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루시엘을 꿈에서 만난 그날 이후 레이놀드는 달콤한 허영에 젖어 있었다.
신전 맞이에서 입을 고급 의복을 벌써 꺼내 놓는가 하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잠을 자서 꿈꾸기를 시도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공상에 잠겨 그런지 몇 번이고 그의 꿈에 루시엘이 나타난 적도 있었다.
꿈에서 루시엘이 만들어 낸 갖가지 보석들을 모조리 박은 마검 블루 익스큐션은 제 손에 착 달라붙었다.
세상을 호령했고 만인이 제게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역시 제물을 바쳐 완벽하게 부활했고, 벨슈타인을 완전히 점령하자 그에게 항복하지 않는 귀족들이 없었다.
눈에 거슬리던 황제와 황후는 독살하고 클로디아는 콴드라 지역의 서부 왕에게 노예로 팔아 버렸다.
꿈의 끝에선 넘치는 보석을 만들어 낸 루시엘을 탑에 유폐시켜 자신만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실로 완벽한 미래다.’
하지만 처음 루시엘을 만났던 때처럼 생생한 꿈은 아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크리스털 페어리가 가까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건 미래를 예견한 꿈이 아닐까……. 루시엘을 가지면, 벨슈타인과 제국이 전부 제 것이 될 터이니.
씰룩이던 입꼬리가 올라갈 때쯤, 신관들 여럿이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이 창밖으로 보였다. 왠지 부산스러운 분위기에 의구심을 품은 레이놀드는 밖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요즘 부쩍 추기경 휘하의 신관들이 자주 돌아다니는 듯했다.
“빌어먹을. 가뜩이나 그것에게 마나를 주지 않은 지 꽤 시일이 지났는데…….”
하기야 이미 신관들에게 차곡차곡 빼앗은 마나로 어둠의 심장을 키운 탓에 그놈은 몸집이 불어날 대로 불어나 있었다. 더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되었다.
“지난번에 로프를 타고 내려가 확인했을 때, 어둠의 심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잘 여물어 인형 군단을 토해 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신전 맞이를 기다리며 그는 콧노랠 흥얼거리다가 차가운 시선으로 살기를 흘렸다.
제 방에 아예 자리를 잡고 지내는 작은 눈토끼의 귀를 움켜쥐었다.
“가만 보면 넌 조금 이상하단 말이지. 보통 짐승들은 내가 살기를 뿜으면 근처로 잘 다가오지 않는데…….”
혹자는 사람을 잘 따른다고 좋아하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토끼 주제에 자신을 빤히 지켜보는 눈동자가 오늘따라 퍽 기분 나빴다.
“……신전이 살린 줄 알아라.”
바동바동 몸부림치는 토끼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던 레이놀드가 이내 문을 열고 밖으로 내보낸 다음 다시 들어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혼자 남겨진 토끼는 사방을 살피더니, 아르제온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곧장 바람처럼 사라져 건물 위에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뭔가를 눈치챈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냥 미친놈의 단순한 변덕인가?”
그러고 보니 루시엘이 일러준 그것, 어둠의 심장에 대한 이야기를 아까 황자도 입에 담았다.
로프를 타고 제 눈으로 확인했다면, 역시 그것은 지반 아래 있는 모양이었다.
아르제온은 통신구를 열어, 해당 사실을 알렸다.
―이제 황자를 더 감시할 순 없겠구나. 고생했어, 아르제온. 천공선이 이미 지반 아래를 정찰 중이야. 그치만 아르제온은 하늘을 날 수 있으니까 같이 조사하면……
“……나는 도대체 언제 아기 영지로 돌아가서 쉴 수 있는 거지?”
아르제온이 불만 섞인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정 힘들면 피닉스에게 대신 부탁할게. 그렇지만 아르제온은 누구보다 믿음직한 마도사잖아……! 다녀오면 보수 기대해. 원하는 만큼 줄……
“……! 좋다. 기다려. 10분 내로 끝낼 수 있다.”
루시엘의 설득에 넘어간 아르제온은 곧장 마법으로 몸을 투명화한 후 천공섬의 지반 아래로 날아갔다.
휘이이잉.
바람을 가로질러 가 보니, 루시엘이 말했던 커다란 배 한 척이 아스트리야에 인접해서 살피고 있었다.
배에 비해 아스트리야의 크기는 약 200여 배는 되어 보였다.
그러나 천공선의 선체가 제아무리 민첩하게 비행을 한다고 해도, 저보다는 아닐 듯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탐사를 하기 시작한 아르제온은 10분은커녕, 몇 시간 동안 탐사만 해도 모자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지반 표면에 엉겨 붙은 잡초들과 바위 따위가 많았고, 투명화와 비행을 동시에 구사하려면 많은 마나가 들었다.
아르제온은 휘날리는 머리칼을 넘기며 속으로 셈을 하는 중이었다.
‘……악덕 고용주 같으니. 이건 아무래도 보석 100개짜리다.’
그렇게 구시렁거린 아르제온이 얼마나 날아다녔을까. 어느새 날이 어둑해졌다.
마나를 안정시키기 위해, 몇 번 정도 휴식하고 정찰을 반복한 결과. 마침내 두 시간이 흐를 때쯤 문제의 어둠의 심장으로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바위에 엉겨 붙은 그것을 본 아르제온은 문득 그것이 자신의 ‘얼음의 심장’과 생김새는 다르지만 유사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강한 마나와 사악한 힘, 그리고 악취가 느껴졌다.
온통 끈적한 점막으로 씌워진 어둠의 심장에는 보라색의 꽃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바위에 엉겨 붙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핏줄 같은 뿌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검붉은 뿌리는 가늘지만 여기저기 뻗어 있었다. 그걸 따라가 보니, 심각한 걸 발견했다.
“……허억, 미친. 어둠의 심장이 하나가 아닌데!”
서서히 뒤로 물러나며 세어 본 것만 해도 서너 개.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닐 듯했다.
저러다가는 아스트리야의 양분을 전부 빼먹을 것처럼 위태해 보였다.
잔뜩 놀란 눈이 된 아르제온은 허겁지겁 루시엘에게 통신했다. 그러나 좀처럼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르제온은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 * *
같은 시각 루시엘은 잠에 막 빠져든 참이었다. 무지갯빛으로 빛나던 이노센트 지팡이가 텅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루시엘의 무의식 세계도 열렸다.
달 보석의 세공 장치가 저절로 풀리며, 보석이 바닥에 맑은 빛을 뿌렸다.
파아아.
루시엘의 심장으로 모여든 마나가 물결을 이루었고, 그 속에서 어느새 마나 방울이 톡톡 물방울처럼 피어올라 잠든 그녀와 지팡이를 감싸듯 뒤덮었다.
마나 방울이 날아가며 그와 함께 루시엘과 달 보석이 자그만 빛줄기로 이어지더니 스르륵 사라졌다.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루시엘은 코끝을 간지럽히는 꽃내음에 눈을 떴다.
“……여기는?”
분홍빛의 꽃나무는 여전히 꽃잎을 흩뿌리고 있었다.
포근한 바람과 꽃나무,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투명한 크리스털 궁전이 보였다.
‘이노센트 캐슬.’
예전에 들어왔을 때와 똑같은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때는 밖에서 일시아 언니를 마주쳤는데,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다.
“지팡이 안에 들어왔구나.”
그걸 깨달은 순간, 루시엘은 제 품에 단단히 안겨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영롱한 달 보석이었다.
“어? 달 보석도 같이 들어왔네.”
달의 세 번째 힘을 알려면, 보석이 꼭 필요하긴 했다.
그러나 보석은 깜빡깜빡 빛을 냈다. 마치 무언가를 알려 주기라도 하는 듯이.
루시엘은 일단 이노센트 캐슬 안으로 들어가서 살펴보기로 했다. 노란 토파즈로 이루어진 별 같은 문을 통과하자, 디잉 하고 루시엘과 지팡이의 마나가 연결되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달 보석이 없는, 지팡이가 생성되었다.
안으로 들어가 두리번거리면서 살펴보니, 여전히 모든 게 반짝이는 보석으로 이루어진 성이지만 조금 달라진 점이 있었다.
바로 루시엘의 새로운 보석들로 만들어진 가구들이 생겨났다는 거였다.
이를테면 자수정으로 만들어진 전신 거울, 응접실의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페어리 하트 샹들리에 같은 것이 있었다.
하트 샹들리에서 반사되는 분홍색 불빛은 하트 무늬로 아롱졌는데, 두근대는 심장박동처럼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예쁘다.”
그걸 올려다보며 눈을 초롱이던 루시엘은 본래의 목적을 상기했다.
‘가만, 구경은 그만하고 어서 달 보석의 힘을 찾아보자. 사슬이라고 했었는데.’
기억을 더듬거리던 루시엘은 가넷 테이블로 걸어가서 하얀 두루마리를 발견했다.
지팡이와 달 보석을 잠시 테이블에 내려놓고 두루마리를 들었다.
“이거, 기억나. 지팡이의 정령이 혹시 다른 메시지를 남겼을지도 몰라.”
다시 펼쳐서 확인해 보자, 푸른색 글씨가 종이 위로 떠올랐다.
「또 만났네요. 저를 불러내고 싶으면 악기를 연주해 주시겠어요?」
역시 그때와는 다른 메시지였다. 루시엘은 두루마리를 내려놓고는 크리스털 바닥으로 이루어진 회랑을 바라보았다.
‘저쪽으로 가 볼까.’
어느새 그녀의 지팡이와 달 보석은 챙기기도 전에, 둥실 떠올라서는 루시엘의 뒤를 따라왔다.
이윽고 환한 빛이 새어 나오는 방을 확인해 보았다. 요정의 날개를 얻었던 방이었다.
그곳에는 커다란 나무 오르골이 있었는데, 태엽이 멈춰져 있었다. 마치 벽장처럼 문이 달린 큰 오르골이었다.
“악기는 찾았는데……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루시엘은 일단 단순하게 태엽을 감아 보려 했지만 금속으로 만들어진 태엽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읏, 안 되네.”
안간힘을 써 보아도 되지 않자, 루시엘은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래, 얼마 전에 얻어 낸 게 있잖아.’
루시엘은 요정의 노래가 적혀 있던 악보를 펼치며 요정의 날개를 발동시켰다.
그러자 주변의 마나 흐름이 보였다. 실처럼 가느다란 마나가 악보에 흐르고 있었다.
그제야 태엽이 움찔거리면서 반응을 하려는 것 같았다. 다만 무언가 부족해 보였다.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던 루시엘이 머리를 짚으면서 서성거렸다.
“도대체 뭐가 부족한…… 아, 눈에 보이는 그대로 마나가 부족하구나?”
루시엘은 마나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심장에 가득 모아진 마나로 마나 방울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악보에 가느다랗던 마나가 힘 있게 굵어지며, 태엽이 뚝뚝뚝 움직이기 시작했다.
“된 거 같은데?”
루시엘이 미소 짓자, 태엽이 가동되면서 오르골에서 맑고 청아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악보에서는 마나 방울처럼 음표가 싱싱한 물고기처럼 퐁퐁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골의 문이 열리자 루시엘은 긴장하며 다음을 기다렸다. 그러자 무언가가 빼꼼 얼굴을 내밀더니 까만 눈동자가 루시엘의 눈과 딱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