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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25)화 (125/282)

<125화>

탕! 탕!

천지를 울리는 소리에 파드닥거리던 새 떼 중 한 마리가 툭 떨어졌다.

레이놀드는 거리낌 없이 다음 사냥감을 바로 겨누었다. 재미 삼아 무기 창고에서 가져온 천둥소리가 나는 마법 석궁이었다.

죽은 새들을 감흥 없이 바라보던 레이놀드는 새로운 스캐빈저(scavenger)로 잘 쓰고 있는 대머리독수리를 날려 보냈다. 곧 독수리가 죽은 새들의 살점을 미친 듯이 뜯어먹기 시작했다. 사냥하고 나면 꼭 시체가 생기기 마련이니, 청소가 필요했다.

까마귀 따위보다 월등한 힘과 속도를 갖춘 놈이니, 보는 재미도 있었다. 다음엔 진짜 독수리를 들이고 싶을 만큼.

지난번에 같은 용도로 쓰던 까마귀를 전서구로 보냈더니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그에 테오 자작이 사죄의 선물로 이 녀석을 보내 주었다고 팔로스가 전했고.

‘게다가 검은 장벽의 실드에 대한 정보도 보냈단 말이지.’

그때 뒤로 던져 놓은 통신구의 불빛이 깜빡였다. 사냥 중에는 건드리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거늘.

하지만 즐길 만큼 즐겼고, 이만 돌아갈 시간이었다. 레이놀드는 마지못해 통신구를 켰다.

―황자 전하, 클로디아 황녀 전하께서 다음 열릴 국정 회의의 발언권을 요구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팔로스에게서 내용을 전해 들은 레이놀드가 싸늘한 얼굴로 되물었다.

―폐하께서는 일단 무슨 연유인지 들어 보겠다는 입장이기에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은 아직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내버려 두라고 하세요. 어디 무슨 말을 늘어놓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최근 국정 회의는 물론 황궁을 휩쓰는 최대 화두는 황녀의 정략결혼이었다. 절박한 그녀가 무슨 계략이라도 꾸민 게 아닌가 싶었으나 그는 이내 침착해졌다.

‘순진하고 멍청한 클로디아가 하긴 뭘 하겠나…….’

외가인 힐스가의 늙은이들도 아무 말 없이 눈치만 보는 상황이니, 클로디아를 도와줄 것 같지는 않았다.

최근에는 제법 저를 의심하는 눈초리를 보냈지만, 이미 대신들 몇몇은 저를 지지하기로 뜻을 도모했다.

황녀가 결혼이 싫다며 부정한다고 해도 대신들의 뜻을 뒤집기란 어려울 터였다.

무엇보다 클로디아가 결혼을 하든 안 하든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황위 계승자가 될 수 없다는 황성의 법도가 깨질 리도 없다.

레이놀드는 명백하고 불변한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식사를 마치고 제 어깨로 돌아온 독수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 * *

길리아트는 완성된 지팡이를 얼른 전해 주고 싶어 방 창문이 보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왔다.

톡톡.

별궁의 창문을 무언가로 두드리는 소리에 루시엘은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에 너무 일찍 일어난 탓인지 시클라인과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창문 너머로 길게 뻗은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걸 본 루시엘은 침대에서 내려와 맨발로 도도도 달려갔다.

“……웬 나뭇가지? 앗, 할아버지!”

단잠을 깨운 것은 길리아트였다.

루시엘이 창문을 활짝 열고 아래를 보니 길리아트가 환히 웃고 있었다.

“루시엘, 아직 자고 있을까 봐 살짝 두드렸는데 내가 깨운 것은 아니지?”

방금 그 소리가 마법으로 나뭇가지를 움직여 창문을 두드렸던 소리인 모양이었다.

“아니에요. 금방 일어나려고 했어요.”

루시엘은 곧장 동그란 스툴을 가져와서 밟고는 창가로 기어 올라왔다.

“……밤의 대장간에 다녀오신 거예요?”

빈손으로 나타난 그에게 루시엘은 일부러 지팡이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오냐. 할애비가 많이 늦었지?”

“아니에요.”

“이리 내려 줄까?”

“네. 잠깐만요.”

루시엘은 얼른 가서 신발을 찾아 신었다.

길리아트가 그로우 마법을 사용해 나무줄기를 길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루시엘이 있는 창문까지 다다른 나무줄기는 루시엘을 껴안듯이 둘둘 말더니 조심스레 아래로 내려 주었다.

지면에 발이 닿기 전에 길리아트가 루시엘을 안전하게 받아 내렸다.

“요 콩알만 한 녀석, 언제 자랄꼬. 루시엘, 네 지팡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든?”

한쪽 눈썹을 짐짓 장난스럽게 치켜올리며, 길리아트가 물었다. 루시엘은 일부러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궁금하지 않은 척은 못 할 것 같았다. 결국 귀를 쫑긋 세우며 루시엘이 물었다.

“……할아버지, 제 지팡이 살아남았어요?”

“……지팡이가 숨도 쉬는 모양이지? 보다시피 지팡이는 무사하다.”

길리아트가 로브 안쪽의 깊은 주머니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엇! 이 긴 게 어떻게 거기에서 나와요?”

“응? 이 로브의 포켓엔 마법이 걸려 있거든. 자, 루시엘. 네 지팡이 여기 있다.”

제 지팡이를 받은 루시엘은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지팡이의 가장 상단에는 놀랍게도 네 개의 보석이 꼭 맞물려 있었다.

마법 세공 때문일까? 보다 반짝임이 화려해져 지팡이를 들고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빛의 잔상이 남았다.

“하, 할아버지. 제 지팡이 맞아요?”

길리아트가 끄덕여 주자 루시엘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지팡이를 보고 또 보았다. 전과는 완전 다른 지팡이처럼 보였다.

또롱!

그 와중에 마력을 빛내며 에메랄드를 만든 루시엘이 흠칫 놀라 주변을 살피자 길리아트가 로브를 커다랗게 펼쳐 루시엘을 가려 주었다.

“다행히 아무도 안 지나갔다.”

“감사해요, 할아버지. 지팡이, 한번 써 볼래요.”

루시엘은 처음 지팡이를 받았을 때처럼 두근거렸다.

‘……이제 나도 드디어 속성 마법을 할 수 있게 됐어!’

마법 수련장으로 서둘러 향했다.

그동안 무속성이라서 마음고생했던 것을 잊을 만큼,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연신 웃고 있었다.

“먼저 지팡이에 마나를 연결하는 마나 페어링부터 다시 해야 한다. 지팡이에 기록된 마법은 그대로 남아 있으니 다시 하지 않아도 된다.”

“네!”

지팡이를 꼭 쥔 채 루시엘은 눈을 감고 심장에 모여드는 마력을 느꼈다.

가벼운 공기와 함께 휘돌던 루시엘의 마력이 지팡이에 박힌 네 개의 보석으로 스르륵 스며들었고 심장이 쿵쿵 뛰며 공명했다.

지팡이의 울림이 전해지고 나자 루시엘은 눈을 반짝 떴다.

‘마력이 전보다 강하게 느껴지고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

“아, 루시엘. 사실 만드는 동안 최상급 마정석이 자꾸 깨지는 바람에 네 보석을 마정석 대신 사용하여 세공했단다.”

“보석을요? 그래도 성공해서 다행이에요.”

루시엘은 어렵게 세공이 성공한 지팡이를 더욱 소중하게 쓰다듬었다. 그러곤 지팡이를 쥔 채 주문을 영창했다.

“파이어 볼트(Fire bolt)!”

화르륵!

“아이스 애로우(Ice arrow)!”

슈우우!

그동안 제힘으로 펼치고 싶었던 여러 원소 마법들을 마구 사용했다.

덕분에 순식간에 밀짚 인형들과 수련장이 수난을 당했다. 불타고, 얼고, 찢기고…….

물론 수련장에는 복원 마법이 걸려 있어서 금방 원상 복구되었다.

단순한 마법이지만 실로 가공할만한 위력에 루시엘도 신이 났다.

지팡이 덕분인지 마법 발동 속도가 빠르고, 다음 주문을 시전할 때까지의 지연 시간도 절반으로 줄어든 것 같았다.

“당분간 연습에 더 집중해야겠어요. 새로운 마법도 배우고요.”

“그래, 열심히 정진하거라.”

“네, 할아버지!”

생기 넘치는 대답에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길리아트가 일러주었다.

“류프델 말로는 지팡이와 보석이 각기 가진 잠재력이 커서 성장이 기대된다고 하더구나. 내 생각도 그렇다. 게다가 루시엘 너의 그 커다랗고 맑은 마력과 만나면 더 강한 지팡이로 성장하는 것도 머지않겠다 싶구나.”

“감사해요. 할아버지 덕분에 원소 마법까지 다 할 수 있게 되었어요.”

“루시엘, 너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저 네가 뛸 수 있도록 받침대를 놓아 준 것뿐이지.”

그의 주름진 눈이 휘어졌다. 자신감을 북돋아 주는 길리아트의 말에 루시엘은 마음이 물결쳤다.

또롱, 또로롱!

토파즈를 만들어 내면서 루시엘이 길리아트를 폭 끌어안았다.

“아, 할아버지 소식 들으셨죠?”

루시엘은 살짝 걱정이 되는 얼굴로 물었다.

“루이비드와 솔리아페가 마물 토벌을 나간 것 말이냐.”

“네.”

“그건 흔한 일이니, 뭐 나는 걱정도 안 한다. 염려 말고 마법을 익히려무나.”

“네.”

루시엘은 왠지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애써 불안함을 눌렀다.

루시엘은 그날 저녁까지도 마법 연습에 몰두했다. 하루빨리 강해지고 싶었으니까.

연습을 마친 후 별궁의 제 방으로 돌아온 루시엘은 책상에 놓인 서신을 보며, 클로디아 생각이 났다.

‘그러고 보니 클로디아 황녀님은 잘 해내고 있을까……?’

루시엘은 클로디아에게 서신과 함께 여러 가지 힘을 보탤 것들을 일러주었다. 모두 공작님과 에바, 엘링턴의 도움 덕이었다.

혼자서 싸울 그녀에게는 많은 것들이 필요할 테니까.

‘클로디아 황녀님, 힘내요.’

* * *

다음 날 열린 국정 회의에서 황자와 황녀에게 발언권이 동등하게 주어졌다.

타이라 제국은 국정 회의에서 정략결혼에 관련된 의제는 황제와 대신들이 의논을 마친 후, 당사자에게 결론을 전달하곤 했다.

국익이 먼저였으니 본인이 명분 없이 거부할 수 없는 탓이었다.

그러니 클로디아 황녀가 단순히 결혼이 싫다 생떼를 부려도 황제와 대신들의 의견을 뒤집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결혼을 진행하게 될 터였다.

대회의장으로 먼저 들어서며 레이놀드가 클로디아를 향해 싱그레 웃었다.

“누이가 무슨 이야길 할지 기대되는군.”

좋은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웃는 레이놀드를 보자 클로디아도 지지 않고 마주 웃어 주었다.

“그래, 기대해도 좋아.”

루시엘이 보낸 서신은 클로디아에겐 한 줄기 빛이었다. 처음에는 무척 놀랐다.

어른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열 살짜리 아이가 작성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조언들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들은 클로디아에게 무척이나 큰 도움이 되었다.

「친애하는 클로디아 황녀님께.

우선 저는 너무 기뻐요. 황녀님께서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하신 것부터 이미 한 걸음 나아간 거예요.

만나서 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들이지만, 사안이 급하니 서신으로 대신할게요.

이 모든 것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서 작성하는 거예요.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저를 포함한 벨슈타인 공작령은 클로디아 황녀님을 지지할 계획이에요. 지금부터 제가 알려 드리는 게 황녀님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 정략결혼과 그 조건을 논하는 것이 현재 얼마나 무의미한 것들이었는지 증명해야 해요.

공식 청혼이 오가지도 않았고, 서류로 약속을 해도 어기는 일이 많다면서요?

가장 먼저 제국의 초대 군주의 월계수 맹약 이야기부터 꺼내세요.」

‘월계수 맹약. 그게 있었다는 걸 간과했구나……. 전통과 황실의 법도를 따지는 보수적인 대신들에게 들이댈 좋은 구실이지.’

클로디아는 다시금 루시엘의 서신을 곱씹으면서 회의장으로 당당하게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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