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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13)화 (113/282)

<113화>

활짝 개방된 하늘은 그저 까맣고 칠흑 같던 평소의 빛깔이 아니었다. 푸른색과 보라색, 이따금 분홍색을 머금은 하늘이었다.

바람은 길을 찾지 못하고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며 뺨을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달콤하고 촉촉한 밤공기에 괜히 마음이 더 들뜨는 것 같았다.

하늘을 수놓은 별들은 총총, 보석이 박힌 것처럼 제자리에서 각기 빛을 뽐냈다.

여길 봐 줘, 하는 것처럼.

“키제프, 나 내려 줘.”

그의 목을 감았던 손을 풀며 루시엘이 재촉했다. 키제프가 루시엘을 바닥에 내려 주었다.

“와……. 그냥 봐도 예뻐.”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큼 아름다운 풍경에 루시엘이 고개를 완전히 젖혀, 오랫동안 하늘을 보았다.

저러다 또 넘어질라.

키제프는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뒤에서 루시엘의 몸을 붙잡아 주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루시엘이 별을 조금 더 편하게 봤으면 좋겠다는.

‘이를테면 푹신한 소파나 침대가 있었으면.’

키제프가 돌아다니며 주변을 둘러보자, 망원경 옆 작은 테이블이 보였다. 그 위로 놓인 동그란 유리 케이스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그건 장난감처럼 보이는 자그만 가구들이었다. 연보라색의 침대와 긴 소파, 그네와 식탁, 책상까지.

그제야 이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벨슈타인의 창고에서 가져온 미니 사이즈 가구들.

축소 마법이 걸려서 좁은 공간에서 보관하기 좋게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루시엘. 이것 좀 봐.”

“응? 왜?”

키제프가 부르자 루시엘이 고개를 돌렸다. 마음 같아선 포르르 달려가고 싶지만, 다리 때문에 쉬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저 별…… 누워서 볼래, 앉아서 볼래? 여기 축소 마법이 걸린 가구가 있거든.”

“진짜?”

키제프가 자그만 소파와 침대를 가져와서 루시엘에게 보여 주었다.

“내 래빗 성에 있는 거랑 크기가 비슷해. 예쁘고 귀여워.”

“뭘 크게 만들지 네가 골라 봐.”

“음…….”

루시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문대 공간은 그리 넓지 않고 망원경들도 있어서 하나의 가구만 펼쳐야 할 듯했다.

둘 다 좋지만 역시 침대가 편안할 것 같았다.

“이걸로. 누워서 보면 정말 근사할 거 같아.”

루시엘이 활짝 웃으면서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럼 침대로 한다?”

“응! 근데 마법은 정말 편리한 거 같아. 이렇게도 활용하는구나.”

“대신 무척 고가에다 구하기도 어렵지. 유지하려면 마력석이 필요하고.”

루시엘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앗, 역시 마력도, 부유함도 갖춘 벨슈타인이라서 가능한 거지?”

키제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를 바닥에 놓고는 루시엘을 부축해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곤 유리 케이스 안에 있는 빨간색 버튼을 꾹 누르자 순식간에 푹신하고 편안한 2인용 침대가 되었다.

베드가 연보라색 구름 모양으로 되어 있고, 베개도, 이불도 푹신푹신한 완벽한 침대였다.

루시엘은 두근거리며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앉았다. 이제 아픈 다리를 신경 쓰지 않고 별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엄청 푹신해! 마시멜로처럼.”

루시엘이 키제프의 손을 끌자, 그도 신발을 벗고 침대 위에 앉았다.

“별이 보이는 침실이라니 너무 로맨틱해.”

또로롱, 또롱!

루시엘이 중얼거리며 에메랄드며, 페리도트를 만들었다. 해맑게 웃으며 방방 뜨는 모습이 귀여워 키제프는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누워서 별 봐 봐.”

“응.”

루시엘이 장난스럽게 침대로 폭 쓰러졌다. 그렇게 해도 부드럽고 푹신하기만 해서 타격이 없었다.

키제프도 따라서 누웠다.

그러자 별이 아까보다 수백 배는 더 잘 보이는 것 같았다. 아니, 온 하늘의 별들이 여길 중심으로 빛나는 듯했다.

반짝반짝.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이 부린 마술에 둘은 말없이 그렇게 한참 있었다.

‘오래도록 이 행복을 지키고 싶어. 아름다운 벨슈타인의 하늘이 무너지지 않게.’

루시엘이 별을 보며 행복함에 중얼거렸다.

“별 보러 오길 잘했다.”

“……응.”

“또 오자.”

“그래. 꼭 나랑 와.”

키제프가 그렇게 덧붙이면서 루시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루시엘이 별을 보는 동안 키제프는 다른 별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조금 타올랐지만 루시엘은 키제프도 별을 보고 감탄하는구나 여겼다.

루시엘이 제 말에 대답이 없자, 그가 다시금 속삭였다.

“다음에 오면 해 줄 말이 생각났으니까, 다시 오자.”

“해 줄 말? 그게 뭔데?”

“아직은 몰라도 돼.”

키제프가 눈을 감은 채 다가와선 루시엘의 앞머리에 쪽 입을 맞췄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은 루시엘은 부끄러워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키제프의 손길에 의해 가로막혔다.

“……!”

“그냥 누워 있어.”

그러자 분홍색의 반짝이는 스피넬이 허공에서 툭툭, 침대로 떨어졌다.

“이 보석은 자주 생기는 거 같진 않은데.”

키제프가 스피넬을 살피면서 묻자 루시엘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루시엘이 키제프로 인해 두근거릴 때마다 스피넬이 생성되고 있던 터였다. 이 감정은 분명 처음 느끼는 것이었다.

과거의 황태자를 믿었던 순간에도 느낀 적이 없었던 감정.

아마도 이건 설렘.

“발목은 아직 아프지?”

“응.”

키제프가 일어나서 루시엘의 발을 다시 살펴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힐(Heal)!”

파앗,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간 투명한 빛이 루시엘의 발목을 어루만지듯 닿았다.

“어둠 속성이라 내 힐은 미약하지만…….”

“아냐. 확실히 덜 아픈 거 같아.”

루시엘이 덜 아프다는 말에 키제프의 예쁜 눈꼬리가 다시 한번 접혔다.

지난번 클로디아에게 말했듯 키제프가 폭신폭신 카스테라 같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더없이 상냥해서 그가 손을 내밀면 언제나 잡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는 언제나 마음의 위로가 되어 주었다.

다리 때문에 결국 망원경으로 천체 관측까지는 못 했지만, 나중에 또 생각날 것 같은 밤이었다.

별 구경을 마치고 별궁으로 이동했을 때는 뜻밖에도 꼬마 손님이 와 있었다.

응접실 카펫 위에 장난감을 늘어놓고 놀고 있는 익숙한 뒷모습. 밤톨을 깎아 놓은 듯한 동그란 뒤통수가 휙 뒤를 돌았다.

“뉴나! 형아! 나 재워조.”

사샤와 베시, 로즈가 기겁했고 로즈가 방긋 웃으며 얼른 레오니를 다시 달랬다.

“우리 점잖은 레오니 도련님. 얼굴 보면 돌아가신다고 했었지요?”

“……아니, 언제??”

레오니가 움찔했지만, 고집스레 루시엘에게 오더니 폭 안겼다.

“나 요즘 잠 안 오눈 병 생겨써. 루씨에 뉴나가 동화책 읽어 주면 잘 잔단 말이야…….”

찰싹 달라붙은 아이가 울상이 되자, 루시엘이 어깨를 토닥였다.

“정말? 그럼 누나가 책 읽어 줄…….”

“레오니, 오늘은 형이 재워 줄게. 가자. 루시엘, 너는 편히 자도록 해.”

키제프가 레오니의 손을 잡고는 이 층에 있는 제 침실을 가리켰다. 그러나 레오니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키제프의 손을 툭 놓았다.

“레오니?”

“아니, 아니. 나 뉴나랑 잘래…….”

레오니가 석류알 같은 눈동자를 굴리며, 형의 눈치를 살폈다. 키제프는 팔짱을 낀 채 잠자코 있었지만 편치 않은 기색임은 분명했다.

“내가 가끔 재워 주곤 했었어. 천둥 치는 날에도. 레오니, 이리 와.”

“웅!”

루시엘이 웃으면서 부르자 레오니가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쭐레쭐레 다가갔다.

레오니는 루시엘의 손을 잡고는 형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았다.

뭔가 묘하게 루시엘을 빼앗긴 기분이 드는 키제프였다.

이다음에 레오니가 조금 더 크면 단단히 일러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키제프는 밤새 뒤척이다 잠들었다.

* * *

불면증이라더니 레오니는 동화책 한 페이지를 다 읽어 주기도 전에 새근거리며 잠들었고, 다음 날 아침 사샤가 이른 시간부터 데려갔다.

루시엘은 시클라인의 시험 접수장을 방문해 응원도 하고, 온실 정원과 아기 영지로 나가 여러 일을 살핀 후 돌아왔다.

정오에는 벨슈타인 공작가로 마차 한 대가 도착했다. 길리아트의 요청으로 보석 세공사 테즈 남작이 방문했던 터였다. 루시엘도 그 자리에 함께했다.

호호백발 노인인 남작은 걸어 다니는 것도 바들바들 떨었다.

“앗, 조심하세요. 남작님.”

“어린 아가 마님이 상냥하기도 하시지. 저는 괜찮습니다.”

검은색 벨벳 천 위에 놓인 루시엘의 보석을 돋보기로 이리저리 살피던 그의 동공이 무척 흔들렸다.

“……호오, 자칫 평범한 보석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군요. 보석의 강도와 탄성, 품질도 최상급을 넘어선 명품에 가깝습니다. 게다가 이런 커팅 방식은……. 사람의 손길로 세공한 것이 아니군요. 70년 동안 보석을 만져 오면서, 이렇듯 진귀한 것은 처음 봅니다.”

그는 재차 감탄을 연발하며 보석을 테이블에 도로 올려놓았다.

길리아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바로 보았네. 자네 말대로 이 보석들은 아주 특별하고 귀한 물건일세.”

“이 물건들이 보석으로서의 가치를 발하기 위해서라면 더는 세공하실 필요가 없습니다만…… 다른 용도로 쓰실 계획이신 것이지요?”

길리아트와 루시엘이 서로 마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 지팡이에 세공하고 싶어요.”

“보석에 담긴 특별한 힘을 지팡이에서 그대로 쓸 수 있게 말일세.”

루시엘은 그 즉시, 자신의 지팡이를 소환해서 보여 주었다. 그러나 테즈 남작이 말했다.

“원하시는 대로 지팡이에 보석을 세공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그 안에 담긴 힘이 그대로 발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무기 제작가가 아니라 그저 보석 세공사일 뿐이니 말이지요.”

루시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한 가지 테스트를 하고 싶었다.

홈을 만들지 않고 그냥 보석을 장식하듯 세공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호기심이었다.

“그럼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다른 물건에 이 보석을 세공해 주실 수 있나요?”

“예, 물건과 보석을 주시면 가능하겠습니다.”

루시엘은 에메랄드와 솔리아페가 주었던 호신용 단검을 내밀었다.

“적어도 삼 일 정도 걸릴 것이옵니다.”

테즈 남작의 마차가 곧 떠났고, 그로부터 정확히 삼 일 후 맡겼던 단검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에메랄드가 예쁘게 장식된 검은 보기에는 무척 아름다웠다.

그 검을 가지고 루시엘은 에리카, 길리아트와 함께 아기 영지의 연구소로 가서 측정을 해 보았다.

결과는 반은 성공, 반은 실패였다.

본래 보석이 가지고 있는 마력과 바람의 힘을 검이 머금기는 했으나, 그 힘을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하고 일부만 발했다.

“루시엘, 이것만으로도 강력한 무기가 되겠지만 여러모로 아쉬운 결과구나.”

길리아트의 말에 루시엘도 동의했다.

“네, 할아버지. 그럼 역시 남은 방법은…… 류프델을 찾아가는 것 하나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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