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쿠우웅.
벨슈타인의 보물고가 있는 별채.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아티팩트들을 모아 놓는 악마궁 속 붉은 금고의 문이 열리자, 블루 익스큐션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고 푸른 아지랑이가 일렁일 뿐. 봉인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했으나 반투명한 봉인의 띠가 마검의 주변을 감싼 채였다.
서늘한 눈으로 그것을 흥미롭게 내려다보던 공작이 말했다.
“악마가 깃든 검이라. 어떤 놈인지 궁금하긴 합니다.”
악마와 거래를 할 수 있는 검이라니…….
쉬이 볼 수 없는 마검임에는 틀림없었다. 경매소에 넘긴다면, 욕망에 미친 부호들이 전 재산을 걸지도 몰랐다.
“아서라, 루이비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지. 카일라처럼 악귀가 될 수도 있는 검이다.”
길리아트가 노파심에 말했으나, 공작은 느른하게 서서 말했다.
“……악마 나부랭이의 저주 따위 필요 없습니다. 봉인부터 해제해 주시죠.”
“오냐. 결계를 추가할 필요는 없겠지.”
길리아트가 주변을 날카롭게 살피며 그리 말했다. 악마궁의 붉은 금고가 있는 방이야말로, 벨슈타인에서 가장 높은 등급의 결계를 쳐 놓은 상태였다.
마법 수련장으로 써도 될 만큼.
길리아트가 류프델에게서 받은 해제의 두루마리를 소매 춤에서 꺼내 펼치자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길리아트의 지팡이가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사아앗!
두루마리가 붉은 빛을 내며 마검을 두른 반투명한 봉인의 띠를 깨뜨렸다.
그러자 검은 아지랑이의 색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것을 준비하자.”
길리아트의 말에 루이비드가 고개를 주억이며, 푸른 빛을 내는 그의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지난번 루시엘이 선물한 보석으로 세공을 마쳐, 두 사람의 지팡이가 가진 힘이 더 강화된 상태였다.
빠르게 퍼지는 두 사람의 거대한 마나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각자의 손바닥을 내밀어 블루 익스큐션 주변의 마나 흐름을 감지하던 공작이 파괴의 주문을 영창했다.
“디스트럭션(Destruction).”
이내 완성된 주문에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가 펑펑 터졌다.
주변 공기의 흐름마저 압축될 정도로, 강력한 마나와 살기가 범람하며 휘돌았다.
그오오오!
두 사람의 주변으로 바람이 몰아치며, 옷자락이 나부꼈다.
붉은 금고 안 샹들리에가 끼익, 소리를 냈다. 그러나 블루 익스큐션 주변으로 하얀 전기가 파지지, 일어날 뿐 파괴되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마법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검이…….”
공작이 낮게 욕을 내뱉었고, 길리아트의 붉은 눈도 가늘어졌다.
“……절대 파괴의 힘을 지닌 디스트럭션 마법으로도 실패한다는 건, 역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거군. 애들에게 알려야겠다.”
* * *
마검이 파괴되지 않았다는 소식은 예상한 바였다. 책상 앞에 턱을 괸 채 앉아 있던 키제프는 누군가의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스스슷.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점차 소년의 윤곽을 드러냈다.
키제프가 꼬마일 적에도, 열여덟 살이 된 지금에도 레이븐은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
“……웬일이야, 소공작님. 먼저 나를 불러 주시고?”
야생 짐승과도 같은 금빛 눈동자를 발하며, 레이븐이 건너편에 보이는 가죽 소파에 축 늘어지듯 앉았다.
“시치미 떼지 말고. 지난번에 내가 알아봐 달라고 했던 건?”
“아…… 그거.”
괜스레 다리를 벅벅 긁으며, 그가 짐짓 모른 체하자 키제프가 다시 그를 다그쳤다.
악령이 된 카일라의 명부 기록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했었다.
“레이븐. 죽은 자를 데려가는 게 네 소임 아니었나? 이건 엄연한 직무유기라고.”
“꼭 지옥의 내 상사처럼 말하네. 알아봤는데, 그 여자의 명부는 아무리 뒤져도 없었어. 내 권한 밖이야.”
“……악마와 계약했기 때문인가?”
“그렇지. 그 순간에 이미 인간이길 포기한 거니까.”
“그러지 말고 레이븐, 악령을 소멸시킬 방법이라도 알려 줘. 아니면 도움이 되는 거라도.”
키제프가 레이븐에게 다가와, 애원하듯 간절하게 부탁했다. 그동안 보아 온 키제프는 이렇게 제게 부탁한 적이 없었다.
레이븐 역시 그와 루시엘의 과거를 알고 있기에 그 간절함 또한 알고 있었다.
레이븐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악령을 깨지기 쉬운 물건에 가두면 속박의 힘이 생긴다더군. 봉인이랑 비슷한 개념이랄까. 그러면 그것을 파괴하면 된다고 들었어. 물론 카일라를 그 물건에 넣는 과정이 쉽지 않겠지만 퇴치할 때, 준비하면 좋을 거야.”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
키제프의 머릿속에 거울이나, 유리 같은 것이 떠올랐다.
“거울이나 유리, 아무것이라도?”
“나도 거기까지밖에는 모르겠어. 무려 카일라인데 평범한 물건으로는 어렵겠지. 나머진 너희가 찾아봐.”
“……어쨌든 쓸 만한 정보군. 고마워.”
곧장 루시엘에게 알리고 싶었지만, 잠깐이나마 방해하지 않고 기다려 줄 셈이었다.
지팡이로 들어갈 방법을 찾았다면 루시엘이 먼저 알려 줄 테니까.
* * *
루시엘의 소개를 받은 요하네스는 흔쾌히 천공선을 띄워 아스트리야의 지반 표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루시엘은 이노센트 지팡이에 다시 들어갈 방법을 찾는 중이었다. 마법 수련장에서 여러 마법을 구사해 보았지만, 어느새 고단함에 지칠 뿐이었다.
별궁으로 돌아온 루시엘은 피닉스를 불러 보기로 했다. 과거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네 지팡이와 관련된 변화는 나도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
“……피닉스, 듣고 있어요?”
그러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루시엘이 은빛 눈썹을 늘어뜨렸다.
“어떻게 된 거지? 아…… 피닉스가 깃들었던 보석인 루비 대신 달 보석으로 바꿔서 혹시 그녀가 지낼 곳을 잃은 걸까?”
그러고 보니 그녀는 지난번에 요정의 용광로에서 루시엘이 열세 번째 보석을 만드는 일에 실패했을 때 뛰쳐나왔다.
반면에 그녀의 두 번째 권속 아르제온은 문제가 없었다.
루시엘은 진홍색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면서 다시 한번, 피닉스를 소환해 보았다.
“……피닉스, 대답해 주세요.”
그러자 피닉스가 모습을 나타내는 대신, 목소리만을 들려주었다.
「루시엘, 너 지금 마법을 너무 무리해서 사용했어……. 너는 아주 커다란 마나를 가졌다지만, 지팡이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왠지 힘겨운 듯, 가늘었다.
“피닉스! 루비가 아니더라도 깃들 수 있는 거예요? 사라진 줄 알고 걱정했어요.”
「그래, 네 새로운 보석에는 불의 힘도 있으니까. 하지만 네가 오늘처럼 하루에 고서클 마법을 잔뜩 쓰다가는, 정말 가출할 뻔했다. 네가 그동안 마나를 주지 않아서 지팡이에 연결된 마나 라도 마셔 보려고 했는데, 지팡이에도 남은 마나가 똑 떨어졌구나.」
“아, 죄송해요. 그동안 무심했어요. 마나를 드리고 싶은데…….”
루시엘이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 하자, 피닉스가 끙 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지금은 밖으로 나갈 기운이 없단다. 네 심장에 연결된 요정의 마나도 원활하게 공급이 안 되는 것 같구나.」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지팡이 속 공간에 들어가야만 해요. 그 안에 있는 달 보석의 세 번째 힘을 얻어야 하거든요. 하지만 지팡이가 성장한 것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마음이 급한 루시엘이 긴말을 쏟아 내자, 피닉스가 답했다.
「네 지팡이는 당연히 성장했지. 축하한다, 그리고 성에 들어가려면 잠을 청해 봐.」
“잠을 청한다고요?”
「그래, 잠들면 네 무의식과 지팡이가 연결이 될 거야. 동시에 지친 너와 지팡이도 휴식도 할 수 있고 말이지.」
“아, 알겠어요, 고마워요!”
루시엘은 애써 기쁜 마음을 누른 채, 키제프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그러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바쁜 모양이네.”
통신구를 닫은 루시엘이 고개를 들자 허공이 일렁이며, 초록빛 포탈이 생겼다. 그 안에서 키제프가 걸어 나왔다,
“기다리고 있었어.”
“나 지팡이 안에 들어갈 방법을 알아냈어. 잠들어야 한대.”
한 발 걸어 나온 그에게 루시엘도 포르르 다가가며 말했다.
“그것 봐. 가까운 곳에 방법이 있었네.”
“그러게.”
“어쩔 수 없지. 아, 블루 익스큐션을 마법으로 파괴하는 방법은 실패했다고 해.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아.”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루시엘도 입술을 꼭 깨물었다.
“역시 그랬구나. 마검과 카일라, 그리고 어둠의 심장까지. 전부 파괴할 방법을 이노센트 캐슬 안에서 찾았으면 좋겠어.”
“어둠의 심장은 조사 중이지?”
“응, 천공선에 부탁했어. 하지만 이제 신전 맞이가 정말 코앞이야. 그 안에 어둠의 심장부터 어떻게 해야 될 것 같은데……. 가능할지 모르겠어.”
불과 오 일 정도가 남았다. 그 전에 제발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고대하면서 루시엘은 자신의 지팡이를 세워 두고는 침대로 가 걸터앉았다.
키제프도 그녀 옆으로 가 나란히 자리를 차지했다.
“할 수 있어. 루시엘. 아, 레이븐에게서 악령을 소멸시키는 데에 도움이 될 방법을 하나 듣고 왔어.”
“뭔데?”
“깨지기 쉬운 물건 안에 악령을 가둔 다음, 그걸 파괴하는 것.”
“……! 좋은 정보다. 유리나 거울 말이지?”
“그렇지. 아무거나 되는 건 아니고, 특수한 마법 같은 걸 걸어야 할 것 같지만.”
보석안을 굴리던 루시엘은 이내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과거에 그녀가 평생을 갇혀 보석을 만들면서 착취당했던 물건이 있었다.
크리스털 페어리를 가두는 용도로 만들어진 그것은, 그 처절한 모습을 관찰하기에도 용이한 아름답고 슬픈 물건이었다.
그런 유리관이야말로, 카일라의 마지막에 잘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카일라에게 유리관을 선물해 주어야겠는걸.”
“……루시엘.”
이전 생의 루시엘이 죽음 직전까지도 유리관에 갇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던 키제프는 적잖이 놀랐다.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울 텐데…….’
요정처럼 여린 소녀의 내면은 이제 그녀의 다이아몬드만큼이나 단단했다.
“루시엘, 정말 강해졌군.”
키제프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 위에 한창 머물렀다.
“……그리고 누구보다 그걸 잘 만들 사람이 있지.”
이전 생에서 루시엘 자신의 유리관을 만들어 준 장인이 바로 그였으니.
“하멜 씨에게 유리관을 의뢰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