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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26)화 (126/282)

<126화>

정오에 시작된 대회의장 벽면에 걸린 시계의 바늘은 어느새 숫자 3을 가리켰다.

정략결혼을 지지하는 대신들의 지루한 토론이 한참 이어졌다.

무엇보다 회의의 의장을 맡은 가르솔 후작은 황녀에게 발언권을 넘겨주지 않고 진행을 계속하는 중이었다.

“다음은 데이븐 백작의 의견을 청해 듣겠소.”

“메이너드와 우호적으로 협력할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데이븐 백작 역시 앵무새처럼 같은 의견을 발표했다. 가르솔 후작이 다음 사람을 찾으려 했지만 이제 대부분의 의견은 나온 터였다.

클로디아가 장내의 모두에게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켜 주듯, 조용히 손을 들었다.

“이제 이번 의제에 대한 제 의견을 발표하겠습니다.”

가르솔 후작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에게 시선을 보냈다.

“……클로디아 황녀 전하의 말씀 듣겠습니다.”

“앞으로 나가서 발언하고 싶습니다.”

“황녀 전하, 발언은 그 자리에서 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가르솔 후작이 염소처럼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예법을 강조하자 노이슈반 황제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앞에서 발언하는 것이 관례에 위배되는 일은 아니지 않나. 황녀는 계속하거라.”

그 역시 클로디아 황녀가 어떤 의견을 피력할지 주목하고 있었다. 레이놀드도 눈을 빛내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클로디아는 보란 듯이 황제를 향해 완벽한 예법에 맞춰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폐하.”

황녀가 단상 위로 올라섰다.

새하얀 넥 카라와 금사가 수놓아진 자줏빛 드레스로 단장한 클로디아는 회의를 위해 일부러 성장한 차림이었다.

“타이라 제국의 앞날에 무한한 영광과 여신의 가호를. 제게 발언권을 허락해 주신 황제 폐하와 대신 여러분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황녀의 고대 예법 인사에 나이 든 원로 대신들도 그 자리에서 손을 가볍게 포개면서 응답했다.

“국혼은 분명 나라에 이득을 가져오는 거래입니다. 메이너드와의 혼약으로 타이라 제국이 한 걸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면 저는 기꺼이 결혼에 응할 것입니다.”

말을 한번 끊은 클로디아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대부분 그녀의 말에 끄덕이고 있었다.

“단, 그것이 반드시 지켜질 약속이라면 말입니다. 메이너드가 내세운 메이플 영지의 소유권과 무카스 독점 교역권은 분명 제국에 도움이 되는 조건입니다. 하지만 공식 서류도 도착하지 않은 지금, 그들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황녀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곧장 반박이 들어왔다.

“……하지만 황녀 전하. 그렇다고 메이너드에 대놓고 너희들이 지키지 않는다고 따져 물으실 수 있으신지요?”

“그러다가 불쾌함을 느끼고 청혼이 물 건너갈 수도 있는 노릇 아닙니까.”

“나라의 체면이 있는데 어찌.”

제각기 떠드는 대신들의 반응은 예상한 것이었다. 잠자코 있던 황녀의 외숙부, 힐스 후작이 말을 보탰다.

“되도록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만 한 말씀 보태겠습니다. 그들의 말만 믿고 결혼을 진행했다가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그 책임은 누가 지게 될지요? 심사숙고하여 결정할 일이라고 봅니다.”

지켜보던 황제 노이슈반이 말했다.

“맞는 말이오. 그럼 결혼 계약이라도 작성을 해야 하는가?”

“딱딱한 계약보단 타이라 제국의 오랜 전통을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요.”

“오랜 전통이라면…….”

“과거 초대 황제 때 만들어진 하얀 월계수 맹약이 있지 않습니까. 서로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절대 깨뜨릴 수 없는 맹약이지요. 전통을 명분으로 내세우면, 메이너드 측의 속내를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오호, 그래. 그런 전통이 있었지. 부드럽게 상대를 압박할 수 있겠군.”

황제가 무릎을 치며 감탄했고, 대신들도 수긍이 가는 부분인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혜로운 의견인 듯합니다.”

황자를 지지하던 대신들은 슬쩍 눈치를 보았다. 레이놀드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회의를 지켜볼 뿐이었다.

‘제법 머리를 굴렸군. 메이플 영지를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메이너드의 속내를 알아챘나. 그러나 무카스 교역권은 반드시 넘겨주기로 합의를 했으니…… 대신들은 그걸로도 만족할 터.’

그러나 다음 순간 클로디아가 단호하게 말하자 레이놀드 황자가 자못 인상을 썼다.

“단, 이는 메이플의 소유권을 받는 조건에 한해서입니다. 무카스 교역권은 필요가 없습니다.”

클로디아 황녀의 말에 장내의 모두가 놀랐다.

“그게 무슨, 무카스가 있으면 우울증을 앓고 있는 많은 환자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클로디아는 루시엘의 서신을 되새겼다.

「무카스 찻잎은 추후 독성이 발견될 거예요. 아주 먼 훗날의 일이죠. 지금 그걸 증명할 방법은 없으니, 다른 방법을 제시해야 해요. 우울해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바로 이거예요.

제르다의 마법 장난감 상점.

원래 신분을 막론하고 VVIP 고객에게만 특별히 개방하는 곳이지만, 벨슈타인 공작가의 소개서를 가져가시면 문을 열어 줄 거예요.

이곳에 고민을 들어 주고 끌어안아 주는 인형들을 팔고 있어요.

황도에서 가까운 상점이라고 하니, 금방 가실 수 있으실 거예요.」

“……무카스 약초는 메이너드에서만 자생했고 세상에 공개되지도 않아서 어떤 안정성도 확보되지 않았어요. 그들의 말만 믿기에는 성급해요. 그보다는 더 건강하게 우울증을 치료할 방법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중 하나가 이 ‘고민하는 곰 인형’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클로디아 황녀가 신호를 주자 시종이 가져왔던 상자를 열어 주머니를 꺼냈다.

“이게 무엇입니까?”

클로디아가 주머니를 열자, 거기에는 엄지손가락 크기의 곰 인형이 들어 있었다.

“이 뚱딴지같은 인형은…… 대체.”

“이 곰 인형에게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잠들면 인형이 대신 고민해 준답니다. 가끔 손가락을 안아 주며 위로해 주기도 하고요.”

클로디아는 자신이 사용 중인 자그만 곰 인형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온기를 느낀 곰 인형이 폭 앉더니 둥근 귀를 기울였다.

“오늘은 어떤 하루였어?”

“오늘은 긴장되어서 잠을 못 잤어.”

“저런……. 고생 많았어. 고민은 없어? 내가 대신 고민해 줄게.”

“많은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는 게 힘들어.”

“좋아. 내가 고민해 보고 알려 줄게.”

그러더니 곰 인형이 턱을 괸 채로 움직임을 멈췄다.

“자, 천천히 심호흡하고 이렇게 생각하자. 여기는 너와 나뿐이라고. 나에게 말하듯이 말해 봐. 너는 지금 무척 말을 잘하고 있거든.”

꼬물거리던 곰 인형이 황녀의 손가락을 폭 감싸 안았다. 클로디아는 가상 연극일 뿐이지만, 절로 입가에 미소를 올렸다.

“…….”

황녀의 엉뚱한 행각에 대신들이 서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고작 이 아이들 장난감이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또한 증명되지 않은 일이 아닙니까.”

클로디아는 반박이 나올 줄 이미 예상했는지 빠르게 답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민을 털어놓고 나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지 않으시던가요? 몸을 치료하는 사람은 있지만 왜 마음을 치료하는 사람은 없을까요?”

“……그걸 굳이 이렇게 공들여 치료할 필요가.”

“그럼 무카스도 필요 없겠지요? 우울증은 마음의 병이에요. 그래서 전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 주고 답을 찾아 주는 치료소를 나라 곳곳에 세우고, 그곳에서 일할 우울증 치료사 양성 사업을 추진할 생각이에요. 마법 인형이 그 일의 첫 발판이 되어 줄 테고요.”

의견을 들은 대신들은 들을수록 그럴싸한 황녀의 말에 점점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 대신들은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클로디아는 그에 짧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마음의 병을 고치는 의사라. 미처 생각지 못한 일입니다.”

“저도 그 곰 인형을 한번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곰 인형은 넉넉히 데리고 왔습니다.”

“하지만 너무 뜬금없는 제안이 아닌지요!”

대신 하나가 말했으나 황제가 황녀를 지지하는 의견을 보탰다.

“클로디아 황녀가 이토록 많은 준비를 해 왔다니, 나는 조금 감격스럽구나. 검증되지 않은 약초에 기대는 것보다 이리 건설적인 방법을 제안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나라를 위한 길이라는 생각이다. 짐은 황녀의 의견을 지지하는 바요. 경들의 의견은 어떤가?”

“클로디아 황녀 전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메이너드에 기대지 않고 자국에서 해결할 좋은 방법인 듯합니다.”

여러 대신이 클로디아 황녀의 의견에 지지를 표했다. 힐스 가문도 조용히 지지의 눈빛을 보냈다.

정략결혼을 밀어붙이기로 약속했던 대신들마저, 입으로는 가만히 있었으나 이미 마음으로는 황녀의 의견에 동한 상태였다.

“좋다. 이로써 클로디아 황녀의 의견대로 월계수 맹약을 진행하는 조건으로 메이플 영지 건에 대해서만 협상을 할 것이다. 이에 메이너드가 맹약으로 계약을 체결하지 않는다면, 이번 정략결혼은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노이슈반 황제가 그리 못 박아 이야기하자 대신들도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회의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황녀께서 저렇듯 총명한 분이었던가.’

제 어머니인 이사벨 황후의 기품과 미모를 갖춘 천진한 소녀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은 제국의 황녀를 뛰어넘는 자질을 보여 주어 대신들도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훈훈한 장내 분위기와 다르게 레이놀드 황자는 싸늘한 얼굴로 일어서서 몸을 돌렸다.

클로디아와 눈이 마주치자 그에게서 알 수 없는 적대감이 느껴졌으나, 그것은 찰나였다.

“누이, 준비하느라 고생이 많았군. 누구의 도움을 받았어?”

“……아니, 평소 내가 생각하던 것들이야. 넌 어떻게 들었어?”

“그 효용성은 모르겠지만 귀여운 의견이더군. 응원은 보낼게.”

레이놀드가 대충 얼버무린 다음, 싸한 얼굴을 겨우 감추며 장내를 떠났다.

“……휴우, 다행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클로디아 황녀는 마음 깊이 루시엘에게 감사했다.

이번 일로 황제와 대신들 모두에게 클로디아의 존재감을 깊이 각인하는 일이 되기도 했다.

‘이제 산 하나는 넘은 기분이네. 어서 루시엘을 만나서 다음 일들을 논의하고 싶은걸.’

이번 정략결혼 건을 무사히 마무리 지으면 제대로 논의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따로 만나서 이야기하기로 했으니 곧 루시엘을 볼 수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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