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부모님이 모두 집에 안 계신 걸 알게 되면 레오니가 불안해할 것 같아.’
루시엘은 동관에 있는 레오니의 방에 들렀다. 과거에 레오니가 비뚤어진 영향도 부모님이 자주 챙기지 못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두 분도 사랑을 많이 주고 계시지만, 안 계실 때는 내가 채워 주어야지.’
어린아이에겐 언제나 다정하고 따뜻한 관심이 필요한 법이니까.
‘어릴 때의 기억은 평생을 좌우한댔어.’
마침 자다 깬 레오니는 시클라인이 주는 키 크는 약인 코코 시럽을 받아서 마시는 중이었다. 그녀는 종종 레오니의 건강 상태를 체크하러 들르곤 했다.
“뉴나다.”
“아가 마님, 오셨군요.”
“안녕, 두 사람. 레오니, 어젯밤에 시럽 안 먹고 잤어?”
“웅. 까먹구 그냥 코 해 버렷떠.”
“하루 정도는 까먹어도 괜찮아요, 도련님.”
“안대, 안대.”
시클라인이 그렇게 말해 주었지만, 레오니가 폴짝 침대에서 내려와 까치발을 들며 루시엘과 자기 키를 비교했다.
“내가 요따만큼 더 커져따. 그쵸? 바바요!”
레오니가 시클라인에게 대답을 재촉하더니 기린 인형을 끌고 왔다.
레오니의 키는 그사이 정말 자란 모양이었다. 지난번보다 키가 2센티쯤 자랐다. 반면에 루시엘은 그대로였다.
“루씨에 뉴나는 약 안 먹어꾸나.”
승리감에 도취한 레오니가 씩 웃었다. 빵빵한 볼살을 씰룩이며 입매를 올리는 게 벌써부터 꼬마 악당 같았다.
‘기분 좋은 걸 보니 두 분이 떠나신 이야기는 아직 못 들은 모양이네. 사샤가 전해 주는 것보단 내가 말하는 게 나을 거야.’
“시클라인 선생님, 밖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우린 할 이야기가 있지요?”
“네. 도련님, 그럼 불편한 곳 없으면 다음에 만나요.”
시클라인은 알아들었다는 듯한 눈빛을 보내며 레오니에게 인사하고는 방을 나갔다.
루시엘은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아무 말 없이 부모님이 멀리 갔다는 걸 알면, 마음이 다칠지도 모르니까.
“레오니. 오늘 아버지, 어머니 두 분이 북부로 멀리 정찰 가셨어. 지난번에도 금방 오셨으니까 이번에도 아마 그럴 거야.”
“우웅. 레오니 아라.”
“어떻게?”
“웅. 아까 엄마가 나 자눈 거 살짝 보구 가셔떠.”
루시엘은 안심이 되었다. 레오니가 걱정하지 않게 보고 가신 모양이었다.
“그랬구나. 그동안 레오니는 평소처럼 선생님 말 잘 듣고 재밌게 놀면 돼. 누나랑 맛있는 것도 먹자.”
“녜!”
어른처럼 말하니 레오니가 습관처럼 존댓말로 대답하며 고갤 끄덕였다.
“자, 그리고 이건 선물.”
루시엘이 딸기 가방에서 까만색 토끼 인형을 꺼내 내밀었다. 목에는 앙증맞은 빨간색 리본 타이가 매여 있고 복슬복슬한 털이 몹시도 부드러웠다.
“레오니랑 같이 잘 침대 친구야. 이름은 베니.”
“베니?”
“밤에 혼자 자도 안 무섭게 베니가 지켜 줄 거야.”
레오니는 석류알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베니를 자그만 품에 꼬옥 끌어안았다.
“우웅, 베니이. 다시 코 자자.”
아직 이른 시간이라 졸렸는지 종알거리던 레오니가 다시 곤히 잠들었다. 색색 편안한 숨소리에 루시엘은 웃으면서 사뿐사뿐 걸음을 옮겨 나갔다.
동관의 응접실로 내려가니, 시클라인이 에바, 사샤와 함께 담소를 나누며 루시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오니에게 두 분의 정찰 소식을 알려 주고 토끼 인형을 줬더니 다시 잠들었어요.”
“잘하셨어요, 아가 마님. 사샤의 수고를 덜어 주셨네요.”
에바의 말에 사샤가 반색하며 감사의 표시로 스커트 자락을 들어 올렸다.
루시엘은 얘기를 나눌 겸 시클라인과 함께 산책길을 걷기로 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곧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시클라인 선생님, 시험 접수는 잘 했어요?”
사실은 공부가 잘되고 있냐고 물어볼까 하다가 부담이 될까 봐 돌려서 말했다.
“시험 접수는 했는데…….”
시클라인의 표정이 다소 어두웠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얼굴이었다.
“왜요?”
“알고 보니 이번 시험은 특별 실기까지 있더라고요. 필기는 자신이 있는데, 실기가 걱정이에요.”
“실기라면…….”
루시엘이 눈을 끔벅이자 시클라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제시된 재료를 두 가지 이상 배합해 완전히 새로운 효능의 약을 개발하는 것이 이번 실기 시험 문제라고 해요.”
“잠깐만요. 그렇게 어려운 걸 시험으로 낸다고요?”
시클라인이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건 아주 오랫동안 약 개발에 대해 연구해 온 사람만이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에요. 저는 가망이 없어요.”
루시엘은 입술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약을 개발하는 건 단기간에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재료의 상성을 정확히 알아야 했고, 그 비율이나 들어가는 재료를 알아내는 것에도 많은 시간과 공이 들었다.
게다가 그 안전성을 시험해 입증하기까지는 더더욱 많은 시간이 걸린다.
“오랜 경험이 있더라도 해당 재료를 미리 알고서 능숙히 다루던 사람이 아니라면…… 그 시험에 통과할 사람이 있을까요?”
“아, 다행히도 재료는 미리 제시되었는데, 그래도 시간이 없긴 마찬가지예요. 재료들을 가지고 효능이 있는지 없는지 전부 실험해 볼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까요.”
“어디 볼까요?”
시클라인이 받아 온 안내서를 펼쳐 보여 주었다.
빼곡하게 적힌 서른 가지의 재료가 있었는데, 낯선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그중 익숙한 재료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타테아, 루가나무 잎, 티에리 열매’였다. 루시엘의 온실 정원에 심어진 바로 그 재료들.
‘엇, 이 재료들은…… 마나 영양제의 재료잖아!’
어차피 이번 시험에서 안정성까지 확보하는 건 기대하지 않을 터. 그 효능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 증명하면 될 것이다.
루시엘이 희망에 찬 얼굴로 시클라인의 손을 잡았다.
“시클라인 선생님은 약을 몇 번 만들어 보셨잖아요. 코코 시럽도, 감기약도, 파스도요. 그러니 제가 레시피를 하나 알려 드릴게요. 하지만 그 약의 효능을 끌어내는 건 선생님의 몫이에요.”
“레시피요?”
“네, 제가 오랫동안 부탁드리고 싶었던 일이에요. 바로 마나 영양제를 만드는 거예요.”
“마나…… 영양제라고요?”
시클라인이 놀라서 물었다.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마나의 불안정을 해결할 방법이기도 해요. 이 영양제를 완성하게 되면, 시클라인은 엄청 유명해질지도 몰라요!”
“그런…… 그런 엄청난 약은 어떻게 알고 계시는.”
시클라인의 눈동자가 몹시 커졌지만 루시엘은 그녀에게 회귀했다는 사실까지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저 옅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건 알려 줄 수 없어요. 미안해요.”
약간 답답했지만 무언가 사연이 있으리라 짐작하면서 시클라인이 물었다.
“그럼 이 대단한 방법을 왜 하필 제게 왜 알려 주시는 거예요?”
“……전 시클라인을 믿으니까요.”
‘그거야 미래의 시클라인이 만든 거니까요.’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루시엘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쩌면 이 일로 황성이나 다른 곳에서 그녀를 데려가려고 눈독 들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마나 영양제는 완성이 되니까.
‘하지만 작은 약속 하나쯤은 받아도 되겠지?’
“시클라인 선생님, 그 약이 완성되면 제게 가장 먼저 주실 수 있을까요? 그 이후엔 다른 조건 좋은 곳으로 가셔도 좋아요. 선생님이 어딜 가든 약제사라는 꿈을 펼칠 수 있게요. 하지만 되도록 황성은 안 가시면 좋겠어요.”
루시엘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시클라인이 대답했다.
“아뇨, 저는 더 좋은 조건이 온다고 하더라도 벨슈타인의 약제사가 될 거예요. 제게 약제사에 도전해 볼 마음을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아가 마님이니까요. 무엇보다 벨슈타인 영지 사람들은 제가 필요하니까요.”
시클라인이 루시엘의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
루시엘은 어쩐지 가슴 속이 감동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녀의 마음이 느껴져 금방이라도 보석을 만들 것 같았다.
“레시피는 바로 적어서 보내 줄게요. 어서 연구하러 가 보세요. 재료도 마침 온실에 준비가 다 되어 있으니까요.”
“네! 저 지금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요. 재료를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사용해야 적절한지, 비율은 어떻게 섞어야 하는지 여러 방법이 떠올라서요. 가 볼게요!”
“네, 꼭 성공하면 좋겠어요.”
루시엘은 총총 사라지는 그녀를 응원해 주며 뿌듯하게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 * *
한여름에 가까운 계절임에도 기후 마법으로 온도가 조절되는 영지를 벗어나면, 살을 에는 추위가 외투와 갑옷 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래도 설원과 가장 가까운 이동진으로 이동한 덕에 병참까지는 단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략실로 꾸민 막사로 공작과 공작 부인, 검은 날개의 기사단장과 마법단장, 그 아래 부대장들까지 모여 의논이 시작되었다.
자르가가 고했다.
“문라켕은 야행성 마물이 아닙니까. 저녁나절까지는 체력을 회복하다가 움직여야 놈들과 마주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준비가 되는 대로 최대한 낮에 접근하는 게 좋아. 자르가 단장 말대로 야행성이니, 낮에는 활동을 하지 않으니까.”
“기습 작전입니까? 하지만 놈들의 소굴을 모르지 않습니까.”
마법단장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음…… 늦게 밝혀서 미안하지만 나는 그동안 그냥 떠나 있던 것이 아니야. 나도 자유 연합 토벌 길드에서 문라켕 소탕을 맡았던 적이 있네. 그래서 놈들에 대해선 잘 알고 있고. 그때 미처 소탕하지 못한 놈이 있다는 것에도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
“……예에?”
그녀가 실력 있는 검사라는 건 알려졌으나, 토벌대의 일원이라는 건 벨슈타인 내 가족들과 최측근만 아는 사실이었다.
일순 기사단 일부가 놀라자 공작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실이다. 이번 문라켕 토벌의 전략은 그녀의 지휘를 전적으로 따른다.”
“예, 각하.”
남편의 지지와 지휘권을 넘겨받은 솔리아페의 푸른 눈이 총총 빛났다. 이내 모두가 솔리아페의 말에 경청했다.
갑주를 걸친 그녀는 공작 부인일 때와는 다르게 강인한 눈빛과 의지로 무장한 채였다.
“……문라켕의 소굴은 피네 설원 가장 깊은 골짜기 너머까지 가야 해. 놈들은 그곳에 있는 소금 동굴 근처에 포진해 있어.”
“과거에도 그 소굴을 소탕했다면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요.”
자르가의 지적에 솔리아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놈들은 본능적으로 그 소금 동굴을 못 벗어나.”
“……어째서입니까?”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인 엄청난 마력이 소금에 응축되어 있는데, 문라켕은 오랜 시간 그 소금을 먹으면서 진화하고 성장했거든. 거길 지키려고 안 떠나는 거야.”
“그런 정보는 어디에서 알게 되신 겁니까.”
“이번에 희생당한 마커스. 그는 오랫동안 문라켕을 연구했어. 그의 가족이 전부 문라켕에게 당했거든.”
담담하게 대답한 솔리아페는 지도를 펼쳐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1차로 상대의 수를 파악하고, 2차로 이 지점에서 대기하다가 기습하면 된다. 놈들은 불에 약하니 화약과 불화살, 불 속성 마법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군.”
지휘 명령이 떨어지자 단장과 부단장들은 각기 군사에게 그것들을 전달하러 막사를 나갔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으나 어쩐지 지울 수 없는 서늘한 긴장감이 주위를 어른거렸다. 전투가 코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