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대장간이 위치한 전문 상점 지구는 광장의 시계탑을 기준으로 남쪽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무구류를 파는 상점들은 특히 갑옷을 착용한 사람들이 몰려 있어서 쉬이 찾을 수 있었다. 용병이나 여행자, 간간이 병사나 기사들도 보였다.
상점 지구에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샤를로테 거리와는 확연히 분위기 차이가 있었다. 시끌시끌하고 자유롭고 거침없었다.
“아가 마님, 여기서부턴 마차에서 내려 이동하셔야 합니다. 제가 바짝 붙겠습니다.”
마차에서 내리기 전 이네스가 루시엘의 로브를 내려 그녀의 얼굴을 살짝 가려 주었다.
“알겠어요, 가요.”
대장간이 딸린 무기 상점과 방어구를 파는 갑옷 상점, 마법 물품을 파는 잡화점도 즐비했다. 네 사람은 골목의 가장 안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곧 푸른 휘장이 달린 무기점 앞에 섰다. 다른 곳과 달리 대장간까지 딸려 있는 곳이었다.
“챈들러 경, 여기인가요?”
“예, 초보자가 적당한 검과 갑옷을 마련하기엔 여기가 딱입니다.”
챈들러가 노아를 보면서 말했다.
“아, 노아뿐 아니라 챈들러 경과 이네스 경도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아니면 다른 상점에서라도……!”
“없습니다.”
“저도 없습니다.”
챈들러와 이네스가 똑같이 답하자 노아를 쳐다보던 루시엘은 어쩐지 민망해졌다.
“필요한 물건은 전부 기사단 내부에서 지급받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노아는 아직 정식 기사가 아니니 없는 물건은 사 주셔도 됩니다.”
챈들러가 또다시 설명해 주어서 루시엘과 노아는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챈들러는 대장간 주인과 아는 사이인지, 먼저 말을 걸었다.
“여기 이 친구가 쓸 만한 검과 갑옷을 골라 주십시오.”
“또 와 주셨군요, 기사 나리. 어디 보자…….”
오십 대를 훌쩍 넘긴 듯 보이는 대장간 주인이 노아를 살폈다. 체격과 골격을 살핀 그가 노아에게 물었다.
“검술은 배운 지 얼마나 되시었수?”
“아, 사…… 삼 년 육 개월이 넘었습니다.”
“목검 말고는 첫 진검이니 잘 골라 주세요.”
루시엘도 곁으로 와 말했다.
“첫 진검을 이제야 사신다는 말입죠? 히야, 요즘 진검부터 사는 젊은이들도 많던데. 요즘 참으로 보기 드문 청년이시우.”
대장간 사내가 훈훈한 눈빛으로 칭찬하자, 노아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지난주 제작한 이 롱소드가 제격일 것 같은데, 키도 훌쩍 크시고, 팔다리가 기니 크기는 맞을 것 같은데. 한번 들어 보실라우? 약간 무거울 수도 있지만…….”
대장간 주인이 내민 갈색 손잡이의 롱소드는 깔끔하지만 균형이 좋아 보였다. 날도 무척이나 잘 벼려져 있어 반짝거렸다.
“초심자가 이, 이렇게 좋은 걸 써도 됩니까?”
“3년 반이나 되었으면, 그 정도는 쓰는 것이…….”
설레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검을 든 노아는 이리저리 휘둘러 보더니 말했다.
“생각보다 가볍고 좋은데요.”
“허허, 그게 가볍다니 근력이 굉장하시우. 그럼 그걸로 가져가실…….”
대장간 주인이 말을 마치기 전에 바깥에 있던 물건이 탱그랑 소리를 내며 소란스럽게 뒹굴었다.
“딸꾹! 제인, 나와! 나오라고! 그 계집애 대체 어디로 갔어? XX,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어?”
술병을 든 채로 만취해 나타난 막시무스였다. 익숙한 그 음성에 루시엘과 노아가 표정을 구기며 슥 돌아섰다.
특히나 노아와 루시엘이 같이 있는 걸 보게 된다면, 그를 속인 것이 탄로 날 수 있었다.
‘하필이면…….’
오늘은 급히 나와 눈동자도 원래 색이었다. 다만 로브를 깊이 눌러쓴 탓에 루시엘이 누군지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
대장간 주인은 이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인지, 나가서 막시무스에게 경고했다.
“왜 자꾸 와서 이러시오? 그 애는 여기 없다니까.”
“아, 거짓말하지 마. 지난번에도 여기 들락거리는 거 다 봤거든? 나랑 다시 시작하기로 해 놓고, 돈 받으니까 바로 튀었다고! 솔직히 말해. 형씨가 빼돌린 거지?”
막시무스가 대장간 주인의 멱살까지 붙잡자, 더는 참을 수 없어진 루시엘이 나서려 할 때였다.
노아가 루시엘에게 참으라 속삭이며 고개를 저었다.
챈들러가 막시무스를 뒤에서 떼어 내며 말렸고, 이네스는 손목을 꽉 붙잡았다.
“이거 놔, 네놈들은 참견 마! 내가 누군지 알아? 감히 후작 영식의 몸에 손을 대?”
“소란을 피운 건 그쪽이 먼저입니다.”
“뭔 상관인데? 기사면 기사답게 귀족 앞에선 고개를 숙이라고, 엉?”
기사들에게 함부로 손과 발을 놀리며 막시무스가 발광을 해 댔다.
루시엘은 속에서 부글부글 부아가 끓어 더는 참지 못하고 뒤돌았다.
‘저 바퀴벌레 똥만도 못한 자식.’
루시엘을 말리려는 노아의 얼굴을 보고 막시무스가 눈을 비볐다.
“어, 넌 존 아니야? 뭐야,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기사들과 같이 있네? 이 마법사 계집애는 또 누구…….”
기사들의 망토나 갑옷에 벨슈타인가의 휘장이 없어서일까? 막시무스는 도무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루시엘의 얼굴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루시엘은 로브를 눌러쓰곤 웃으며 말했다.
“후작가의 도련님이라, 저희가 미처 알아뵙지 못했던 것 같네요. 그에 맞는 대접을 해 드릴 테니 같이 가실까요?”
“……그래, 처음부터 그렇게 나올 것이지. 나는 막시무스 폰 카빌이다. 마법사, 제법 예쁜 목소리를 가졌군. 네 얼굴을 보여라.”
“……따라오면 보여 줄게요.”
루시엘은 대답 대신에 마나를 모아 허공에 초록빛 이동포탈을 만들었다.
“……가면 저 기사 놈들이 날 패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막시무스가 야비하게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너랑 나. 둘만 이동하는 것으로 하지. 그럼 따라간다.”
“……안 됩니다.”
노아를 비롯한 챈들러와 이네스가 모두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루시엘이 손을 들었다. 괜찮다는 표시였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막시무스가 남은 대장간 주인과 기사들의 손목까지 전부 묶었다.
루시엘의 눈짓에 기사들은 순순히 있었다. 이런 줄 따위는 마음만 먹으면 금방 끊어 낼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멍청한 놈은 아니거든? 어디 그럼 얼마나 예쁜지 확인해 볼까?”
막시무스가 루시엘을 따라 포탈 안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방 안은 안개로 자욱했고, 숨이 막혔다.
쿠당탕!
파아아!
“아이스 스피어(Ice spear)!”
들어오자마자 무언가에 미끄러진 막시무스는 이내 허벅지를 관통한 날카로운 통증에 비명을 내질렀다.
“으허윽, 미, 미쳤어? 내, 내가 누군지 알고 나를, 끄흑……!”
루시엘이 바인드(Bind) 마법을 사용해, 막시무스의 몸을 꽁꽁 묶어 두었다.
“악…… 사, 사, 살려 줘!”
지팡이를 빙글 돌린 루시엘이 일어서서 막시무스를 내려다보았다.
살려 달라는 그 말.
과거에는 루시엘이 그에게 울고 빌며 애원하던 말이었다.
‘흐흑, 그만 날 놓아줘…….’
‘이봐, 루시엘. 재미없게 이럴 거야? 그렇게 울고 빌어 봤자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어. 넌 그냥 평생 내 장난감처럼 사는 거야.’
자신을 짓누르며 희열에 찬 그 악마 같은 막시무스의 얼굴이, 지금 살려 달라는 그의 얼굴과는 정반대였다.
“세상의 모든 쓰레기와 오물을 모아도 네 놈보단 깨끗할 거야.”
“뭔 소리야……. 윽. 나, 난……널 몰라.”
“난 똑똑히 기억해.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루시엘의 지팡이가 막시무스의 목을 눌렀다.
상대는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의 복수를 이제 와서 하게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싶기도 했지만, 계속 쓰레기처럼 사는 막시무스를 보니 역시 처리하는 쪽이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이건 공작의 제안이기도 했다.
‘루시엘, 생각해 봤는데, 후작 아들놈은 적당히 손을 봐줘서 영지 내 좋은 곳으로 데려다 놓는 게 어떻겠니. 어차피 후작 저택을 담보로 했으니 망하기만 기다리면 되지 않겠느냐.’
‘……언젠가는 복수할 생각이긴 했는데, 그럼 막시무스를 만나러 가야 할까요?’
‘후원 건이 끝나고 적당히 기회가 왔을 때, 타운하우스의 골방으로 유인해서 잡아 놓으면 될 거다. 나머지는 아빠가 처리할 테니까…….’
‘알겠어요, 아빠.’
그렇게 약속을 정한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는데, 이렇게 막시무스가 시비를 걸어올 줄은.
“이…… 이봐! 혹시 내 돈 때문에 이래? 그래, 돈 줄게! 아, 아니……조금만 기다리면 내 스칼렛코브라가 엄청난 돈을 벌어다 줄 거야!”
루시엘은 막시무스를 허망하게 보면서 말했다.
“아직도 모르겠어? 멍청하긴.”
“……뭐, 뭐가! 윽.”
막시무스는 욱신거리는 상처도, 지금 이 상황도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아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동자를 굴렸다.
“밖에 있는 짧은 머리의 남자 말이야. 네가 와이번을 후원하게 만든 존. 그거 우리가 계획한 일이야. 스칼렛코브라는 돈을 벌어 주지 못할 거야.”
“……! 무, 무슨! 그게 뭔 말이야?”
“한마디로 넌 망했단 거지.”
“미친, 나한테 왜! 왜 이러는 건데?”
“그동안 카빌가가 행한 불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럼, 나는 가 볼게. 너를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지만…… 그것보단 더 좋은 계획이 있다고 아빠가 말씀하셨거든. 안녕.”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전생의 한 사람 중 하나.
루시엘은 서둘러 밖으로 이동했다. 막시무스는 목이 쉬도록, 암실에서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질러 댔다. 그러나 차라리 누군가 오는 것을 늦추는 것이 더 현명했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