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결국 류프델에게 가야만 하겠구나.”
길리아트 역시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강인한 그조차 씁쓸하게 말할 정도로 밤의 대장간은 위험한 마계에 있었다.
루시엘은 자신의 보석 때문이니 당연히 가려고 할 터였다. 가만 생각한 길리아트가 한 가지를 떠올렸다.
아르제온. 그놈 역시도 류프델과 인연이 깊을 터였다.
“루시엘, 아르제온도 류프델을 알고 있을 거란다.”
“정말요?”
“그가 있다면 불필요한 위험에 빠지지 않고, 그나마 안전하게 마계에 다녀올 수 있다는 이야기지.”
“……!”
안 그래도 할아버지 눈치를 보면서 자신도 함께 가겠다고 하려던 루시엘에게도 반가운 이야기였다.
루시엘은 하는 수 없이 그간의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설원에서 루이비드가 눈사슴으로 변신한 아르제온을 데려온 것부터, 루시엘의 아기 영지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 아르제온의 봉인 이야기까지.
“……봉인을 풀어야 하는 사정이 있었나.”
아르제온의 일을 걱정하는가 싶던 길리아트의 눈썹은 이내 대노하여 사납게 휘고 말았다.
“그래도 그렇지 곱씹을수록 괘씸하고 음흉한 놈이구나. 우리 루시엘 곁에 남으려고 모두에게 사기를 쳐? 고얀! 내 그놈을 당장 내 손으로!!”
“앗. 할아버지, 진정하세요.”
루시엘이 그를 말리며 팔을 붙잡았다.
“의도가 아주 불순한 놈이라니까.”
더군다나 아르제온이 행방불명된 후로, 부탑주였던 길리아트가 마탑주 노릇까지 하고 있었으니. 쌓인 것이 많았던 그는 뿌득 이를 갈았다.
루시엘은 그가 했던 ‘놀고먹는 게 좋아서’라는 말까지는 전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할아버지도 같이 가셔서 그를 설득해 주세요. 저 혼자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어요.”
길리아트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득할 필요가 있겠니? 그 팔찌가 있으면 아르제온은 꼼짝 못 하지 않겠느냐.”
그의 붉은 눈이 실로 오랜만에 빛났다.
그렇게 아기 영지에 이동한 루시엘과 길리아트는 가장 먼저 아르제온부터 붙잡아 두기로 했다.
“……이놈, 아르제온. 그동안 귀여운 사슴인 양 여기 숨어 지냈단 말이지?”
“…….”
“네 놈이 진즉 양심 없는 위인인 건 알았다만 아주 뒤통수를 제대로 후려치는구나.”
길리아트가 눈사슴 아르제온을 가늘게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에도 아르제온은 변신을 풀지 않고 까만 눈망울로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길리아트는 왠지 진짜 사슴에게 말하는 바보가 된 것 같아서 루시엘을 힐끔 보았다.
“루시엘, 이놈이 정말 아르제온이냐? 마력을 어찌나 단단히 숨겼는지…….”
정말 겉보기로는 평범한 눈사슴처럼 보였다.
“아르제온, 미안. 길리아트 할아버지께 정체를 밝혔어. 그러니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
“좋은 말로 할 때, 응?”
루시엘이 팔찌를 끼자마자, 아르제온은 스르륵 제 모습을 드러냈다. 샐쭉한 얼굴이 루시엘을 원망하고 있었다.
“배신자. 너무하는군.”
“……어, 어쩔 수 없었어.”
“그럼 언제까지 숨길 작정이었더냐?”
파삭!
파아앗!
아르제온이 풀어놓은 강력한 마력의 기운에 맞서기 위해 길리아트도 곧바로 마력을 풀었다.
얼음과 나무의 기운이 맞부딪치며, 주변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강력한 두 마법사의 기운이 대립하자 루시엘은 몸을 바르르 떨면서 말렸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그만 서로 경계를 풀어요.”
적대적으로 대치한 것은 아니지만, 누가 먼저 공격 마법을 시전해도 이상하지 않을 위태로움이 느껴졌다.
아르제온이 잔뜩 날 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루시엘은 길리아트 할아버지의 팔부터 흔들었다.
“할아버지, 먼저 그만두세요.”
“……저놈이 먼저 시작했다, 루시엘. 경계는 저놈이 먼저 풀어야 한다.”
“할아버지, 우리는 아르제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걸요.”
루시엘은 이번에는 아르제온에게 한 발 다가가서 호소하듯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
“말했잖나. 지금은 안식 중이라고.”
아르제온이 다시 느른하게 대답하자, 길리아트가 비꼬았다.
“얼어 죽을?”
“저 영감탱이를 도우라면 더 싫은데.”
“뭐,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루시엘은 동요하지 않고, 아르제온에게 한 발 다가오며 물었다.
“아르제온, 류프델을 알고 있어?”
“심보 고약한 무기 제작자 난쟁이 말인가.”
“응. 아는구나. 아 혹시…… 이 팔찌를 만든 게 그자야?”
아르제온이 슬쩍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그건 다른 자다. 류프델은 왜 묻나?”
“미안하지만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야. 우릴 류프델에게 안내해 주어야겠어. 안 그러면 나 이 팔찌 평생 끼고 다닐 거야.”
루시엘이 이내 팔찌를 흔들며 말했다. 일그러지는 아르제온의 표정을 보면서 길리아트가 매우 고소하다는 듯 말했다.
“우리 손주 며늘아기, 잘한다!”
기어이 두 사람은 아르제온에게서 원하는 답을 들었다.
아르제온은 밤의 대장간 입구로 이동이 가능한 포탈석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 밤 달이 뜨면 이동한다.”
아르제온의 말에 루시엘과 길리아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매월 정기적으로 열리는 황실의 만찬이었지만 오늘은 이례적으로 특별한 손님이 끼어 있었다.
타이라 제국과 강줄기 하나를 끼고 동부 지역 국경과 맞닿아 있는 메이너드 왕국의 알프레도 왕세자였다.
왕세자는 클로디아 황녀에게 푹 빠진 모양인지 귀환 일정을 며칠이나 미룬 상태였다.
상석에 앉은 황제 노이슈반은 맞은편에 있는 클로디아 황녀와 알프레도 왕세자를 보면서 흐뭇한 눈빛을 보냈다.
알프레도 왕세자는 클로디아를 위해 귀한 선물들을 풀어놓으면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노래하는 앵무새와 주먹만 한 크기의 블루 다이아몬드가 줄줄이 박힌 왕관, 색이 바뀌는 마법 비단까지.
“황녀님, 저것 좀 보십시오.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네, 뭐.”
메이너드에서 귀하다는 물건은 모두 가져온 모양이었지만 그중에 클로디아 마음에 드는 건 단 하나도 없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왕세자가 우리 클로디아 황녀에게 정성이 지극하구나. 하나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클로디아는 우리 타이라 제국의 제일가는 보물이니 말이다.”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황녀님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왕세자는 얼굴을 붉힌 채 클로디아를 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미모에 대한 칭찬뿐이라니. 그 역시 겉은 번지르르하게 생기긴 했으나 정작 알맹이는 없어 보였다.
클로디아는 그와 같이 있으면 실로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아, 황실의 체면을 생각해 접시 위의 스테이크에만 집중했다.
그때 잠자코 있던 레이놀드가 클로디아에게 권했다.
“그렇지. 누이, 황성의 오솔길이 제법 걸을 만하니, 식사 후에 알프레도에게 길을 알려 주면 어떨까.”
레이놀드가 레어 상태의 고기를 나이프로 자르면서 말했다. 그러자 알프레도가 환하게 웃었다.
“핫, 레이놀드. 정말 좋은 생각이로군. 나도 마침 산책을 하고 싶었는데. 황녀님, 저에게 시간을 내어주시면 기쁠 것입니다.”
그리 말하는 알프레도는 식사 중이 아니었다면, 클로디아의 손등에 입이라도 맞출 기세였다.
클로디아는 입맛이 다 떨어진 듯 냅킨으로 입을 닦아 낸 후 대답했다.
“역사학 수업이 있어 그건 안 될 것 같은데요.”
“수업 하루쯤은 빠지셔도 괜찮지 않으신지요? 아니면 수업이 끝나고 난 후에 가셔도 될 듯합니다.”
알프레도의 말에 내내 말이 없던 황후가 웃으며 말했다.
“왕세자는 참으로 적극적이기도 하지. 일정이 있는 동안 계속 같이 시간을 보냈으니 잠시 개인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겠소.”
“황녀님과 만날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 안타까워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다음에는 메이너드에 정식으로 초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말만 안 했다뿐이지, 대놓고 청혼하겠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공식 청혼을 입에 담기도 전에 제 나라로 초대라니, 너무 섣부른 일이었다.
“아직 아무런 이야기도 오가지 않았는데, 클로디아를 초청이라니 단순히 친교를 위한 것이라면 허락하겠지만 다른 뜻이 있다면 너무 성급한 결정이라고 생각되오.”
청혼도 하지 않고 황녀를 초청하는 일을 황후가 점잖게 나무라는 말이었다.
그녀 역시 클로디아에게 좋은 짝이 나타난다면 결혼을 말리지는 않겠지만, 눈앞의 청년은 국혼을 너무 쉽게 보는 듯하여 다소 불쾌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에 황제도 황후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아직 어떤 말이나 서면도 오가지 않은 상황이니 자중하게.”
그러자 왕세자는 황자와 눈빛을 주고받은 다음 결연해진 눈으로 말했다.
“저는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고 왔습니다. 곧 정식으로 청혼서를 준비해 보내겠습니다. 메이플 영지의 소유권, 더불어 무카스 교역권과 함께요.”
황제와 황후는 물론이고 클로디아마저 몹시 놀라 눈동자가 흔들렸다.
메이플 영지는 메이너드 왕국의 토지 중에서도 비옥하기로 소문난 알짜배기 땅 중 하나였고 그 규모도 매우 컸다.
그런 메이플을 내어주고 더불어 무카스 교역권까지 주겠다니. 메이너드의 입장으로서는 아주 많이 양보한 것이었다.
무카스는 메이너드에만 자생하는 찻잎으로 우울증을 치료하는 효과가 탁월해, 과거 전쟁의 기억으로 고통을 앓던 사람들의 자살률을 절반까지 낮추었다.
많은 나라에서 무카스를 원했지만 그간 메이너드는 아무에게도 교역권을 넘겨준 적이 없었다.
국가 간의 청혼은 서면으로 받은 후에 대신들과의 회의와 황제 황후의 결정, 최종적으로 당사자의 의사에 따라 그 대답을 정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메이너드가 내놓은 강력한 두 개의 카드가 있으니, 국익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클로디아라도 결혼이 싫다고 마냥 떼를 쓸 수 없는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