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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05)화 (205/282)

<205화>

밤늦게 루시엘의 통신구가 빛을 내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키제프가 은근 신경 쓰이는 투로 알려 주었다.

“루시엘, 늦은 시간에 통신이 왔네.”

“앗, 누구지?”

루시엘이 얼른 통신구를 펼치자 제르다의 얼굴이 비쳤다. 뒤돌아 책을 보던 키제프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키제프, 잠깐 인형사 제르다 씨와 통신하고 올게.”

루시엘은 소곤소곤 말하고 테라스로 나가 통신을 이었다.

“제르다 씨, 무슨 일이에요?”

―루시엘 님, 밤늦게 죄송합니다. 혹시 예전 문학 살롱에 함께 참가했던 붉은 머리 소녀와 아는 사이신가요? 조금 전 그녀와 제 형이 함께 있는 걸 보았습니다.

제르다의 말에 루시엘은 바로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사실 페넬로페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두 남자에 대해 전해 들었으나, 그들 중 한 명이 제르다의 형인 줄은 몰랐다.

‘제르다의 형이라면 인형사일 텐데, 페넬로페와 무슨 관계일까?’

“그 붉은 머리 소녀는…… 페넬로페 폰 카빌이에요. 오래전부터 저를 미워했던…… 저의 적이에요. 그런데 당신의 형이라면 이름이 무엇이지요?

―프리다입니다.

루시엘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군요. 젊은 남자도 있었지요? 그가 발루크 상단주인 크루거 백작일 거예요.”

루시엘이 씁쓸하게 말했다. 프리다 박사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황비 쪽의 조력자라면 경계 대상인데 하필이면 제르다의 형이라니. 생각이 많아진 루시엘이 재차 말을 이어 갔다.

“제르다 씨, 혹시 그들이 상점에서 그들이 뭘 하고 돌아갔는지 다른 수상한 점은 없는지 알아봐 줄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들어가서 물어보고 왔는데 워낙 짧은 시간 머물고 가서 인상적인 일은 없었다더군요. 하지만 직원들에게 고액의 팁을 주었다고 합니다.

‘고액의 팁이라. 일부러 돈 많은 듯 보이려고 그러는 걸까?’

“그렇구나. 고마워요, 제르다 씨. 참, 인형 제작 작업은 잘 되어 가고 있어요?”

루시엘의 말에 제르다도 마침 할 말이 생각났는지 목소리가 살짝 커지면서 표정이 침울해졌다.

―사실 난관을 겪고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인형을 만들던 방식들은 전부 제 마나를 연결했던지라, 지성을 심어 주긴 역부족인 것 같아요. 마력 심장을 만드는 것도요……. 혹시 루시엘 님의 마나가 깃든 물건이 있을까요?”

루시엘의 마나라면 무엇보다 그녀가 만든 보석에 가득히 들어 있었지만 제르다는 그 보석을 함부로 사용하기 아까웠다.

“그거라면 제가 드린 보석으로 한번 시도해 보시겠어요?”

―아, 그 보석으로 사용해도 될까요? 사용하기 아까워서 쓰지 않고 있었는데.

“보석은 제가 얼마든지 드릴게요.”

―그럼 바로 새롭게 작업해 보겠습니다. 사실 라플라이라는 마법 식물로 실험했는데 보기 좋게 실패했거든요. 라플라이는 자신을 복제하는 힘이 있어요. 물과 닿으면 조그맣게 분신을 만들어 내거든요.

“신기하네요.”

―어쨌든 알려 주신 대로 보석으로 다시 연구해 보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제르다씨.”

통신을 마친 루시엘은 라플라이라는 식물의 힘에 대해 생각했다. 복제, 분신. 그것이야말로 루시엘이 원하는 인형인데…….

‘식물의 힘을 인형으로 옮겨 오는 것이 잘 될는지는 미지수겠지.’

그러고 보니 아직 힘을 알아내지 못한 보석은 가넷과 페어리 하트.

에리카가 연구를 잘하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늦은 시간이지만, 루시엘은 에리카에게 통신해 보기로 했다.

“에리카 언니, 나야 루시엘.”

―어머, 루시엘. 잠옷이 귀엽네. 무슨 일이야? 페어리 하트 또 만들었어?

“……응.”

루시엘의 얼굴이 확 붉어졌지만 부정하진 않았다.

“키제프와 함께 있을 때 몇 개 만들긴 했어.”

루시엘의 대답에 에리카를 비추던 화면이 마구 흔들리더니 그녀가 격하게 반응했다.

―축하해, 루시엘. 드디어 사랑을 시작했구나. 귀여운 것. 아 참, 이상한 일이 있었어!

“무슨 일?”

―그래. 가넷이 욕망, 열망이라고 했었지? 불에 태웠더니 글쎄 네가 잠깐 나타난 거 있지.

“내가…… 나타났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정말 네가 소환된 줄 알고 톡 건드렸는데 사라졌어. 혹시 지난번처럼 환상을 본 걸까? 분명 꿈은 아닌데.

에리카의 말에 루시엘의 심장이 쿵쿵 뛰고 말았다.

“자, 잠깐만. 가넷을 불에 태웠더니, 내가 나타났다고? 나는 언니에게 간 적 없는데…….”

그렇다면 가넷은 자신의 도플갱어나 분신을 불러내기라도 한 걸까? 이게 사실이라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에리카 언니, 정말 미안한데 혹시 지금 아기 영지의 연구실로 와 줄 수 있어?”

얼마 후.

연구실에 도착한 에리카에게 루시엘은 그동안 만들어 낸 가넷을 몇 개 더 전달했다.

그것을 불을 일으키는 마법 플라스크에 넣고, 가열했을 때였다.

스르르.

마치 거울을 보듯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은발의 소녀가 나타나 루시엘과 눈이 마주쳤다.

완벽한 분신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미묘했다.

에리카는 입을 틀어막은 채, 놀랍기도 하고 조금 무서워서 뒤에서 떨고 있었다.

“다시 봐도 미, 믿을 수 없어. 루시엘이 둘이라니.”

루시엘이 제 분신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안녕.”

다행히 분신은 건드려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말끄러미 루시엘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분신 루시엘은 힐긋 주변을 바라보더니 이내 퐁, 하고 사라졌다.

그러자 불 위에 달궈졌던 가넷이 핏빛에서 하얗게 변하더니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루시엘이 눈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금방 사라지네.”

‘그래도 제르다씨에게 가넷을 주면 인형 제작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루시엘은 아직도 떨고 있는 에리카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래, 에리카와 제르다.

두 사람이 아주 잘 맞을 것 같았다. 둘 다 인형을 사랑하고 상냥한 성격을 가졌으니.

무엇보다 그녀에게 제르다를 소개해 주면, 보다 인형 제작이 쉬워질 것이다.

“에리카 언니,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나는 내일부터 설원에 다녀와야 해서 나 대신에 제국 최고의 인형사를 만나 보지 않을래?”

루시엘이 맑게 웃었다.

* * *

에리카는 이제 마탑 내에서 팀장 신분이라 휴가가 자유롭다며 흔쾌히 황도로 떠나겠다고 했다.

제르다를 만나기보다는 인형을 구경하려는 사심이 더 엿보였지만.

어쨌든 가넷의 힘을 발견하게 된 건 엄청난 쾌거였기에 루시엘은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지만 보다 후련한 기분으로 떠날 수 있었다.

소식을 들은 키제프와 가족들도 눈을 빛내며 기뻐했다.

“우리 루시엘, 네 보석에 담긴 힘들은 상상 이상이구나. 이만큼 성장시킨 것도 전부 네가 과거와 달라졌기 때문이지.”

길리아트의 따스한 말에는 울컥 감동이 치밀기도 했다. 특히, 공작은 최근 보인 얼굴 중에 가장 밝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루시엘은 마음이 놓였다.

“우리 루시엘이야말로 가장 빛나는 보석이지. 모두 무사히 다녀오길 빌고 있으마.”

“걱정 마세요. 아빠.”

공작이 신호를 주자, 검은 날개의 마법사들이 얼음의 제단 인근에 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일행들과 함께 얼음의 제단 입구에 선 루시엘은 마음을 다잡았다.

‘드디어 블루 익스큐션을 손에 넣겠구나. 이제 더는 무섭지 않아.’

두려움보다는 자신감과 용기가 차올랐다. 그동안 마법도, 보석의 힘도 끝없이 성장해 왔으니까.

스스로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이제 출발할까요?”

“잠깐, 루시엘. 석판이나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 살펴보겠다.”

길리아트가 주변을 가볍게 한 바퀴 돌면서 고대어가 적힌 석판이 있는지 찾으려 했지만, 딱히 보이지 않았다.

얼음의 제단은 마치 고드름이 거꾸로 솟아난 듯, 가시처럼 삐죽삐죽한 얼음들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다.

솔리아페가 검을 뽑아 들고는, 아르제온에게 물었다.

“이봐, 입구가 어디지?”

“그 검은 내려놓고 말 좀……. 입구는 아무래도 여기인 것 같은데.”

아르제온이 긴 로브 자락을 끌고는 꽝꽝 얼어붙어 있는 커다란 얼음 바위를 가리켰다.

“저건 돌이 아니냐?”

길리아트의 말에 아르제온이 답했다.

“이걸 녹여야 한다.”

“허…… 저렇게 단단한 얼음을 녹이려면 불이 필요하겠군.”

길리아트가 해동 마법인 멜트(melt)와 파이어를 소환해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잠시만요.”

루시엘이 이노센트 지팡이를 소환했다. 손안에 착 감긴 지팡이의 루비에서 그녀의 권속인 피닉스가 화려하게 불꽃을 피워 내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눈부신 그녀의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지만 아르제온은 피닉스가 무서워 뒤로 물러났다. 피닉스가 움직일 때마다 금가루가 송송 떨어졌다.

그녀가 금빛 눈을 곱게 휘며 말했다.

“내가 나설 때구나.”

“오늘따라 화려하게 등장하네요. 피닉스, 저 얼음덩이 좀 녹여 줄 수 있어요?”

루시엘이 부탁하자 그녀가 얼음 바위 가까이 다가가 마나를 모은 후, 탐지 마법을 사용했다.

“강력한 얼음 마법이 걸려 있군. 인간의 힘이 아니라 간단히 풀 수 없을 거야. 그래도 내가 누구니. 해제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득의양양한 얼굴로 허리에 손을 짚은 피닉스가 루시엘을 보며 말했다.

“루시엘, 네 마나 한 모금 마시고 시작하마.”

“……피닉스는 저 없었음 어쩔 뻔했어요?”

“지금은 함께 있으니 그런 말은 하등 불필요한걸.”

루시엘은 주변이 출렁거릴 정도로 거대한 양의 마나를 모았고, 피닉스가 다가섰다.

그 틈을 타서 아르제온도 루시엘의 마나를 마시려고 다가오다가 키제프에게 제지당했다.

“당신, 거슬려.”

“……어차피 계약 결혼 아닌가? 기한이 있겠군. 난 십 년도 기다릴 수 있는데…… 윽.”

계약이라는 말에 키제프가 으득, 이를 갈더니 서늘한 눈을 빛내며 한 손으로 아르제온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닥쳐. 루시엘은 삼 년 후에 나와 정식으로 결혼할 거니까.”

순간 드래곤의 힘을 품은 키제프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둘이 투닥거리는 사이에 화르르, 피닉스가 소환한 화염의 마법진이 타오르면서 얼음 바위를 녹이기 시작했다.

얼음이 다 녹자 입구가 드러났다.

쿠구구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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