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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15)화 (115/282)

<115화>

저녁놀이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방 안을 붉게 만들었다.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걸 보면서 루시엘은 어서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조금 긴장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기대감이 더 컸다.

‘어서 가서 지팡이에 보석을 세공할 해답을 찾고 싶어.’

지팡이를 둥실둥실 허공에 떠오르게 해 놓은 루시엘은 마나 방울을 만들면서 장난을 하고 있었다. 초조함을 지우고 싶어서였다.

“아가 마님 앞으로 서신이 잔뜩 왔어요.”

서신이 얼마나 많은지 로즈는 바구니에 담아서 가져다주었다.

창문을 통해 우편 마차가 다녀가는 모습을 보긴 했는데, 제 앞으로 이렇게 많은 서신이 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려 스무 통이 넘게 오다니. 그러나 대부분 루시엘과 개인적인 친분이 없는 영애들이 보낸 것들이었다.

차 모임부터 시작해 연주회와 오페라 관람 모임, 각종 파티 초청장이었다.

“이제 여름 시즌이 한창이라 그런 듯해요, 아가 마님. 사교계는 봄과 여름 시즌이 가장 활발하게 교류하고 파티도 많으니까요.”

“그렇구나.”

“그동안 아가 마님의 존재는 베일에 싸여 계셨는데 이번 피로연을 통해서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셨으니 초청장이 쏟아지는 거예요.”

하지만 벨슈타인 공작 부인이었던 솔리아페는 최소한의 모임에만 참석했었다.

그녀도, 벨슈타인도 파티를 좋아하지 않는 성향을 가졌던 터였다. 그러나 로즈는 굳이 뒷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보통의 소녀들은 파티를 동경하니까.

아직 어린 루시엘이 괜히 눈치를 보며 얌전히 지낼 수도 있던 터였다. 무엇보다 루시엘의 귀여움과 예쁨을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면도 있었다.

‘결혼식으로 내 존재가 많이 알려진 모양이야.’

벨슈타인가의 일원으로. 왠지 그건 기분이 무척 좋은 일이었다.

다만 루시엘은 아직은 사교 연회보다 중요한 일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아가 마님과 친해지고 싶은 가문도, 영애도 많다는 방증이지요. 이러다가 추후 본격적으로 수도 사교계로 진출하시면, 역대 최고의 인기몰이를 하실지도 몰라요! 그때 저도 꼭 같이 데려가 주셔야 해요, 아가 마님.”

로즈가 부푼 볼을 붙잡으면서 설렌 얼굴로 중얼거렸다.

“에이, 설마. 수도에는 유명 인사들이 많은걸. 그치만 내가 어디를 가든 로즈와 베시는 함께할 거야.”

“저도 항상 아가 마님을 곁에서 모실게요!”

로즈가 루시엘을 꼭 끌어안으며 뺨을 비볐다.

바구니 속의 편지를 살피던 루시엘은 익숙한 이름을 발견했다.

마랑드 후작가의 다나, 튜렌 백작가의 마샤. 루시엘은 처음으로 사귄 친구들의 편지에 순수하게 차오르는 기쁨을 누르고 그걸 서랍장에 맨 위에 두었다.

‘친구들의 편지는 다녀와서 혼자 있을 때 조용히 정독해서 읽어야지.’

그나저나 오늘 밤의 부재는 모두에게 무슨 핑계를 댈까 루시엘이 고민했다.

이번에도 별 구경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냥 솔직하게 할아버지랑 지팡이를 보완하러 간다고 해야지!

* * *

달이 차고 날이 어둑해졌다.

아기 영지에 비밀리에 모인 세 사람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비록 사이는 안 좋을지라도 오늘만큼은 두 사람이 같은 마음인 듯해 루시엘도 안심이었다.

보랏빛이 감도는 포탈석을 꺼낸 아르제온이 미리 설명했다.

“밤의 대장간 내부가 아닌 입구까지 가는 포탈석이다. 내부는 류프델이 직접 열어 주는 포탈을 통해서만 갈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개가 문을 지키고 있겠군. 문지기 파수견 녀석.”

눈썹을 까딱 치켜올린 길리아트가 말했다.

“필요하다면 마법으로 제압을 해야 한다.”

둘의 심상치 않은 말에 루시엘이 물었다.

“……그렇게 위험한 마수인가요?”

“류프델의 심기를 거스르는 자에게는 위험하지. 주인의 기분에 따라서 태도가 달라진단다. 류프델과 안면이 없는 자들만 가면 보자마자 죽이려 들지……. 하지만 우리는 그와 인연이 깊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루시엘.”

길리아트는 그리 말하면서 루시엘의 머리 위로 보호 마법을 잔뜩 걸어 주었다.

“이제 출발해도 될까?”

아르제온의 물음에 길리아트도, 루시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텅그렁!

타아아.

보라색 포탈석을 땅에 떨어뜨려 깨뜨리자, 그 안에서 흘러나온 액체형의 포탈이 점차 범위를 넓혔다.

마치 젤리와도 같은 보라색 포탈 안으로 아르제온이 먼저 발을 넣었고 점차 그 안으로 흡수되듯이 들어갔다.

그동안 보아 왔던 이동진과는 다른 형태라, 살짝 긴장으로 얼굴이 굳은 루시엘을 보곤 길리아트가 안아 들었다.

“같이 가자, 루시엘.”

“고마워요, 할아버지.”

보라색 이동진 안에 푹 잠겨 들자, 귀가 먹먹해졌다.

그것도 잠시. 수초가 지나자 기포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낯선 공기가 닿는 곳으로 이동했다.

사위가 온통 새카만 밤이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칠흑 그 자체.

길리아트가 라이트 마법을 사용하자, 그제야 주변이 분간되었다.

루시엘은 입구를 찾아보려고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 대장간의 문은 어디에 있어요?”

“음, 그건 문지기인 파수견에게 통과 허락을 받으면 나타날 거란다.”

“아…….”

그때 컹컹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노란 눈을 빛내며 거대한 검은 개가 일행 앞에 달려왔다.

‘……집채만 한 개라고는 안 했잖아요.’

루시엘은 속으로 놀란 마음을 참으며, 동요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빛 마법이 없다면 눈동자 색밖에 보이지 않을 만큼 새카만 털을 가진 개였다. 파수견이 코를 벌름거리며 세 사람의 냄새를 킁킁 맡기 시작했다.

길게 쭉 찢어진 입에서는 침이 줄줄 흘렀고, 이빨은 단검이라고 해도 좋을 크기와 날카로움을 가지고 있었다.

파수견은 세 사람을 한 명 한 명, 빙글빙글 돌면서 아주 면밀하게 냄새를 맡았다. 방문자를 파악하는 모양이었다.

아르제온과 길리아트는 속으로 서로를 보며, 큰일 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통과되었을 텐데, 아무래도 오늘 류프델의 기분이 좋지 않거나 의심을 산 게 아닌가 싶었다.

아르제온은 금세 통과가 되었고, 길리아트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엔 내 차례야.’

길리아트의 품에서 내려진 루시엘을 본 파수견이 크르르 이를 드러냈다. 낯선 얼굴이라 그런 걸까?

루시엘이 입술을 잘근 깨물자 당황한 길리아트와 아르제온이 제압하기 위해, 지팡이를 꺼냈다.

그러나 루시엘은 파수견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루시엘, 위험하니 뒤로 물러나야……!”

“아뇨, 괜찮아요.”

어린 날에도 루시엘은 개에게 쫓겨 겁에 질려 달아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길이 가로막히자 루시엘은 큰 소리를 내며 막대기를 손에 쥐었다.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자 결국 개는 깨갱 하며 달아났었다. 그때 깨달았다. 짐승에게는 눈을 피하고, 등을 보여 도망가면 더 얕보인다는 것을.

‘스스로 약하다고 증명할 필요는 없어. 게다가 난 진짜 약하지 않으니까. 무섭지 않아.’

루시엘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양손을 펼쳤다. 제대로 냄새를 맡고 파악해 달라는 뜻으로…….

그러자 파수견이 루시엘을 빙글빙글 돌면서 냄새를 킁킁 맡았다. 루시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마나를 써 볼까? 내 마나는 피닉스도 좋아했으니까 도움이 될지도 몰라.’

예상은 적중했다. 루시엘의 마나를 느낀 파수견은 그야말로 한 마리의 강아지가 되었다.

냄새를 맡는 대신 혀로 할짝 핥는가 하면, 꼬리를 붕붕 돌리면서 루시엘이 만들어 준 커다란 마나 방울을 가지고 놀았다.

―컹!

몸을 낮춰 커다란 머리통을 들이밀자, 루시엘의 자그만 단풍잎 손이 쓰다듬었다.

“너 좀 귀엽다.”

―끼웅.

루시엘이 눈앞에서 그 난폭하던 파수견을 길들이는 모습을 보고, 아르제온과 길리아트는 순간 뭘 본 것인가 싶었다.

“요정의 마성이란…….”

아르제온이 흐린 눈으로 중얼거렸고, 길리아트도 놀라워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허허, 이게 가능한 일인가? 괴물 같던 놈이 덩치만 커다란 강아지가 되었군.”

길리아트는 이벨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루시엘, 저 아이는 본능적으로 모든 존재를 끌어당기는 특별한 마력을 가지고 있어요. 이걸 잘 쓰면 무기가 되겠고, 자칫 잘못하면 위험할 수도 있겠어요.’

그 말에는 길리아트도 동의했다. 잘 사용한다면 분명 이득이겠으나 남용하면, 루시엘에게 쓸데없는 놈들이 잔뜩 꼬일 수도 있다.

‘이놈도 그중에 하나고 말이지.’

그러더니 옆에 있는 아르제온을 못마땅한 눈으로 슥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그가 뚱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꼬맹이, 그만 놀아 주고 이만 가야 한다. 이럴 시간 없다.”

“그래, 루시엘. 이제 네 마나는 거두도록 하렴.”

“앗, 네. 알겠어요.”

루시엘은 깔끔하게 마나를 갈무리한 다음, 파수견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털이 거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안녕, 이제 우린 가 보아야 해.”

그러자 파수견이 앞발을 탁탁 내밀더니 머리는 물론이고, 등까지 몸을 낮추었다.

“엇? 아무래도 자기 등에 타라고 하는 것 같아요.”

“……!”

“이렇게 대접받고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구나.”

세 사람은 고개를 주억이면서 파수견의 너른 등에 올라탔다. 그제야 입구의 거대하고 푸른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게 마지막 포탈인 대장간의 문이구나.’

쿠우웅, 하고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파수견이 날랜 속도로 안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너무 빨라서 눈을 채 뜨지도 못할 것 같았다.

길리아트가 단단히 붙잡으라고 외쳤다.

깡깡깡!

모루 위에서 쇠를 두드리는 망치 소리,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 뜨거운 열기가 어둠 속에서도 느껴졌다.

활화산처럼 폭발할 듯 거대한 붉은색 폭풍이 몰아치는 화덕도 있었다.

그곳을 지나자 나무들이 거꾸로 자라는 푸른 개울과 수정이 가득한 동굴도 있었다.

물을 마시던 유니콘과 야광으로 빛을 발하는 온갖 나무와 식물, 벌레들이 어둠을 물들였다.

다리를 두 개쯤 건너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대장간으로 들어서자 자그만 류프델의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낮은 울타리를 펄쩍 뛰어넘으면서 작달막한 난쟁이 류프델이 튀어나왔다.

“망할 것, 대장간 문을 지키랬더니 남의 개가 되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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