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84)화 (184/282)

<184화>

오페라의 내용은 한 구두장이와 아름다운 아가씨의 모험과 사랑 이야기였다.

극장을 나선 루시엘은 감수성이 가득해져선 집에 돌아와서도 여운 때문에 토파즈와 에메랄드, 페리도트까지 여러 보석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았다.

직접적인 경험을 하지 않고 이렇게 간접적인 경험을 하고도 강렬한 감정을 얻을 수 있다면…… 만들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기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페라나, 음악회, 소설, 미술, 조각. 감정과 감동을 주는 어떤 것이든 가능할 듯했다.

‘그러면 지금 개수가 가장 부족한 옵시디언을 더 만들려면, 고통스럽거나 괴로운 이야기를 봐야겠어.’

타운하우스로 돌아온 루시엘은 서재에서 책들을 몇 권 골라 보다가 잠들었다.

주인공이 고난의 연속을 맞이하는 소설도 읽고, 무서운 이야기도 봤다.

파아앗, 또롱, 또롱!

그런 것들을 잔뜩 봐서일까.

괴물과 유령에게 쫓기는 무섭고 생생한 꿈들도 잔뜩 꾸었다.

스트레스가 좀 쌓였지만, 옵시디언을 얻은 루시엘이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픽 웃었다.

“이렇게라도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끄응차, 신음을 낸 루시엘이 기지개를 쭉 켜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 잤는지도 모르게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루시엘은 파자마 위로 연보라색 숄을 걸치고는 창문을 열었다.

짹짹.

멍하니 들이치는 햇살을 만끽하다가 정원에 커다랗게 자리하던 천막이 사라진 걸 보았다.

‘블랙스콜피온, 와이번 사육장으로 잘 돌아갔으려나?’

“하-!”

그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낮은 기합 소리가 들렸다. 정원에서 검을 든 채 가볍게 몸을 풀고 있던 노아였다.

루시엘이 창턱에 몸을 기대며 인사를 건넸다.

“노아, 좋은 아침.”

“아가 마님, 조, 좋은 아침입니다! 악!”

루시엘을 올려다보면서 인사하던 노아의 몸이 순간 기울어졌다. 그 탓에 그는 자신이 놓아둔 물건에 발이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저런, 조심해.”

“……수, 수통이 걸려서 그만.”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진 노아가 검을 검집에 꽂은 다음, 머쓱해져 머리를 긁었다. 루시엘이 그를 따스하게 내려다보며 칭찬했다.

“평소엔 그렇게 어설픈데 할 때는 잘하는걸, 노아.”

“아닙니다.”

“이번에 막시무스를 멋지게 속여서 후원하게 만들었잖아. 노아의 공이 정말 컸어. 도움이 됐어.”

루시엘이 그렇게 인정해 주자,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쁜 마음이 물결쳤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기사단에서 물품을 제대로 지원받지 않은 거야?”

루시엘이 노아의 낡고 녹슨 검을 보았다. 다른 사람이 쓰다가 남은 검인 듯했다.

“갑옷과 망토는 제작 중이고, 검은 정식 기사가 되면 발급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명색이 내 기사인데, 그런 차림으로 다닐 수는 없지. 이따가 시내 대장간에 가자.”

루시엘의 말에 노아가 화들짝 놀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넷? 아, 아닙니다. 날을 갈면 쓸만합니다.”

“그 검 너무 녹슬어서 날을 갈아도 회생이 안 될 것 같은걸.”

루시엘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 목검도 한 자루 더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욕심 없는 사람을 보면 더 잘해 주고 싶단 말이지.’

루시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번 일을 잘해 준 상이야. 일단 외출 준비해야 해서 조금만 기다려줘. 한 시간! 아니, 두 시간!”

루시엘이 창문을 닫고는 급히 안쪽으로 사라졌다.

“……옛.”

노아가 대답하고 나서 녹슨 검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기사가 버린 것을 보고 몰래 가져온 검이었다.

어차피 연습하는 용도로는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호위를 받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쩌면 안심이 안 될지도 몰랐다.

“아, 우선 식사부터 해야겠다. 제르다 씨가 준 도면도 봐야겠고.”

루시엘은 베시를 불러 간단한 식사부터 요청했다. 샌드위치를 한 입 물고는, 책상에 바로 앉았다.

매듭을 엮어서 책처럼 묶어 놓은 인형 도면들은, 꽤 여러 장이었다.

펼쳐서 보기는 했지만, 복잡한 마법 원리가 잔뜩 적혀 있었다.

“봐도 모르겠네…….”

하지만 도면의 그림을 포함해 마지막 장은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인형에게 주인과 연결되는 마력 심장과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성을 심어 주게 되면, 아주 완벽하지는 않아도 주인과 비슷한 분신 인형을 만들 수 있다는 결론.

혹은 인형에게 실시간으로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

이대로만 제작된다면, 완벽할 텐데. 이게 가능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래도 이만큼 인형에 대해 연구해 주고 있었다니, 제르다 씨 고맙네. 류프델이 보면 뭐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루시엘은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도면을 다시 소중하게 말아서, 서랍 깊은 곳에 넣어 두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베시에게 가서 말했다.

“베시, 오늘은 노아와 대장간으로 외출할 건데 대충 단장해 줘.”

“네, 이럴 때야말로 어제 그 테일러가 필요하네요. 예약을 잡아 놓을 걸 그랬어요.”

베시가 싱그레 웃으면서 옷장에서 활동적인 원피스를 챙겨 왔다.

그 말에 루시엘도 동감하면서 십 분 동안 샤워하고, 바람 마법으로 몸에 물기까지 말리고 나왔다.

하얀 넥카라가 달린 네이비 원피스를 고른 루시엘은 하얀 양말과 부츠를 신었다.

뒤에서 베시가 따라다니면서 루시엘의 머리를 빗질해 주고, 빨간색 리본을 매 주었다.

후다닥 준비를 마치고 나가자, 노아와 챈들러, 이네스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아, 노아에게 둘이 가자고 말을 안 했구나. 세 사람 몫을 다 사 주어야겠는걸. 괜찮아, 나 부자야.’

루시엘이 싱그레 웃었다.

* * *

어둠이 켜켜이 내려앉아서 작은 화로의 불씨에도, 그 불이 몹시 환하게 일렁였다.

화로를 보고 있던 페넬로페의 얼굴이 못내 흐려졌다.

“……언제까지 여기 갇혀 있어야 하나요? 저 너무 답답하고, 지겨워요. 어머니.”

오늘따라 페넬로페의 어리광이 더욱 심해진 듯해, 카일라가 내리깐 눈으로 안타깝게 보았다.

“페넬로페, 너는 행복한 거란다. 내 꼴을 보렴.”

카일라가 로브 아래 흉측하게 늙고 곰보가 된 얼굴을 보였다. 힐다 볼라디의 영혼으로 제작한 껍데기가 이제 무너져내렸고, 그녀의 힘도 약해졌다.

아는 사실이지만 페넬로페는 매번 놀라며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이를 꽉 물면서 페넬로페가 말했다.

“죄송해요. 그러니까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가, 그렇게 쉽고 간단한 일이 아니란다.”

껍데기를 가지려면 영혼석이 필요했다.

죽은 지 삼 일이 되지 않은 영혼과 그녀의 영혼을 결합해 만든 돌이 영혼석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이 가진 마력의 상성이 맞아야 하는데, 그런 영혼을 구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힐다 볼라디는 제법 쓸 만한 영혼이었다. 썩 마음에 들었던 외모는 아니지만, 실체 없는 유령보다야 무엇이든 더 나았다.

영혼석을 넣고 인형으로 제작한 몸이 바로 지금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몸도 곧 끝인 것 같았다.

죽은 여자들의 영혼을 구해 달라고 어둠의 인형사에게 의뢰를 넣었으니, 곧 소식이 있을 터였다.

레이놀드가 신전에 박혀 있는 동안, 그녀도 재정비하는 시간이 필요한 터였다.

카일라의 형형한 눈이 페넬로페를 향했다.

“때를 기다리렴, 페넬로페. 그리 조급한 성정으로는 될 것도 안 된다고 내가 누누이 말했지?”

“알아요. 하지만 이 어두운 지하에 갇혀 지낸 지도 벌써 오 년이라고요.”

카일라는 처음 페넬로페를 데려오던 그날을 떠올렸다. 자신을 닮아 욕심이 많던 이 아이.

처음에서는 이 아이를 세뇌하고 조종해서 적당히 제물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하는 양을 보니 자신도 언젠가부터 정을 붙이게 되었다.

저만큼이나 순수한 악의를 가진 아이는 보기 드물었다.

탐욕과 쾌락.

남을 짓밟고 올라가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그 실행력.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

그래서 페넬로페에게 자신의 비밀들을 하나씩, 하나씩 보여 주었다. 자신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자신이 제물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도.

그 사실을 듣고 무섭지 않냐고 묻자 페넬로페는 답했다.

‘무섭지 않아요. 너무 멋져요. 저도 영원히 죽고 싶지 않거든요. 죽기도 싫고, 늙기도 싫어요.’

생각보다 더 페넬로페는 개방적이었다. 은둔하기 위해서 선택한 이 마계에 와서도 잘 적응해 주었다.

값비싼 드레스와 보석을 주면 웃었고, 누군가를 해치는 주술도 서슴없이 배웠다.

평범한 여자애라면, 벌레 한 마리 죽이는 것도 못 했을 터인데.

여러모로 ‘쓸모’가 있는 아이였다.

‘어리숙하고, 조급한 성정만 버린다면 완벽해지겠지만.’

카일라는 페넬로페의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새로운 껍데기만 마련되면,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갈 거니 걱정 말거라.”

“전 어머니를 돕고 싶어요. 저도 이제 벌써 열다섯 살이에요. 제가 가서 희생양을 데려오는 건 어떨까요, 네?”

“너 혼자서? 그건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만…….”

카일라의 탁한 눈동자가 구르면서 생각에 젖어 들었다.

“그에게 한번 연락해 보마. 널 도와주긴 할 테니까.”

“정말이지요? 저 빨리 돌아가서 제 능력을 펼치고 싶어요.”

페넬로페는 환하게 웃으면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서 소환진을 그렸다.

쉬이익.

새카만 뱀 한 마리가 소환되어 혀를 날름거렸다.

페넬로페가 손을 뻗자, 뱀이 그녀의 팔을 타고 휘감으면서 올라왔다.

“루시엘, 그 애를 어서 만나고 싶거든요.”

그간 단련해 온 이 어둠의 주술로 그 계집애를 혼내 주고 싶었다.

자신은 이제 예전의 멍청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페넬로페가 아니니까.

페넬로페의 초록빛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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