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루시엘은 치마를 툭툭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엘링턴에게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어요.”
아직도 신기한지 유리의 빛깔을 살펴보던 막스가 감사를 표했다.
“루시엘 님 덕분에 더 품질 높은 유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기대할게요. 하지만 유리그릇이나 장식품 말고도 다른 물건으로 눈을 돌려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황후 폐하라면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진상한 온갖 유리공예품을 다 보았을 것이다. 이대로도 훌륭하지만 황후의 마음에 완벽하게 들기 위해서는 무언가 부족했다.
루시엘의 말을 귀 기울여 듣던 막스는 고개를 주억였다.
“고민은 해 보겠습니다만, 제가 늘 하던 것만 해 와서 다른 것은 잘 모릅니다…….”
그가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말은 그냥 만들던 물건만 계속 만들겠다는 뜻인가?
조심성이 너무 많으면 사람은 재능을 다 발휘하기 힘든 것 같았다.
새로운 도전에 시도할 수 없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물건들만 만들기엔 그의 재능이 아까웠다.
‘획기적인 무언가가 필요해.’
아무래도 루시엘이 다음 고민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장은 어떤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유리 공방에도 직접 와 보고, 네이플 해초의 비결도 알려 주었다. 왠지 뿌듯한 하루가 된 것 같았다.
‘힘들어.’
열 살 아이의 몸이라 그런지 이제 체력이 더 버티지 못함을 체감했다. 루시엘은 마차 안에서 금세 사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엘링턴은 마차 의자에 쓰러진 루시엘에게 담요를 덮어 주었다.
모든 것을 지켜보던 엘링턴은 이번에도 루시엘의 똑똑함을 눈으로 지켜보았다.
게다가 자연스럽게 네이플 해초의 비결까지 알려 줄 생각을 다 하다니.
‘루시엘 아가 마님이라면 벨슈타인이 미처 갖지 못한 것들, 잃어버린 것들을 하나씩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보석 같은 눈망울을 하고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루시엘의 존재가 놀랍고도 귀중했다.
루시엘이야말로 벨슈타인의 가장 귀한 보물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엘링턴은 기분 좋게 웃으며, 통신석을 꺼내 공작 각하께 보고를 드렸다.
전부 이야기를 전해 들은 공작은 유쾌한 웃음소리와 함께 또 새아가 자랑을 해 댔다.
―과연 우리 새아가는 천재로군.
* * *
엘링턴의 품에 안겨 고이 잠든 루시엘은 별궁의 침실로 옮겨졌다. 혹여라도 잠이 깰까 조심스러워하는 손길에 지켜보던 로즈와 베시가 그를 뒤따랐다.
안 보는 척 딴청을 부리면서도 키제프는 이 층에서 내려와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그의 어깨에는 부엉이 벨이 사뿐히 올라앉아 있었다.
“키제프 도련님.”
엘링턴이 키제프의 모습을 발견하곤, 꾸벅 고개를 숙였다.
“……루시엘이 돌아왔나?”
“예, 오늘은 이브나크까지 먼 길을 다녀오셨으니 곤히 주무실 겁니다.”
엘링턴의 보고에 키제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브나크라면 영지에서 마차를 타고도 두 시간이 넘을 텐데.”
“게이트를 타서 한 시간도 안 걸렸긴 합니다만, 멀긴 멀지요.”
“둘이 이브나크에 가서 왜 갔는데?”
“아, 그건 아직 비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비밀이라는 말에 키제프는 몹시 심기가 불편해졌다.
“비…… 밀이라고? 혹시 뭔가를 잊은 건 없어?”
“잊다니요.”
“아무리 계약이라지만 그 애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건…… 남편의 몫이잖나.”
차마 제 입으로 하기에 민망한 말이었으나 이미 나가 버린 말이었다. 엘링턴의 초록빛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키제프 도련님, 혹시 아가 마님과 제가 이브나크에 비밀로 다녀와서 질투하시는 겁니까?”
“누, 누가!”
“결코 놀러 간 것이 아닙니다. 질투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그리 말하면서도 엘링턴의 입가는 웃음을 참느라 씰룩거리고 있었다.
“아니라니까. 난 그저, 걱정이 돼서.”
“호위 기사를 대동한 외출이었고 각하의 허락도 받은 것이었습니다. 안전에 대한 문제는 하~나도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유들유들하게 말을 이어 가는 엘링턴의 태도에 키제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떤 사정 때문인지는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아가 마님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그래.”
왜인지 모르겠지만……. 루시엘이 온종일 엘링턴과 같이 사라졌다는 이야길 들었을 때부터, 그러니까 오늘 하루 계속 그랬던 것 같다.
엘링턴은 잘생기고 지적인 이미지인 데다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어린 영애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게다가 루시엘이 남편인 저보다 엘링턴과 더 친근하게 지내는 것 같아 괜히 샘이 나기도 했다.
확실히 사람과 거리를 두는 키제프보다는 그가 더 편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을 인정하자, 더욱 삐죽이 솟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도 제 신부인데.
“그렇군. 알았어. 엘링턴 말대로 시간이 늦었으니까.”
“예, 그럼 이만 쉬십시오.”
왠지 모르게 까칠해진 도련님의 눈빛을 받으면서 엘링턴은 슬금 물러갔다.
키제프는 응접실에 남아 있는 로즈와 베시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너희들도 이만 물러가. 랄프도 이만 물러가라고 전해 주고.”
“알겠습니다, 도련님.”
두 사람마저 별궁을 떠나자, 이제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공기가 주변을 갈랐다.
키제프는 조심스럽게 루시엘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른 숨소리를 내면서 잠든 루시엘은 침대에서 뒤척임 한 번 없이 얌전했다.
“되게 곤하게 자네.”
종일 뭘 하고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시엘이 무언가에 항상 열심히 매달려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키제프의 어깨에 있던 벨이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자그맣게 부엉, 하고 울었다. 키제프가 부엉이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네 주인은 요즘 바쁘대.”
서신을 주고받을 적에는 그래도 일상 이야기도 자주 나누었는데.
그가 공작성으로 귀환하니 이제는 그런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귀찮게 하는 일 없을 거야.’
‘약속했잖아. 서로 상관하지 않기로.’
이상한 말만 해 대고 말이다.
키제프의 눈이 묘하게 뾰족해지며 루시엘의 말을 곱씹었다.
성인이 될 때까지만 유지하는 결혼, 지금 루시엘은 매우 바쁘게 움직인다.
곰곰이 생각하던 키제프는 결론을 내렸다.
‘혹시 떠날 준비를 벌써부터 하는 중인가?’
손톱을 잘근잘근 씹던 키제프는 몹시 불안해졌다.
레이븐과의 사정으로 분명 결혼 생각이 없었고, 성인이 되면 각자 헤어지자고 한 것도 본인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어느새 슬쩍 접어 둔 채 키제프가 생각을 이어 갔다.
‘아니야. 가족들과 그렇게 애틋하고 사이좋은데.’
벨슈타인에서 루시엘은 분명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보내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명목 아래.
그 결혼의 계약이 끝나는 날이 되면 떠나려고…… 이 작은 아이는 그때를 대비하고 있는지 모른다.
키제프는 루시엘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루시엘은 제 생명을 구한 은인이자, 이제 한 가족이었다.
‘그런 루시엘이 도망간다고……?’
왠지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루시엘을 붙잡아 놓는 것 역시 이기적인 일이었다. 키제프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우응…….”
루시엘이 작게 뒤척이며 인형을 꼭 끌어안았다.
불안하게 일렁이던 붉은 눈동자는 루시엘을 보는 순간 부드럽게 풀리고 말았다.
이 아이, 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쁘다가도 좋게 변한다.
결혼식 날 루시엘은 그녀인지 몰라볼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우유처럼 뽀얀 피부를 감싼 웨딩드레스가 날개처럼 보일 정도로 천사 같고 요정 같고.
아니, 그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예뻤다.
잘 때는 실컷 쳐다봐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으니까, 조금만 더 보고 자러 가야겠다.
키제프는 오래도록 루시엘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 * *
“……어?”
다음 날 응접실에 나온 루시엘은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부엉이 벨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키제프를 발견한 터였다.
소파에 앉아 있는데도 길쭉길쭉한 팔다리 때문에 몸매가 좋아 보였다.
루시엘은 속으로 감탄했다.
‘내가 키제프와 어울리는 키가 되려면 오십 년은 걸릴 거 같아.’
편안한 옷차림이었지만 잘생긴 얼굴 덕분인지, 볼 때마다 항상 눈을 둘 곳이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별궁에 지내는 동안 키제프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아서 루시엘은 요즘 거의 홀로 지내는 기분이었다.
“잘 잤어?”
자신을 보고 어색하게 굳는 루시엘의 태도에 키제프가 먼저 말을 건넸다. 선홍빛의 모양 좋은 입술이 그림같이 웃었다.
“으응. 언제 온 거야?”
“어제저녁부터.”
“그렇구나.”
“너는 종일 이브나크에 다녀왔다면서?”
“엘링턴에게 들었구나. 응, 그랬지.”
키제프는 은근슬쩍 루시엘이 제게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줄 거라 기대했지만 루시엘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배고프다. 밥…… 먹었어?”
“아니.”
“그럼 같이 아침 먹을까?”
루시엘은 애써 활기차게 말하고는 종을 흔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로즈와 베시가 들어왔다.
“두 분,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난 어제 기절했는걸.”
“맞아요, 어제 엘링턴 부관님께 안겨서 돌아오셨으니.”
“두 사람도 잘 잤어? 아침을 먹고 싶어. 오늘 메뉴는 뭐야?”
시녀들과는 편안한 사이라서 그런지 루시엘은 조잘조잘 말이 많아졌다.
“오늘 아침은 구운 호밀빵과 옥수수 스튜, 칠면조 구이와 사과 크럼블, 훈제 돼지고기과 팬케이크도 있어요. 음료는 무엇으로 드릴까요?”
로즈의 설명에 루시엘은 벌써부터 군침이 돌았다.
“와, 맛있겠다. 키제프는 어떤 걸 마실래?”
“얼그레이.”
“나는 과일 주스.”
“오늘은 청포도가 싱싱하다고 해요.”
그 말에 루시엘은 한껏 설렜다. 매일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건 질리지 않는 행복감을 안겨 주었다.
곧 식탁 가득히 음식들이 차려졌다. 루시엘은 음식을 만들어 준 세스에게 감사하며 청포도 주스부터 마셨다.
달콤하고 상큼해서 입맛을 돋웠다. 그렇게 둘은 한참 식사를 함께했다.
한동안은 말없이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렸다. 이따금씩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루시엘은 키제프에게 웃어 주었다.
“이거 진짜 맛있어. 먹어 봐.”
루시엘이 칠면조를 추천하면서 말했다. 그녀의 만면에 포만감과 행복감이 차올라 있었다.
“먹는 거 진짜 좋아하는구나.”
“응.”
“달달한 것도 좋아하고.”
“맞아.”
루시엘이 복스럽게 디저트까지 냠냠 먹었다. 어쩜 저렇게 조그만 입과 체구로 잘 먹을 수 있는지 키제프는 봐도 봐도 신기했다.
그가 턱을 괸 채, 나른하게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몰랑한 뺨은 음식물로 빵빵해졌다.
‘……귀엽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