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지금 저 슬라임을 공격하면, 몸체가 분할되어 새로운 개체가 생기고 만다.
게다가 얼음과 관련된 속성은 두 가지로 좁힐 수 있다. 그 자체인 얼음과 반대되는 속성인 불.
‘저 슬라임의 속성이 얼음처럼 보이지는 않아. 우선 얼려 보자.’
루시엘은 빠르게 머릿속을 더듬어 얼음 계열 마법을 찾아냈다.
아이스 캐논(Ice cannon)과 프로즌 페더(Frozen fetter).
상대에게 냉기를 쏘아 접촉한 부분만 얼게 만드는 아이스 캐논은 5서클이기에 루시엘도 몇 번 발동시켜 본 적이 있었다.
프로즌 페더는 상대에게 얼음의 족쇄로 속박시켜, 신체 전체를 얼어붙게 만드는 더 높은 서클의 마법이었다.
수식을 외워 두었지만 한 번도 성공해 보지 못한 마법.
키제프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루시엘에게 말했다.
“루시엘, 저거 얼리든 태우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앗, 나도 그 생각 했어. 내가 한번 얼려 볼게.”
“좋아.”
루시엘이 한 발 앞으로 나섰고, 키제프는 만일을 대비하며 슬라임들을 향해, 다시 검을 겨누었다.
루시엘은 가볍게 심호흡하며 지팡이로 마나를 끌어모았다.
“아이스 캐논!”
쉬이이잉!
시푸른 냉기가 슬라임을 찌르듯, 날아갔지만 표면 전체를 얼어붙게 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슬라임의 몸통 일부가 얼어붙는가 싶더니, 하얀빛을 내면서 다시 원래대로 복원이 되었다.
깜짝 놀란 루시엘과 키제프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방금 힐링으로 회복한 걸까?”
“그런 것 같은데.”
“프로즌 페더, 그걸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루시엘이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한 서클 더 높은 마법이던가?”
“응…….”
“그래도 한번 해 봐. 루시엘, 너라면 해낼 수 있을 거야.”
키제프가 용기를 북돋아 주자, 루시엘도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해 볼게. 빨리 위로 가야만 해.”
파아아앗.
또로롱.
마나를 더욱 강하게 끌어모은 루시엘은 자신감에 넘쳐, 핑크 다이아몬드까지 만들었다.
이노센트 지팡이의 사파이어 보석이 빛나는 순간, 루시엘은 자신의 모든 마나를 집중해 영창했다.
“프로즌 페더!”
파아아아!
푸른 소환진에서 튀어나온 푸른빛의 족쇄가 탱글한 슬라임의 몸체를 휘감더니 뿌드드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윽고 슬라임들의 몸체가 꽁꽁 얼어붙어 얼음 조각이 되자 키제프가 기다렸다는 듯 검으로 갈랐다.
파사사, 산산조각 난 슬라임들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슬라임 사체가 반짝이며 사라지자 이내 텅 하고 벽에 무언가가 생성되었다. 포탈이었다.
“성공이야!”
“잘했어, 루시엘.”
기뻐하며 서로를 얼싸안은 두 사람은 그제야 잠시 안도했다. 키제프의 손이 루시엘의 뺨을 쓰다듬었다.
“갑자기 추락해서 너무 놀랐어.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는 줄 알고. 무서웠지?”
“응. 그치만 괜찮아. 네가 와 줬으니까.”
“당연하지. 반드시 지켜 준다고 했잖아.”
키제프의 붉은 눈이 애틋해지며 루시엘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이제 가자. 검이나 마녀를 발견하면 기다리기로 했는데, 상황이 어찌 돌아갈지 모르지만 신중하게 움직여야 해.”
“응, 조심해야겠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이동 포탈은, 자세히 보니 위쪽으로 향하는 화살표가 조그맣게 깜빡였다.
“키제프, 이것 봐.”
“위층으로 향한다는 뜻인 것 같군.”
하지만 벽에 나타난 포탈은 너무 작아서 두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크기였다.
키제프가 그 위로 손바닥을 댔을 때였다.
쿠구구, 우웅!
바닥, 아니 방이 통째로 위로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몸이 갑자기 붕 뜨는 기분마저 들어 아찔했지만, 아까 추락할 때보단 무섭지 않았다. 얼마 후 상승을 멈추고 푸른 벽이 양쪽으로 열렸다.
쿠우우웅.
파랗고 어두침침한 복도는 조용했고 난간 아래 아까 출발한 입구의 커다란 홀이 까마득히 내려다보였다.
위를 올려다보니 푸른색의 돌이 부유하고 있었고 높이가 아득했다.
루시엘이 키제프의 소매를 살짝 붙잡았다.
“왠지 우리, 여러 층을 건너뛰고 올라온 것 같아.”
“그런 것 같아. 잠시 할아버지나 어머니께 통신해서 알려 드리고 이동하자.”
“응.”
두 사람은 각자 통신구를 꺼내서 길리아트와 솔리아페에게 연락했지만 받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루시엘, 너도 통신이 되지 않았어.”
“나에게 통신했어?”
“응.”
“그럼 방 안에 갇혀 있을 때는 통신이 안 되는 게 아닐까.”
루시엘의 추측에 키제프가 고개를 주억였다.
“정말 그럴지도. 루시엘, 내 곁에 바짝 붙어서 따라와.”
“응.”
루시엘이 대답하자, 키제프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두 번 다시 널 놓치지 않을 거야.”
그때였다. 스르륵, 검은 형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황금빛 눈을 가진 흑발의 소년이었다. 맹수의 동물처럼, 사납고 날카로운 눈이 노랗게 빛나며 붉은 입가가 벌어졌다.
“루시엘, 키제프가 요새 내 부름에 대답이 없던데, 네 미모에 취해 있던 모양이군……. 내가 본 인간 여자 중에선 드물게 예쁜 거 인정. 하지만 귀여움은 좀 사라졌어.”
레이븐이 루시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사신인 그는 몇 년이 흘러도 변함없이 십 대 중반의 미소년으로 보였다. 이제야 루시엘과 또래처럼 보이기도 했다.
“레이븐, 진짜로 오랜만이다. 으응?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어.”
“누가 너더러 루시엘의 미모 인정해 달라고 했나. 근데…… 너 괜찮아? 불의 제단에서는 기운을 제대로 쓰지 못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꽤 오래전 일이지만 그건 흐릿하게 기억이 났다.
“응. 여기는 들어와도 괜찮네. 아마 마계와 맞닿은 곳이라 그런 것 같은데. 너희도 조심하는 게 좋겠어. 이 제단에서 어두운 기운들이 많이 느껴져.”
레이븐의 말에 루시엘이 간절하게 말했다.
“레이븐. 한 가지 부탁이 있어. 지금 다른 가족들과 통신이 되질 않아. 어디 있는지 보고 와 줄 수 있어?”
레이븐이 심드렁해져 불만을 표했다.
“너 대체 나를 맨날 심부름꾼으로만 보는 거야?”
“레이븐, 초콜릿 퐁듀라고 들어 봤어? 촉촉한 초콜릿이 흐르는 분수인데…….”
“그, 그만! 다녀올게!”
루시엘이 해맑게 웃자, 레이븐이 못 당하겠다는 듯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더니 사라졌다.
그런 루시엘을 힐끔 바라보던 키제프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엘, 쓸데없이 다른 남자 길들이지 말라고.”
괜스레 심장이 내려앉은 그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거 아니야. 슬슬 움직일까?”
루시엘이 그를 달래 주며, 요정의 날개를 다시 발동시켜 주변을 탐색했다.
“저쪽에서 강한 마나가 느껴져. 뭔가가 또 있는 것 같아.”
* * *
한편 길리아트 일행은 비교적 쉬운 길을 찾아 쭉쭉 막힘 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얼음 속성을 가진 설원 늑대나 설원 거인 등 제법 덩치가 큰 마물이 등장했지만, 강한 세 사람이 상대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얼리고 녹이는 간단한 수수께끼를 풀면 금세 다음 층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거 우리가 너무 운이 좋은 건가?”
“그거야 내 덕분이다. 지금까진 내가 아는 것들만 나왔으니까.”
의기양양하게 걸음을 옮기던 아르제온은 이내 눈앞에 나타난 푸른빛의 거울을 보자 얼굴을 굳히고 달아나려 했다.
슈우우, 웅!
어디선가 차가운 숨결과 눈보라가 불어와 세 사람을 휩싸는가 싶더니 가장 먼저 아르제온의 두 발이 얼어붙고 말았다.
얼음 내성이 있는 아르제온마저 큰 타격을 입고 급속도로 체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젠장. 이 힘은 드라슈엘 그 마녀다. 더 오지 마라!”
아르제온은 어느새 무릎까지 얼어붙어 토하듯 외쳤지만 이미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스르르.
거울 너머에서 그녀가 넘어왔다. 창백하리만치 푸른빛 도는 흰 피부를 가진 겨울의 마녀 드라슈엘. 눈과 얼음 결정이 부서져 내리는 옷자락을 이끌고 얼어붙은 아르제온에게 다가간 그녀는 슬픈 얼굴로 말했다.
“아르제온…… 너라는 남자는 여전히 아름다워. 꼭 가질 거야.”
드라슈엘은 잠시 아르제온의 얼굴에 입김을 후 불었다.
그러자 하얗게 성에가 낀 아르제온이 기겁하며 말했다.
마녀를 물리치려는 계획이 멀리 사라져 버린 탓에 그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우악! 미…… 미친! 왜 여기 있어? 당신은 꼭대기 층에 잠들어 있지 않고?”
“널 보러 왔지. 근데 도망칠 때는 언제고 다시 돌아왔어?”
“그…… 그건! 다, 당신과 함께 있으려고 왔지.”
“그래? 그런 거면 나와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서약의 키스를 해 줘.”
“그건 우, 우리 사이에 좀 이른 것 같은데.”
새하얗게 침잠한 눈을 굴리던 드라슈엘이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거짓말. 날 속이고 도망쳤었잖아. 배신자. 난 너를 얼음으로 만들어서 곁에 둘 거야. 영원히.”
드라슈엘이 웃으면서 아르제온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길이 닿자마자 그는 다시 얼어붙었다.
“으윽!”
드라슈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온몸을 파고드는 냉기에 길리아트와 솔리아페마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이미 히팅 마법은 그 효력을 다 했고 길리아트의 실드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것조차 없었다면, 이미 모두가 얼음 석상이 되었을 터였다.
길리아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속으로 뇌까렸다.
‘……이 마법은 얼음 속성 마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블리자드(Blizard)!’
7서클에 달하는 마법인 데다 압도적으로 차가운 마나, 지리적으로 유리한 조건까지 마녀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아, 아버님. 흐윽.”
솔리아페가 검을 바닥에 짚은 채 외쳤다. 갑주를 뚫고 들어오는 냉기란 실로 살인적이었다.
“정신 차려라. 정신을 잃으면 더 빠르게 얼어붙을 거다.”
솔리아페도 겨우 버티고 있지만 서서히 움직임이 둔화되고 있었다.
파랗게 질린 입술로 솔리아페가 중얼거렸다.
“추워…….”
“솔리아페, 안 된다.”
의식이 희미해져 가고 있는 건 길리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냉기 때문에 둔화된 몸이 마나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길리아트는 문득 자신의 로브 속에 따스한 무언가를 느꼈다.
겨우 힘겹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꺼내 보니, 큼지막한 루비가 박힌 펜던트였다.
‘이건…… 루시엘의 보석을 세공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