선이 드러나 한결 여성스럽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기품이 흘렀다.
“이제 다 크셔서 이렇게 여성스러운 드레스가 잘 어울리시네요. 우리 아가 마님. 몇 년 전만 해도 깜찍한 옷이 잘 어울리셨는데.”
“그럼 베시가 나 키워 준 거나 마찬가지야. 늘 감사하고 있는걸.”
루시엘이 미소를 머금으면서 맑은 눈을 굴리곤 베시를 폭 안았다. 베시의 머리에는 루시엘의 보석으로 세공한 머리핀이 꽂혀 있었다. 루시엘이 선물한 뒤로는 항상.
별궁 밖으로 나선 루시엘은 뜻밖의 풍경을 보고는 진홍빛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게 다 뭐야? 너무 예쁘다.”
마차의 지붕은 물론이고, 안까지도 온통 작약과 푸른 수국, 리시안셔스와 라넌큘러스, 백합 등 갖가지 꽃으로 장식되어 있는 꽃마차였다.
마차 문이 열리자 안에서는 하늘색 정장을 입은 키제프가 분홍색 장미를 한 아름 안고 내렸다. 그 광경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설렜다.
눈을 휘면서 키제프가 말했다.
“열여덟 살 생일 축하해, 루시엘. 태어나 줘서 고마워. 내게 와 준 것도.”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루시엘이 감동해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미소에 어쩐지 가슴 안쪽이 꽉 조여드는 것 같았다.
“고마워, 키제프. 나 너무 행복해.”
루시엘이 설렘과 감동에 또롱, 또롱 스피넬과 토파즈를 만들었다. 그러곤 분홍색 장미를 품에 안고는 장미 내음을 깊이 들이마셨다. 싱그러운 생장미의 향이 너무 좋았다.
“얼른 마차에 타실까요, 내 공주님?”
루시엘이 사르르 웃으면서 그의 손을 잡고는 마차에 올랐다.
둘을 태운 마차는 곧 연회장 앞에 멈춰 섰다. 키제프의 에스코트를 받아 연회 홀에 들어서자 사방이 캄캄하고 조용해서, 루시엘은 키제프의 손을 잡고 물었다.
“정말 여기 맞아? 잘못 온 거 같아.”
루시엘이 뒤돌아 가려고 하자 어디선가,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가지 마!”
“레오니?”
레오니가 달려와선 루시엘의 남은 손을 꼭 맞잡고는 웃었다.
열세 살 듬직한 소년이 된 레오니는 브랑카르 학술원에 아직 다니고 있었는데 활달한 성격이라, 전교 회장도 맡고 있었다.
“주인공이 어디 갈려고 그래.”
이윽고 어둠 속에서 케이크의 18개의 촛불이 켜졌다. 딸기가 잔뜩 올라가 있는 커다랗고 새하얀 케이크에는 루시엘의 이름까지 초콜릿으로 적혀 있었다.
“우리 사랑하는 새아기, 생일 축하한다.”
“생일 축하해, 루시엘!”
“우리 예쁜 손주 며늘아가. 누구보다 최고로 행복한 생일을 만들어 주고 싶었단다!”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인사와 함께 촛불에 아른거리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그녀를 위해 준비한 깜짝 생일 축하인 듯했다. 루시엘은 어느새 감동으로 맺힌 눈물을 닦아 내며 말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감사하고 사랑해요. 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요?”
“당연하지. 네 행복이 이 아비의 행복이다.”
공작이 그리 말하자 레오니가 루시엘을 흔들었다.
“누나, 빨리 불어. 촛농 떨어져.”
“알겠어.”
루시엘이 대답하고는 얼른 촛불을 후후 불고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가족들과 함께 있어서 행복해요. 언제나 지금만큼만 행복하게 해 주세요. 더는 욕심부리지 않을게요. 아, 딱 한 가지 있다면 언니를 다시 만나게 해 주세요.’
기도를 마친 루시엘이 기쁨의 에메랄드와 감동의 토파즈를 또롱, 만들어 내면서 가족들과 포옹을 나누었다.
“조그맣던 네가 이렇게 어른이 될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 루시엘, 너는 한시도 쉬지 않고 누구보다 노력해 왔지 않니. 그러니 마음껏 행복할 자격은 충분하단다. 벨슈타인에 와 줘서 고맙구나.”
길리아트가 루시엘의 손을 꼭 쥐면서 따스하게 말했다.
‘벨슈타인에 와서는 언제나 행복한 일들뿐이었어요.’
루시엘은 길리아트의 말을 가슴에 새기면서 생각했다. 오히려 그들 덕에 더 많은 것들을 얻으며 자랄 수 있었다. 사랑이 뭔지, 행복이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가족들의 사랑으로 마음이 따뜻하게 차올랐다. 이벨린이 다가와 루시엘을 가볍게 안으면서 물었다.
“저녁에는 데뷔탕트 볼에 참석한다고?”
“네, 할머니. 같이 가시면 좋을 텐데 아쉬워요.”
“잘 다녀오려무나. 할미와는 나중에 도모하기로 한 일이 있으니, 그때 가면 될 터이지.”
샹들리에가 켜지자, 홀 안에는 다른 반가운 얼굴도 몇 있었다.
제르다와 팔짱을 낀 에리카가 근사한 붉은 드레스를 입고는 다가왔다.
“에리카 언니, 어서 와. 머리 기르니까 너무 예쁘잖아. 잘 어울려.”
“루시엘 생일 축하해. 생일 선물은 저기 양말 나무에 모아 놓으라고 하기에 놔두었어.”
“생일 축하드립니다.”
“축하 고마워요, 두 사람. 여전히 예쁘게 잘 만나고 있는 모습 보니까 좋다. 항상 일에 도움 주는 것도 고마워. 두 사람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루시엘의 칭찬에 에리카와 제르다가 볼을 붉혔다. 벌써 몇 년째 만나고 있는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에게 푹 빠져든 완벽한 커플이었다.
“아, 루시엘. 이거 주려고 왔는데. 나중에 읽어 봐.”
그러더니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그러나 루시엘은 곧장 뜯어 보았다. 청첩장이었다.
둘이 결혼이라니! 순식간에 눈이 휘둥그레진 루시엘이 에리카를 와락 안아 주었다.
“와, 결혼하는구나. 축하해, 언니. 축하해요, 제르다 씨. 꼭 갈게요.”
그 밖에도 막스와 캐서린, 노아와 엘링턴, 에바 등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눈 루시엘은 문득 눈에 띄는 곳으로 가 보았다.
별궁에 있던 양말 나무가 중앙에 옮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선물상자들이 산만큼이나 쌓여 있었다.
각지에서 루시엘에게 보내온 생일 선물과 편지들이었다.
“이걸 다 열어 보는 데도 한참 걸리겠는걸.”
행복한 고민이었다. 그러던 중 양말 나무 가까이 솔리아페가 다가와 루시엘의 손을 잡았다.
“루시엘, 비록 며느리지만 너는 우리 집의 아주 귀한 딸로 키웠단다.”
“맞아요. 키워 주신 은혜, 보내 주신 사랑 전부 다 알고 있어요.”
“생색내려던 건 아닌데 그만큼 네가 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알았음 해서.”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진 루시엘이 솔리아페에게 폭 안겼다.
“선물은 데뷔탕트에 다녀온 이후에 풀고, 조금 쉬었다가 떠날 준비를 하도록 할까?”
“네, 엄마.”
루시엘은 고개를 주억이면서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결코, 잊지 못할 열여덟 살의 생일. 가족들의 사랑이 너무나 과분해서 루시엘은 또 보석을 한가득 쏟아 내지 않기 위해 잠깐 심장을 도닥였다.
* * *
같은 날 황실 데뷔탕트 볼의 저녁이 깊어 갔다.
“유리온실에서 데뷔탕트가 치러지는 건 이번이 처음 아닌가요?”
“맞아요. 이 년 전 황후 폐하의 탄신일에 가깝게 완성되었는데, 그동안 황실에서만 사용하셨는데 이렇게 공개가 되니 너무 기쁘네요.”
“그래서 그런가. 이번 데뷔탕트는 유난히 더 설레요. 장소가 주는 힘이 있다니까요.”
처음으로 참여하는 영애들과 그녀들을 데려온 귀부인들마저도, 유리온실의 아름다움에 푹 빠졌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천장으로 스며들어 오는 색색의 빛 그림자가 아롱진 무늬들이 아름다웠다.
바닥에는 수로들이 있어 그 옆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온실 안에 장식된 꽃과 나무들, 마법 효과로 만들어 낸 나비와 긴 원형의 테이블.
한 곳에는 작은 그네까지 설치해 놓아서 어린 영애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영식들은 지켜보고 있다가 마음에 드는 영애가 그네를 타면, 은근슬쩍 밀어 주면서 마음을 표현하고는 했다.
마치 요정의 연회라도 온 듯한 풍경이었다.
음악이 흐르자, 대리석을 깔아 놓은 댄스 플로어에는 짝을 맞춘 귀족 영애와 영식들이 첫 춤을 추고 있었다.
이번 데뷔탕트 볼을 주관한 건 황후였지만, 클로디아도 함께 흐뭇한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
“정말 완벽한 데뷔탕트야.”
“맞아요, 어머니. 아름다워요.”
“황녀 전하, 첫 춤을 허락해 주십시오.”
“저는 오늘 춤추지 않겠어요.”
시노어 후작가의 영식이 춤을 청했지만 클로디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가 보고 있는 이는 사실 다른 곳에 있었으니.
유리스 폰 랜버트.
황성의 근위 기사이자, 랜버트 후작가의 장자.
그는 2년 전에 별안간 타지로 발령을 신청하고, 마물 토벌을 떠났다.
‘황녀님께 어울리는 남자가 되어서 돌아오겠습니다. 제가 돌아올 때, 그때는 곁에 남아도 되겠습니까.’
그런 고백과 함께.
클로디아가 상념을 떨치고 있는데 갑자기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벨슈타인가의 마차가 유리온실의 아치형 입구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공자비 부부가 도착한 모양이에요.”
클로디아와 황후도 한껏 반가운 얼굴로 들어서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순백색의 하얀 드레스를 입은 루시엘과 하얀 수트를 입은 두 사람이 다정하게 들어서자,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벨슈타인 소공작 부부가 나란히 있자, 천상에 온 듯 그들의 미모에 눈을 뗄 수 없었던 터였다.
“세상에 다 가진 사람이 있다면, 저분들일 거예요.”
한편, 루시엘은 완성된 유리온실을 본 적은 있지만, 연회장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걸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키제프도 뿌듯한 마음이 차올랐다.
“너무 아름답다. 막스 씨도 보게 된다면 좋을 텐데.”
“그러게.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낸 결과야.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루시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