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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06)화 (206/282)

<206화>

이어 드러난 푸른색 원형 입구는 빨려들 것처럼 소용돌이쳤다. 모두 아르제온을 바라보았고, 길리아트가 물었다.

“아르제온,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아르제온은 기억을 더듬어 과거 얼음의 제단에 잠시 갇혔다가 도망쳐 나온 때를 떠올렸다.

“얼음의 제단 안에는 미로 같은 방이 여러 개 있고 탑처럼 생긴 구조다. 층마다 나타나는 마물을 해치우거나, 제단의 수수께끼 같은 걸 풀어 내면 올라가는 포탈이 생성된다.”

잠자코 듣던 키제프가 말했다.

“마물과 수수께끼에 대한 정보는?”

“내가 몇 번 시도해 보았는데 무작위로 생성되는 것 같다. 같은 층인데도 계속 달라진 적이 있었다.”

얼음의 제단은 겉으로 봐서는 쉬이 가늠할 수 없지만, 규모가 커 보여 루시엘은 머리를 젖혀 그 끝이 어디인지 올려다보았다.

“몇 층일까.”

“몇 층인지는 나도 모르지만 가장 위층에 그 마녀가 잠들어 있다는 건 확실하다.”

턱가를 매만지던 길리아트가 지팡이를 소환하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둘로 무리를 나누어 움직여야 할 것 같구나. 아르제온의 목적과 우리의 목적이 다르니 말이다.”

“그럼 어떻게 나누지요?”

루시엘의 물음에 키제프가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루시엘은 나와 함께 가야지.”

“나도 루시엘이 필요하다.”

아르제온도 루시엘의 팔을 잡자, 또다시 양쪽에서 두 남자가 으르렁거렸다.

루시엘은 두 사람을 모두 떼어 놓은 다음 솔리아페에게 다가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난 엄마랑 갈래요.”

“그래, 루시엘. 우리 새아가는 내가 지켜 줄게.”

솔리아페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엘의 선택에 키제프와 아르제온이 불만을 표했지만, 길리아트가 다시금 정리했다.

“좋다. 그럼 들어가서는 간단하게 남자, 여자로 나누어서 움직이고 일단 목표를 찾으면 상황에 따라 만나도록 하자. 자, 출발하자.”

길리아트가 눈에 힘을 주어 입구를 노려보며 먼저 나섰다. 그가 조심스레 푸른색 소용돌이 안으로 지팡이를 넣으며 들어가자, 마치 물결에 담근 듯 일렁거렸다.

하나둘 그를 따라나섰다. 모두 자신의 무기를 단단히 쥔 채였다.

강하게 범람하는 마나의 기운에 루시엘은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진정시켰다.

내부는 설원의 추위와는 달랐지만, 차갑고 축축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크고 웅장한 홀의 천장은 빛 한점 들어오지 않게 새카맸다.

중앙 바닥에는 얼음처럼 푸른색 대리석에 눈의 결정 모양만이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길리아트가 지팡이 끝을 라이트로 밝혀 주변을 비췄다.

세 갈래로 갈라진 복도의 길이 보였다. 이따금 얼음 조각이나 물이 투둑 떨어지기도 했다.

“길은 동, 서, 남. 세 갈래로군. 우리가 서쪽으로 가마, 루시엘과 솔리아페는 어디로 가겠니?”

솔리아페와 루시엘이 함께 주변의 마나 흐름을 살폈다. 동쪽은 은은하게 마나가 떠돌고 있었다.

“우린 동쪽으로 가자, 루시엘.”

“네. 피닉스, 헤어지기 전에 모두에게 히팅 마법을 부탁해요.”

피닉스가 눈썹을 찡그리면서도 모두에게 히팅 마법을 걸어 주자, 주홍빛 실드가 투명하게 감싸졌다.

“나는 얼음에 내성이 있어서 필요 없다.”

아르제온은 거절하며, 흰색의 로브 자락을 여몄다.

“기운을 많이 쏟았더니 피곤하군. 나는 다시 쉬고 있으마.”

“고생했어요.”

피닉스는 옅은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루시엘의 지팡이 보석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아르제온, 근데 수수께끼는 어떤 방식이야?”

루시엘의 물음에 그가 말했다.

“얼음과 관련된 것. 함정일 수도 있고, 지형에 나타난 퍼즐을 풀어야 할 수도 있다. 내 기억에는 그리 위험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무작위라면 위험한 것이 나올 수도 있지. 차라리 마물을 해치우는 편이 더 손쉬울 수도 있겠군.”

키제프의 말에 아르제온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갈라지자. 다들 통신구가 작동하는 지 확인을 한번 하고.”

“……다행히 되네요.”

길리아트가 솔리아페와 루시엘을 한 번씩 안아 주고, 키제프도 인사하려고 루시엘에게 다가설 때였다.

“루시엘, 이따 보자.”

“응, 키제프도 조…… 어어?”

순간 루시엘이 발을 딛고 있던 바닥의 원형 돌이 유난히 빛이 나더니 팽그르 뒤집어졌다.

뒤집힌 바닥 돌이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루시엘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꺄아악!”

바닥 저편에서 그녀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루시엘!”

키제프는 물론이고, 가족들도 당황했다. 키제프는 바닥을 다시 발로 쿵쿵 굴러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너 이 자식, 바닥에 이런 게 있다고는 안 했잖아. 지하가 있다고도 하지 않았고!”

금세 무너진 듯한 얼굴로 키제프가 아르제온의 멱살을 쥐었다.

“커흑, 내…… 내가 경험했을 땐 없었다. 무작위라고 했잖느냐.”

“루시엘이 무사하지 않다면 네 놈 역시 그렇게 될 거야.”

키제프가 서늘하게 경고했고, 길리아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루시엘이 밟았던 바닥 돌을 탐지했다.

빛을 잃은 바닥돌은 이제 아무리 마법을 사용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어서 루시엘에게 통신구를 사용해 봐라.”

“키제프, 내가 하마. 일단 진정하고 있으렴.”

솔리아페가 아들의 어깨를 도닥였지만, 그녀 역시 불안한 눈동자였다. 루시엘에게 통신을 시도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고 말았다.

시작부터 이렇게 꼬여 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키제프가 낙담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루시엘은 여기 오게 하지 말았어야 해요.”

길리아트의 붉은 눈이 침착하게 말했다.

“지금 여기서 루시엘에게 갈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 너뿐이다. 키제프. 가겠느냐?”

키제프는 제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물론입니다.”

“검이든, 마녀든 무언가를 찾으면 우선 기다리고. 꼭 다시 만나자.”

키제프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길리아트의 말에 대답하고는 결혼반지를 문질렀다.

스르르.

이내 그는 초록빛을 남기고 사라졌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우리 셋은 함께 다녀야겠다.”

한결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세 사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추락하며 아찔함에 더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을 때, 루시엘은 순간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다.

너무 놀라 마법을 쓸 생각조차 못 할 정도였다.

그 순간 푸욱, 푹신하고 탱글한 무언가 위로 떨어지며 반동으로 다시 한번 몸이 살짝 떠올랐다가 천천히 멈췄다.

하아.

안도의 숨을 몰아쉰 루시엘은 자신의 팔다리가 우선 다 붙어 있는지, 머리는 괜찮은지 만져 가며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다행히도 다치지 않고 떨어진 모양이었다.

루시엘이 떨어진 곳은 아주 깊은 지하의 딱딱한 바닥도, 물속도 아니었다.

손으로 꾹 눌러 보니 미끈하고, 푹신하게 들어갔다.

어둠 속에선 도무지 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무섭고 두렵기도 했지만, 어서 길을 찾아야 했다.

‘이렇게 추락한 길이 있다면, 분명 올라가는 길도 있을 거야. 침착하자, 루시엘.’

루시엘은 이를 악물었다. 데구르르 굴러 떨어진 지팡이를 주워 들기 위해 푹신한 무언가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두 다리가 단단한 바닥에 닿자 겨우 안정감이 들었다.

라이트 마법을 사용하려는데, 그녀의 몸이 떨어졌던 그 미끈한 것에서 무언가를 끓이는 것 같은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보르르, 보그르르.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진동이 공간을 울렸다. 아무래도 이 안에 생명체가 있는 것 같았다.

공포감에 루시엘은 조심스레 뒷걸음질을 쳤다.

‘달아날까, 아니면 해치울까?’

루시엘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이 어둠 속에서는 어디로 가야할지도 알 수 없다.

아르제온이 말하기를, 마물을 해치우면 다른 층으로 가는 포탈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럼 저 보글거리는 걸 해치워야 해.’

그런데 상대는 큰 움직임이 없었다. 혹시 저건 코 고는 소리가 아닐까?

‘그럼 라이트를 쓰거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 잠에서 깰지 몰라.’

루시엘은 조심스레 지팡이에 세공된 보석의 빛으로 그 미끄덩한 것을 슬쩍 비추어 보았다.

투명한 분홍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점액질의 무언가였다.

‘이건 마치…… 푸딩이나 젤리 같아.’

덩치는 루시엘보다 큰 정체불명의 덩어리였다.

루시엘은 사뿐사뿐 주변을 지팡이로 비추어 가면서 어떤 공간인지 살폈다.

이 안에는 저 커다란 젤리 덩어리뿐, 다른 것은 일체 없었다.

‘아무래도 저걸 해치워야 하나 봐.’

루시엘이 하는 수 없이 피닉스를 부르려는 순간이었다.

스르르, 초록빛 이동포탈과 함께 키제프가 눈앞에 나타났다. 루시엘이 무사한 걸 보자마자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던 그의 입을 루시엘이 얼른 틀어막았다.

‘안 돼. 키제프.’

루시엘은 고개를 저으며, 지팡이로 젤리 덩어리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키제프는 조용히 몸을 일으키곤, 그 기운을 빠르게 읽었다. 드락카에서 숱한 마물을 상대했던 그는 그게 뭔지 알고 있었다.

‘저건 슬라임이다.’

슬라임은 마물 중에서도 하급의 약한 놈이지만, 저건 무척이나 크기가 컸다.

스릉!

키제프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이터널을 뽑았다.

스사악!

보랏빛 드래곤 마나가 피어오르더니 단숨에 슬라임의 몸통을 갈라 버렸다.

과일이 터지듯, 젤리 같은 몸이 갈라졌지만 이내 두 개가 되었다.

스르륵.

검으로 갈라 낸 몸은 상처 없이 부드럽게 매끈하고 통통해졌고 두 녀석이 제자리에서 뛰기 시작했다.

퐁, 퐁!

게다가 반짝이는 동그란 눈 두 쌍이, 루시엘과 키제프를 향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윽, 저거 두 마리가 됐어.”

루시엘이 중얼거렸고 키제프가 미간을 좁히며 이터널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었다.

“검으로 가르면 안 되겠는데…….”

“으응,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아. 근데…… 아까부터 느낀 건데 공격하진 않는 것 같아.”

여전히 통통거리면서 뛰는 슬라임 두 마리는 확실히 둘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럼 자유롭게 움직여도 되나?”

“아마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루시엘은 가만히 있어. 내가 나갈 방법을 찾아볼게.”

키제프가 공간 안을 다시금 서성이며 살폈다.

눈앞의 마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루시엘의 머릿속에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이 제단은 얼음과 관련이 있으니 그렇게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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