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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85)화 (85/282)

<85화>

키제프는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리면서 제 것으로 나온 디저트 푸딩을 루시엘에게 내밀었다.

“내 것도 먹어.”

“앗, 이거 맛있는데? 키제프도 먹어 봐. 혹시 레오니처럼 가리는 음식 있는 거 아니지?”

“…….”

정곡을 찔렸는지 키제프가 대답을 잇지 못했다. 루시엘은 그걸 놓치지 않고 접시를 살폈지만 골라 놓은 음식은 없었다.

“야채는 다 싫어.”

“근데 편식은 안 하네?”

키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든 사람 정성을 생각해서 먹긴 하지.”

“……착하다. 상냥한 마음을 가졌구나. 그치만 혼자 너무 참지는 마. 가끔 정말 먹기 싫은 건, 억지로 먹으면 체하고 탈이 나는 법이잖아.”

루시엘의 말에 키제프는 끄덕이며 말했다.

“너야말로 상냥하네.”

키제프가 눈을 곱게 접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웃으니 미모가 더욱 사는 것 같았다.

지난번 결혼식에는 앞머리를 훤히 드러내서 무척 성숙해 보였는데, 앞머리를 내린 건 귀여워 보였다.

“앞머리 내리니까 귀여워.”

루시엘의 말에 키제프의 붉은 눈이 두어 번 깜빡거렸다.

“올리는 건?”

“그건 성숙해 보여.”

“그래?”

루시엘의 말을 듣고 키제프가 앞머리를 올렸다가 내렸다.

“어느 게 좋은데?”

“둘 다 좋지만, 내린 게 더 열세 살에 가까워.”

“그런가.”

키제프가 입꼬리를 당기더니 앞머리를 손으로 내려 다듬었다.

“오늘은 자르가 단장 대신 어머니에게 검술 훈련을 받기로 해서 이만 먼저 일어날게.”

“응. 나중에 봐.”

루시엘은 키제프가 준 푸딩을 집어 들었다. 부드럽고 몰캉한 티라미수 푸딩이었다.

키제프가 간 줄 알고, 루시엘은 방긋 웃으면서 먹으며 중얼거렸다.

“마이따.”

푸딩 두 개에 잔뜩 행복해진 루시엘은 문득 세스 주방장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다고 생각 중이었다.

저벅.

그때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하던 키제프가 몸을 돌려 열심히 푸딩을 먹고 있는 루시엘에게 걸어왔다.

“응? 아직 안 갔네.”

루시엘이 고개를 들었다. 한결 붉어진 핏빛 눈동자가 루시엘을 담았다.

“어제 걱정했어. 적어도 어디 가는지는 먼저 말해 주고, 사라져 주라. 그래야 없어져도 내가 찾으러 갈 수 있으니까.”

“……걱정시켰다면 미안. 그치만 엘링턴도 있고 랄프도 함께였는걸.”

루시엘이 웃으면서 말하자 키제프가 루시엘의 어깨를 살짝 붙잡았다.

“난 네 남편이잖아. 너를 지킬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내게는 가장 먼저 알려 줘. 오늘은 어디 가?”

“그, 글쎄. 우선 아기 영지에 갈 건데.”

대답을 들은 키제프는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얼굴로 식당을 빠져나갔다. 루시엘은 멍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 우리 계약 부부 아니었어?”

* * *

“대장 앞으로 서신 왔대!”

노마가 검은색 봉투를 팔랑거리며 책상에 늘어져 낮잠을 자던 막시무스를 깨웠다.

“귀찮게 뭐야? 별거 아니기만 해.”

“아, 아니. 되게 중요한 거 같던데…….”

노마가 막시무스의 눈치를 살피면서 점점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막시무스는 봉투를 낚아채서 펼쳤다. 기분 나쁜 검은 드래곤의 인장이 꾹 찍혀 있었다.

어느새 서신을 구경하기 위해 아이들이 머리를 모았다.

“이거 벨슈타인 인장 아냐?”

“맞아, 검은 드래곤이면!”

막시무스가 눈썹을 움찔 추어올렸다.

「내 친구 막시무스에게.

결혼식 피로연회에 초청하니, 부디 참석해 자리를 빛내 줬으면 해.

―키제프 폰 벨슈타인.」

“헉, 키제프가 대장을 초대했다고?”

“말도 안 돼.”

키제프의 이름을 들은 옆자리 여학생들도 의아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지?”

“하하하, 하하하하!”

막시무스가 미친 듯이 웃었다.

그 건방진 키제프 녀석의 결혼식 피로연 초청장이라니. 실로 웃음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 분명한 경고이자, 도전장이었다.

“안 그래도 심심해 뒈질 뻔했는데, 잘됐다. 기꺼이 초대에 응해 줘야지.”

막시무스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면서 눈앞에 키제프가 있는 듯 노려보았다.

* * *

루시엘은 세스 주방장을 찾아가 감사를 표한 뒤, 곧장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해서 아기 영지에 도착했다.

“아가 마님. 오셨습니까.”

과수원을 홀로 돌보고 있던 랄프가 헐레벌떡 달려와 루시엘을 맞이했다.

“기사단에서 다들 절 부러워합니다. 귀여운 아가 마님을 모시게 되었다고요. 감자 한 알 드릴까요?”

푸근한 인상의 그는 넉살 좋게도 다른 영지민에게 감자를 한 바구니 받아 온 모양이었다.

“아뇨. 배불러서 못 먹어요. 그런데 랄프, 일찍 와 있었네요?”

“예, 과수원을 돌보느라 미리 와 있었습니다.”

루시엘은 자못 미안해졌다. 그는 명색이 기사인데, 과수원의 잡일까지 하게 되었으니 싫을지도 몰랐다.

과수원은 온실 정원을 꾸미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나무의 가지나 잎, 열매도 관리해 주어야 했고 영양을 잘 받을 수 있게 비료도 주고 해충이 꼬이지 않도록 해야 했다.

수확기가 되면 엄청날 것 같았다.

루시엘이 조심스레 말했다.

“랄프, 혹시 너무 힘드시면 말씀해 주세요.”

“예? 무슨 말씀을요. 과수원의 나무들은 인근의 농부가 이미 작업하고 돌아갔으니 걱정 마세요.”

“앗, 정말요?”

“예, 에바 집사장님이 나무들을 돌볼 사람들을 마련하셨어요. 그리고 혹여 과수원 일이 많더라도 저는 괜찮습니다. 사실 제가…… 과수원집 셋째 놈입니다. 핫하하.”

그 말에 루시엘은 우연치고는 잘됐다 싶었다.

“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을게요. 그러면 저는 오두막 안에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문을 두드려 주세요.”

“예!”

루시엘은 랄프에게 호위를 맡겨 놓은 다음, 아담한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별궁에서는 공주처럼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여기는 오롯이 혼자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편했다.

특히 루시엘은 오두막의 가장 안쪽 방에는 창문과 문 모두 자물쇠 마법을 걸어 놓았다.

이 방은 보석의 방으로 쓸 예정이었다.

외부에 있어도 이곳으로 바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게, 좌표를 기록해 놓았다.

보석이 떨어지면 잘 보이게끔 검은색 천도 바닥에 깔아 놓았다.

루시엘은 몇 번에 걸쳐 별궁의 욕실에서 별장 안으로 순간이동 하는 연습까지 마쳤다.

“이제 보석 모을 기초 준비는 됐어. 여기서 마음껏 만들자.”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었다. 앞으로가 기대되어서일까. 루시엘은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루시엘은 오두막 흔들의자에 앉아서 느긋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은 차고 넘쳤지만, 차근차근 밟아 가면 되었기에 마음이 조급하진 않았다.

‘지금껏 잘해 왔고, 앞으로도 잘할 수 있어.’

루시엘은 그렇게 스스로를 독려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에리카에게서 보석에 원소의 힘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확인했고, 이제 다른 보석들의 연구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르제온이라는 마도사가 만든 측정 기구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은 그 아르제온이 지금 행방불명 중이라는 사실이었다.

단서는 여럿 있긴 했다. 아르제온이 늙지 않는 빙결의 마도사라는 것, 설원에서 동물로 변하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것, 그리고 전대 마탑주라는 것.

길리아트 할아버지에게 여쭈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벌떡 일어난 순간, 루시엘의 눈동자가 굴러갔다. 그러곤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시아빠가 설원에서 데려온 눈사슴이 마법을 썼어! 혹시…….”

루시엘이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랄프가 서둘러 오두막 앞으로 달려왔다.

“아가 마님,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십……!”

“랄프, 잠시 갈 데가 있어요.”

“어디로요?”

“레오니의 영지요.”

루시엘은 랄프와 함께 영지를 나가서 레오니의 영지가 있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보폭이 좁은 다리로 달리려니, 드레스 자락이 거슬렸다.

다행히 레오니의 영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숨을 몰아쉰 루시엘이 그곳의 관리자에게 물었다.

“혹시 눈사슴 보지 못했나요?”

“눈사슴이요?”

“네, 여기 다른 동물들이랑 같이 있었잖아요. 털 빛깔이 하얀색인 눈사슴이요.”

“아아…… 눈사슴이라면 이글루에 있습니다. 저쪽입니다.”

눈사슴은 이글루 안에서 눈을 곱게 감고 잠들어 있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순한 사슴 같기만 했다.

루시엘은 시종의 도움으로 눈사슴을 별궁의 제 방으로 우선 옮겼다. 그러곤 모두 물러가게 한 다음 문을 달칵 잠갔다.

어느새 감았던 눈을 뜬 사슴이 까만 눈망울로 루시엘을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루시엘이 사슴에게 건초를 내밀었다.

“먹어.”

그러나 사슴은 살짝 다가와 건초를 아주 약간 씹더니 다 먹지 않고 뱉었다.

‘풀을 싫어하는 사슴은 없는 거 같은데.’

루시엘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르제온, 당신이에요?”

눈사슴이 연약한 다리가 뒷걸음질 치려 하자, 루시엘은 재빨리 사슴의 몸뚱이를 덮치듯 붙잡았다.

화아아아!

이내 루시엘의 방 안을 환한 빛이 덮침과 동시에 기온이 뚝뚝 내려가 추위가 덮쳤다.

얇은 원피스 차림인 루시엘은 곧 덜덜덜 떨고 말았다.

이윽고 눈앞에는 물처럼 색소가 옅은 하늘빛 눈동자를 가진 미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 허리까지 오는 물빛 머리카락, 온몸에는 흰색의 긴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내 정체를 알았다니 놀라운걸.”

왕왕 울리며 아름다운 목소리가 루시엘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가 숨결을 내뱉을 때마다 냉기가 온몸을 감쌌지만 루시엘은 경계심에 추위마저 잊었다.

파앗!

루시엘은 그를 마주한 경이로움에 순간 감정을 참지 못하고 보석을 만들었다.

‘안 돼, 하필이면……!’

또로롱!

요리를 먹고 감탄하면서 만든 적이 있었던 영롱한 연두색의 보석 페리도트였다.

루시엘은 그를 경계하며 노려보았다.

누군가에게 절대로 들키면 안 되는데, 하필이면 낯선 상대 앞이라니.

허공에 맺힌 보석을 집어 든 아르제온이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크리스털 페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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