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이동포탈을 타고 되돌아 나온 루시엘은 다리에 힘이 살짝 풀려 휘청거렸다.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사람을 제 손으로 해친 건 처음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여기서 나약해질 수는 없었다. 루시엘은 스스로를 다그치며 마음을 다잡아 감정을 진정시켰다.
‘잘한 거야. 루시엘. 그놈은 벌 받아 마땅한 놈이니까. 아직 멀었어. 더 강해져야 해.’
루시엘이 입술을 꼭 깨문 채로 고개를 들자, 기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아가 마님!”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이미 줄을 다 끊고 루시엘을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루시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보다시피 저는 다친 곳이 없어요.”
“저희가 지켜드렸어야 하는데 안일했습니다.”
“아뇨, 맘 쓰지 말아요.”
어찌 되었든 막시무스는 귀족가의 자제였으니, 이렇게 탁 트인 시내 한복판에서 해칠 수는 없어 일부러 유인한 거였다. 그랬다간 황도의 경비대가 움직일 수도 있었다.
기사들도 루시엘이 일부러 유인한 것이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루시엘에게 맡긴 것에 자책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루시엘은 마음을 마저 진정시키며 대장간 사내에게 들으라는 듯 일부러 말했다.
“그 도련님이 자꾸 절 귀찮게 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드렸을 뿐이니까요. 자, 그럼 물건을 마저 고르고 돌아갈까요.”
“아아, 정말 감사합니다. 매번 그렇게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지요. 그럼 검은 그걸로 하시고 다음은 갑옷을 보여 드리겠습니다요.”
대장간 사내가 이해했다는 듯 몸을 날래게 움직였다. 마침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든 초보자용 갑옷이 있다고 해서 바로 구입을 마치고 돌아서려 할 때였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나리들, 그럼 다음에 또 찾아 주시우.”
루시엘과 기사들이 발길을 돌리자, 대장간 사내는 제련을 위해 망치를 붙잡았다.
쩡쩡, 망치질로 쇠를 두드리는 소리에 루시엘은 문득 호기심이 생겨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내 보석을 부숴 본 적은 없었지.’
특히 다이아몬드는 단단해서 흠집이 잘 나지 않기로 유명한 보석이니까.
“그 망치로 다이아몬드를 내려치면 어떻게 되나요?”
“아아…… 그런 일을 왜 하시려는 지. 다이아몬드는 경도가 높은 것이지, 강도가 높은 것이 아니라 결을 따라서 내려치면…… 부서질 겁니다요.”
“경도와 강도가 뭐지요?”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대장간 주인이 설명해 주었다.
“경도는 물질 표면의 굳기로 무르고 단단한 정도를 말합니다요. 경도가 높다는 건 표면에 마모나 긁힘이 적다는 뜻입지요. 경도가 높은 다이아몬드를 가치 있는 보석이라고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요. 반면에 물체를 파괴할 때 들어가는 힘이 얼마나 드나, 이것이 강도입지요. 강도가 높다는 건 물체 전체가 받는 힘이 강해 잘 파괴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요.”
그는 과거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물건을 제련하다가 망가뜨려 물어 준 적이 있었다. 그 사정을 전해 들은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이고 감사를 표했다.
“그렇군요, 경험담 고마웠어요.”
핑크색 다이아몬드를 만든 감정은 자신감이었다.
지금껏 에리카와 함께 그 어떤 방법으로 연구해도 힘을 발현하는 조건을 찾을 수 없었다.
파괴해 사라져 버려도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
그게 발현 조건일지도 몰랐다.
루시엘이 가진 촉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이 감이 틀릴 수도 있지만, 보석 하나쯤은 다시 만들면 그만이었다.
‘아깝지 않아.’
하지만 여기서 그걸 공개적으로 실험해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일단 한 가지 가능성은 열렸어. 돌아가서 에리카에게 알려 마저 연구를 진행해 보도록 해야지.’
그리 생각하면서 루시엘은 대장간을 빠져나왔다.
일행은 골목을 빠져나와 마차를 타는 곳으로 향했다. 루시엘의 뒤를 조용히 따르던 노아가 새로 산 갑옷과 검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검과 갑옷 소중히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가 마님.”
“그건 안 돼, 노아. 더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거니까.”
“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마차에 오르는 루시엘을 보며, 노아도 마음 깊이 되새겼다.
‘강해지겠습니다. 지금은 당신보다 강하지 않지만, 언젠가는…….’
* * *
루시엘이 기사들과 함께 타운하우스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막시무스는 치워져 있었다.
이미 공작의 명령으로 마도사들이 움직여 조치가 된 터였다.
귀환한 루시엘을 보자마자 공작이 서재로 불러 말했다.
“고생 많았다, 루시엘. 뒤는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아무 걱정할 필요 없다. 놈은 벨슈타인의 지하 감옥에서 썩게 될 거다.”
이 고운 아이의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이 자신이 알아서 처리할 수도 있었지만, 루시엘은 복수를 원했다.
‘그래서 오르비아 백작, 그놈도 오래전 잡아 놓았지. 루시엘의 말 한마디면, 언제든 죽일 수 있게. 차라리 살려 달라고 부르짖을 만큼 고통 속에 지내고 있겠다만…….’
“감사해요, 아빠.”
루시엘이 그의 너른 품에 안겼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루시엘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붉은 눈이 친근함을 품었다.
“그래도 기쁘군. 마음 여린 네가 이만큼이나 성장을 하다니 기특하다.”
곧 엘링턴이 공작의 서재로 들어섰기에 두 사람은 그에게 집중했다.
“막시무스 놈의 알리바이는?”
“카빌 후작은 아들이 집을 나가도 도통 찾지 않는다고 하니, 실종 신고를 바로 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훗날을 위해 적당히 목격자와 서류를 꾸며 보겠습니다.”
“그래, 해당 건 처리하고 자네는 천천히 귀환하도록. 루시엘, 너도 황도에 더는 볼일이 없다면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떠냐?”
“일단은 류프델을 만나러 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할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건 내가 아버지께 연락을 드려 보마. 여기서 바로 류프델에게 가는 것이 더 나을 테니.”
“네……!”
루시엘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할아버지가 오시게 되면 제르다와 함께 벨슈타인 영지로 이동하지 않아도 되니, 시간이 단축될 듯싶었다.
엘링턴의 녹색 눈이 동그래지며, 둘 사이를 파고들며 말했다.
“테일러의 연락이 오지 않았는데, 벌써 귀환하십니까? 테일러의 주된 활동 무대는 황도가 아닙니까?”
“그들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더군. 영지로 돌아가 있어도 연락은 닿을 거다. 호크아이를 뛰어넘는 테일러 조직이니, 이동이 문제겠나.”
“그것도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각하.”
“우리 벨슈타인 역시 이동은 문제가 안 되고 말이지.”
공작이 느른하게 뻗은 자세로 의자에 기대며 말하자, 루시엘이 환하게 웃었다.
“맞아요, 아빠. 벨슈타인은 너무 대단해요!”
“루시엘, 너도 자랑스러운 벨슈타인이지.”
공작의 잘난 척에 맞장구쳐 줄 사람이 생겨서 엘링턴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업무 이야기가 더 남았다고 해서 루시엘은 이만 서재를 나왔다.
그사이 응접실에는 솔리아페와 이벨린이 두 개의 바구니를 나란히 놓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엄마, 할머니, 다녀오셨어요?”
“루시엘, 마침 잘 왔구나.”
“오늘은 마카롱을 만들었지.”
루시엘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서로 바구니의 뚜껑을 활짝 여는 두 사람이었다.
알록달록 색색의 마카롱이 잔뜩 들어 있었다. 솔리아페의 바구니에서 꽃 모양의 마카롱을 꺼내 보며 루시엘이 말했다.
“너무 곱고 예뻐요. 아까워서 못 먹겠어요.”
“그래도 먹어 줘. 안 먹는 게 더 아까우니까.”
루시엘이 솔리아페의 것에 주목하자 이벨린도 자신의 마카롱을 어필했다.
“루시엘, 보렴. 할미 건 동물 모양이란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귀여운 동물 모양이었다. 기린, 양, 사자, 강아지, 토끼도 있었다.
“흑, 너무 귀여워서 기절하겠어요. 할머니.”
“루시엘을 닮은 토끼는 특별히 색색별로 만들었지.”
심장이 아플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운 마카롱이었다. 할머니의 애정이 담겨서 더욱.
루시엘의 진홍빛 눈망울에서 꿀이 떨어질 듯 녹아내렸다. 이벨린은 솔리아페에게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봤지, 솔리아페? 내 승리인 것 같구나. 호호.”
두 사람의 대결이 있었던 듯하지만, 어쨌든 루시엘은 볼이 통통해지도록 마카롱을 먹을 수 있었다.
루시엘이 입가를 냅킨으로 닦은 다음, 마차에서 든 생각에 대해 가족들에게 말했다.
“황도를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만들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래, 무엇이니?”
그동안 많은 일을 진행하면서 한 가지 조금 불편한 점이 있었다.
멀리 떨어진 상대와 바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것.
물론 서신을 이용해 연락을 나누었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면 일을 진행하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루시엘은 오랫동안 담아 놓았던 것을 말했다.
“저도 통신구를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그동안 가족들이 먼저 권한 적은 있었지만, 루시엘이 직접 만들겠다고 말한 건 처음이었다.
루시엘도 통신구의 필요성은 느꼈지만 조금 주저되는 점이 있었다.
예전에 개발된 통신구는 사용자의 마나를 사용하는 것이라, 루시엘의 마나가 노출될 염려가 있었는데 요즘 만들어진 것은 그렇지 않았다.
부착된 마정석을 통해 마나를 사용했고, 통신을 위한 개인의 마나만 살짝 소모되는데 철저한 보안으로 그것이 남에게 노출될 일이 없다고 했다.
특히, 마탑에서 에리카와 다른 팀원들이 개발하는 과정을 지켜보던 물건이기도 해서 루시엘도 눈여겨본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시내에서 신상 통신구를 이용하는 사람을 보았기에 루시엘도 가지고 싶었다.
“잘 생각했구나. 우리도 너에게 통신구가 있어야 안심할 수 있으니까. 생각난 김에 바로 만드는 게 좋겠는걸.”
솔리아페의 이야기를 들은 모양인지 공작도 응접실로 나오면서 눈을 휘었다.
“첫 통신은 아빠랑이다, 루시엘.”
“루이비드, 새치기하지 말렴. 이 할미가 먼저다.”
“……그건 곤란하겠어요, 어머님.”
솔리아페가 조용히 웃으면서 루시엘의 손을 잡고는 일어섰다.
“루시엘은 지금 저와 먼저 통신구 만들러 갈 거니까요.”
“……앗, 네에. 그런데 그냥 다 같이 사이좋게 가면 안 되나요?”
과열된 가족들의 애정 행각에 땀을 흘리면서 루시엘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