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콩알처럼 동그란 눈망울을 가진 건 뜻밖에도 어린 나무였다. 가느다란 팔도, 몸통도 전부 나무와 가지였고, 머리 위에는 여린 나뭇잎들이 열 개 남짓 달려 있었다.
그 모습이 약간 가여워 보이기도, 귀엽기도 했다. 루시엘이 물었다.
“네가 지팡이의 정령이니?”
정령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을 깜빡였고, 팔 부분으로 추정되는 가지를 양쪽으로 마구 크게 흔들었다.
“……내가 와서 반가워?”
‘혹시 눈만 있어서 말을 하지 못하는 걸까?’
그러자 지팡이의 정령이 열심히 손짓하며, 무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다랗고 펼칠 수 있는 것? 아, 두루마리?”
그제야 지팡이의 정령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정령은 오르골 안에서 꽤 오랫동안 갇혀 지내서인지, 밖으로 나오는 걸 꺼리는 듯 조심스러웠다.
“괜찮아. 같이 찾으러 가자. 여기 내 어깨에 앉을래?”
루시엘이 상냥하게 정령을 어깨에 올리고는 가넷 테이블에 있는 두루마리로 가서 내려 주었다.
그러자 지팡이의 정령이 두루마리를 영차영차 힘들게 굴려 접었다.
“에고, 숨차. 이제 됐네요! 두루마리가 펼쳐져 있으면,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저걸 꼭 닫아야 해요.”
두루마리 위에 살포시 걸터앉은 지팡이의 정령이 그제야 말했다. 귀여운 아이의 목소리였다.
“아, 그랬구나. 미안.”
“괜찮아요. 루시엘 님이 오셔서 저 악기에서 나올 수 있었어요. 그러니 저의 은인이세요. 엣헴,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저는 지팡이의 정령이에요.”
고개를 붕붕 저은 지팡이의 정령이 루시엘에게 머리를 숙였다.
“반가워. 이렇게 귀엽게 생겼을 줄은 몰랐네.”
루시엘은 제 팔뚝 크기의 지팡이의 정령을 보며 배시시 웃고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루, 루시엘 님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세요!”
지팡이의 정령이 팔을 마구 크게 벌리며 칭찬했다. 두루마리의 메시지 말투는 꽤나 무뚝뚝했는데, 실제는 달랐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은 저기 달 모양 보석의 세 번째 비밀을 찾고 싶어서야……. 도와줄 수 있니?”
루시엘은 제 뒤에 둥실 떠 있는 열세 번째 보석을 가리켰다. 그러자 지팡이의 정령은 감격에 겨운 듯, 양손을 모으며 파르르 떨었다.
“아아, 페어리 문은 정말 영롱해요.”
“이 보석의 이름이 페어리 문이었구나. 요정 달.”
“네, 요정의 세계에 있었던 달이 이렇게 영롱하고 투명하게 빛났다고 해요. 페어리 문 보석이 깨어난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에요!”
루시엘이 힘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요정들은 이미 오래전에 대부분 사라졌으니까…….”
탐욕에 눈이 먼 악한 자들에 의해서. 그리고 지금도 그 악에 대항해야 했다.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요정으로서, 마땅히 악과 맞서 싸워야 해.’
루시엘의 보석안이 보다 깊게 빛났다.
“페어리 문에 대해 알려 줘. 요정의 노래 악보에 의하면, 성안에 사슬이 있다고 했어.”
성안의 공간을 자세히 찾아보고 싶었지만, 지금 루시엘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러자 지팡이의 정령이 물었다.
“사슬만 찾으면 되나요?”
“응. 첫 번째 시간의 책, 두 번째 세상 모든 마법의 힘은 알게 됐어.”
“세 번째 힘은…… 성의 가장 높은 첨탑으로 가면 돼요! 저를 데리고 가 주세요.”
“알겠어.”
루시엘은 지팡이의 정령을 데리고, 서둘러 성의 가장 꼭대기로 향했다. 레비테이션 마법으로 날아올라서.
슈우우.
몰아치는 바람에 루시엘의 은발이 휘날려 엉망이 되었고, 어느새 시야도 뿌옇게 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몽실한 구름들.
그 사이를 뚫고 솟은 성의 첨탑에 가까스로 다다랐다.
“……다 왔어요!”
지팡이의 정령은 어지러워 비틀거리면서 말했다. 루시엘이 슬쩍 첨탑 아래를 내려다보자, 밑이 까마득해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그나저나 정말 천국에 온 것처럼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전부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긴 완전히 다른 세상 같다. 아, 페어리 문은?”
모습이 보이지 않아 살짝 뒤를 확인하니, 페어리 문과 지팡이도 그녀의 뒤를 졸졸 잘 따라와 도착했다.
첨탑의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루시엘은 번개의 사슬을 찾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슬은 어디에…….”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뱃사공의 나룻배가 오면, 그가 구름 사이에서 낚아 온 구슬을 딱 하나 고를 수 있어요. 거기엔 가짜 번개와 진짜 번개가 뒤섞여서 들어 있어요.”
생각지도 못한 방법에 루시엘이 물었다.
“그걸 어떻게 구분하는데?”
“진짜 번개는 나무만 보면, 내리꽂아서 두 동강을 내 버릴 거예요. 저를 대 보면 알 수 있어요.”
“……뭐? 그럴 순 없어. 그럼 네가 다치게 되는걸.”
보기에도 퍽 연약해 보이는 지팡이의 정령을 희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사실 그것밖에 몰라요. 하지만 뱃사공은 몹시 탐욕스러우니까요.”
지팡이의 정령이 시무룩해진 듯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때 지팡이 정령의 말처럼 구름 사이를 오가는 작은 나룻배가 보였다. 배에는 모자를 푹 눌러쓴 뱃사공…… 아니 시커먼 까마귀가 앉아 있었다.
루시엘이 물었다.
“뱃사공이 까마귀였어?”
“네.”
이내 까악, 소리를 낸 까마귀가 노 젓기를 멈추자, 첨탑 위로 나룻배가 멈췄다.
그러곤 배 안에 있던 바구니를 물고 와서 루시엘에게 보여 주었다.
투명한 구슬이 잔뜩 있었고, 구슬 안에는 갖가지 모양의 번개들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것이 진짜인지, 그냥 봐서는 도무지 구분이 어려웠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다.
‘까마귀들은 반짝이는 것을 좋아하니까. 보석을 거절할 리가 없지.’
“……이거 줄까?”
루시엘은 자신의 에메랄드 하나를 꺼내서 허공에 던졌다가 받으며 약 올리듯 보여 주었다. 그러자 까마귀의 눈이 탐욕스럽게 빛나더니, 보석을 움켜쥐려고 난리가 났다.
까아악.
파드닥!
루시엘은 곧장 제지하면서 보석을 뒤로 감췄다.
“잠시만. 네 구슬을 전부 주면, 내 보석을 줄 거야.”
깍깍!
까마귀가 대답하듯 울더니, 알아들은 모양인지 바구니를 슥 발로 밀었다.
그러고는 검은 부리로 톡톡 바닥을 쳤다.
그에 루시엘이 조용히 에메랄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단숨에 낚아채더니, 나룻배도 버려 둔 채 쏜살같이 구름 사이로 날아가 버렸다.
멀어지는 까마귀를 보며 루시엘이 중얼거렸다.
“……어쨌든 구슬을 얻었으니 됐지? 이제 진짜를 구분해야겠네.”
루시엘이 빙그레 웃으며, 바구니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냥 절 이용하세요.”
지팡이의 정령이 그렇게 말했지만 루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 진짜 힘이 되는 물건이라면, 페어리 문 보석에 반응할 거야. 지금껏, 알아낸 첫 번째 두 번째도 모두 그랬는걸.”
루시엘은 영롱한 페어리 문을 양손으로 안고 가져왔다. 그러자 그중에서 다섯 개의 구슬이 제자리에서 통통 튀면서, 안에 들어 있던 번개가 반짝 빛을 냈다.
“드디어 찾았어. 세 번째 힘.”
루시엘은 해머 마법을 이용해, 유리구슬 하나를 부쉈다.
파사사!
이리저리 튀어 오르던 번개가 번쩍 빛을 내며, 페어리 하트의 주변을 휘돌았다.
나머지도 전부 부수자, 페어리 하트가 금빛으로 옷을 갈아입듯 색을 바꾸어 빛나며 결합하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눈부신 빛 때문에 루시엘은 도무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쿠르르릉, 콰앙!
소용돌이치던 빛과 소리, 지척에 울리던 공명음이 멎었다.
루시엘이 눈을 떴을 때는 강한 마나로 단단히 연결된 금빛의 사슬이 물결치고 있었다.
“……이건 어떻게 사용하는 걸까.”
지팡이의 정령도 그건 모르는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루시엘은 이내 빛의 사슬이 몸으로 자꾸만 들어오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빛이 나한테로 오려는 거 같은데.”
두려움에 살짝 피했다가 한 발자국 다가가니, 루시엘의 허리춤에 사슬이 먼저 휘리릭 감겼다. 이내 그것과 연결된 페어리 문의 달 보석은 크기를 한참 줄이더니, 장식처럼 대롱대롱 걸렸다.
루시엘이 허리춤을 매만져 보자, 차가운 금속이 잡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저 빛이었는데 말이다.
“……음, 이거 허리 장식으로 쓸 수 있는 건가?”
“멋져요!”
“그치만 조금 부담스러운걸. 너무 눈에 띄어.”
이렇게 번쩍거리는 허리띠를 두르고 다니다가는, 어딜 가든 범죄의 표적이 될 듯했다.
“더 작게는 안 될까……?”
그런 루시엘의 생각을 읽어 내린 듯, 허리 장식이 된 사슬이 스르르 풀리더니 이번에는 크기를 줄였다.
한참 줄어들기를 계속하던 사슬이 루시엘의 검지를 휘감았고, 완전히 변형이 끝나자 페어리 문이 반지의 보석처럼 예쁘게 마무리되었다.
루시엘도 그제야 손을 보더니, 만족했다.
“이건 마음에 들어.”
“멋진 반지네요!”
번개의 힘을 품은 사슬과 페어리 문이 어우러진 반지. 이제 이걸로 무얼 할 수 있는지, 돌아가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루시엘은 지팡이의 정령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오늘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네가 아니었더라면 구하지 못했을 거야.”
지팡이의 정령이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말했다.
“루시엘 님을 만나서 저야말로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오시기만을 기다릴게요.”
“그래, 아직 성안을 다 둘러보지 못했으니까. 아,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는데.”
루시엘은 일시아 언니를 떠올리며 물었다.
“네에.”
“혹시 우리 언니, 보지 못했니? 나랑 똑같은 은발과 눈동자를 하고 있고. 키는 이만하고, 순한 인상인데……. 이름은 일시아라고 해.”
루시엘이 언니의 생김새를 설명해 보았지만, 지팡이의 정령은 자그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여기는 무의식의 세계잖아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요. 아마도 언니분은 다른 곳에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이제 여기에 없는지도 몰라요.”
정령의 말에 루시엘은 시간의 책이 떠올라, 납득이 되었다.
“무슨 말인지 조금 알 것도 같아. 다음에도 지팡이를 성장시켜야만 올 수 있어?”
“아니요. 지팡이는 완전히 성장이 끝났어요. 루시엘 님이 해내신 거예요! 지팡이를 곁에 두고 잠들면 또 올 수 있어요.”
“그렇구나, 고마워. 또 찾아올게.”
이제는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