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이브나크의 수많은 유리 공방이 문을 닫았지만, 하멜 형제의 공방만은 쉴 틈 없이 돌아갔다. 공작가의 지원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유리 제조부터 공예까지 이루어졌기에 더욱 많은 이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1,600도가 넘는 유리 도가니에 기다란 쇠파이프를 넣고 유리 가루를 묻힌 다음, 판형에 대고 이리저리 굴리면서 집게로 모양을 다듬고 형태를 만드는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도 황홀하게 만들었다.
매끈한 유리 덩어리는 열이 닿자, 누르면 누르는 대로 형태가 움직였다.
“와아. 만드는 과정도 너무 대단해요.”
루시엘도 그 기술에 입을 채 다물지 못했다.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내면서 막스가 서서히 식고 있는 백조 모양의 유리공예품 위로 종잇조각을 올려놓았다.
종이가 금방 활활 타올랐다.
루시엘이 관심을 보이며 가까이 오려고 하자, 막스가 주의를 주었다.
“500도 정도로 서서히 열을 식히는 중입니다. 급격하게 식히면 깨지기 쉽기 때문이에요. 절대 만지시면 안 됩니다.”
“응, 안 만질게요.”
아무래도 루시엘을 아직도 평범한 아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유리 공방은 아이들이 오기에는 위험한 것들이 많았다.
“공방을 둘러보셨으니 이제 제가 만든 공예품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좋아요.”
루시엘은 막스가 보여 준 공예품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장인의 솜씨를 물려받은 그는 이미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발전한다면 크게 될 인재였다.
그러나 공예품들 역시 그가 보내 주었던 유리 조각들과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디자인이 무난한 편이었고, 광택과 빛깔은 아름답긴 했지만 황후를 만족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솔직히 그가 만들었던 유리관의 유리보다 아쉬움이 있었다.
그건 물론 그가 앞으로 수많은 경험과 기술, 노련함을 거치면서 갖게 될 실력이 되겠지만.
루시엘은 그 시간을 더 앞당겨 주고 싶었다.
“제 유리 공예품들……. 어떠신가요.”
막스는 왠지 자신감이 없는 말투였다.
“지금도 훌륭하지만 유리그릇을 만들 거라면 윤기와 광택, 투명함이 더 뛰어나야 해요. 막스 씨의 그릇보다 뛰어난 기술자는 아직 많아요.”
루시엘의 신랄한 평가에 막스는 정신이 번쩍 드는 것만 같았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제가 아직 기술이 부족해서…….”
“다른 투명한 물질을 찾아는 보았어요?”
“……지금이 딱 적합한 배율입니다. 제 아버지와 형들도 모두 그렇게 배웠습니다.”
‘음…… 역시 고집이 있구나.’
단단히 다물린 입술과 진중한 눈빛에서 유리를 향한 뜨거운 집념이 느껴졌다. 그는 장인이 될 완벽한 조건을 갖췄다.
경험과 기술이 늘어나면 당연히 제작하는 유리의 질이 좋아진다는 건 루시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단기간에 되는 것이 아니었다. 몇 년이나 기다릴 수는 없었다.
‘……음, 역시 그 방법을 써야겠어.’
루시엘은 그에게 살짝 힌트를 주기로 했다.
막스가 만들었던 루시엘의 유리관은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그 투명한 빛깔이 독보적이었다.
그가 그렇게 투명한 유리를 만들 수 있었던 건 이유가 있었다.
누군가 그에게 비결을 물었던 터였다. 끝끝내 가르쳐 주지 않던 그는 훗날 이렇게 답했다.
―실수로 유리의 재료가 되는 모래를 넣다가, 투명한 네이플 해초까지 같이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불순물 없이 깨끗하고 맑은 유리를 얻게 되었지요. 이 방법을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리공예의 발전을 위해서 이렇게 밝힙니다.
자연스럽게 알려 줄 방법을 위해 루시엘이 막스와 엘링턴에게 울상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공방 구경은 잘했어요. 그런데 저 배고프고 다리도 아파요.”
“아, 그럼 이만 성으로 귀환할까요?”
엘링턴이 얼른 루시엘을 안아 들려고 몸을 낮추면서 물었다. 그러나 루시엘은 그게 아니라는 듯 몸을 휙 돌렸다.
“아니, 아니. 배고파요.”
엘링턴은 자못 당황스러웠다. 뜬금없이 공방 구경을 마치고 갑자기 배고프다고 하시다니…….
‘원래 이렇게 어리광부리실 분이 아닌데…….’
그가 알고 있는 루시엘은 귀여운 아이였지만, 똑똑하고 배려심이 깊었다.
한편 루시엘은 엘링턴에게 눈빛을 보냈다.
‘엘링턴, 그게 아니에요. 해초를 힌트로 알려 주려면, 세스가 싸 준 해조류 도시락을 먹어야 한다구요.’
이브나크에 도착하기 전에 부랴부랴 세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네이플 해초로 만든 요리가 먹고 싶어요! 인어공주는 해초를 먹고 산다고 책에서 봤거든요.’
‘어머나, 그러셨어요? 귀여우셔라. 건강에 좋은 거니 많이 드시면 좋지요. 제가 해초를 활용한 요리를 몇 가지 알고 있으니 재료만 구하면 된답니다.’
그녀는 흔쾌히 동조한 뒤 네이플을 어렵게 공수해서 요리를 만들어 주었다.
세스가 없었더라면, 준비해 오지 못했을 것이다.
‘맛은 심각하게 없지만 말이지.’
어쩔 수 없이 미각을 희생했다.
어린아이가 배고파하자, 막스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저…… 그러면 저희 집에서 식사라도 대접하겠습니다. 그런데 귀한 공작가의 아가 마님 입맛에 다소 안 맞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가 마님은 맛있는 음식이면 대부분 잘 드시는 편입니다. 그렇죠?”
엘링턴이 눈치 없이 웃으면서 루시엘을 향해 물었다. 루시엘은 답답한 마음으로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아, 아니요. 세스 주방장이 싸 주신 도시락 먹을래요!”
“아 참, 도시락이 있었지요. 제가 마차에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그렇게 힘겹게 가져온 바구니의 뚜껑을 열자 해초로 만든 음식이 잔뜩 나왔다.
해초 샐러드부터 시작해서 해초 샌드위치, 해초 수프, 해초 소스를 바른 닭 구이.
투명하고 끈끈한 연두색의 해초가 가득 들어 있는 음식의 상태를 본 엘링턴과 막스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루시엘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아…… 마, 맛있겠다.”
루시엘이 그리 말하면서 포크로 해초 샐러드를 찍어 먹었다. 오도독, 단단하게 굳은 해초 특유의 시큼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건강한 맛이에요. 둘 다 먹어 봐요.”
“……저, 전 포기하겠습니다. 아가 마님.”
엘링턴은 입안에 넣자마자 얼굴을 찌푸렸고, 막스가 조심스럽게 먹어 보더니 오도독 씹히는 해초를 보며 물었다.
“이런 건 처음 먹어 봅니다.”
“아, 이건 네이플이라는 해초예요. 열을 가하면 이렇게 투명해진대요. 정말 신기하죠?”
“……열을 가하면 투명해진다고요?”
“네. 유리처럼 투명해진대요.”
결정타로 힌트를 알려 주고 나서 루시엘은 모른 척 이번에는 샌드위치를 와앙, 한 입 크게 베었다.
루시엘은 요리하지 않은 네이플 해초를 슬쩍 뒤에 숨긴 다음, 막스에게 말했다.
“하멜 씨. 유리는 어떻게 만들어져요?”
“도가니에 유리의 재료가 되는 모래에 석회 유리, 그리고 반짝임을 더하는 납이나 부싯돌을 소량 섞어서 만듭니다.”
“그렇구나. 보고 싶어요.”
“이겁니다.”
막스가 도가니에 흘려 넣을 유리의 재료를 넣은 통을 보여 주었다.
“이게 녹아서 유리 물이 되고, 서서히 식으면 유리가 되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루시엘은 이해하는 척하다가 막스에게 말했다.
“캑캑……. 저 물 한 잔만 주실 수 있으실까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막스가 잠시 고개를 돌린 사이에 루시엘은 재빨리 네이플 해초를 통 안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는 해초가 보이지 않도록 휘휘 섞었다.
그때 엘링턴과 눈이 마주쳤다.
“아가 마님? 방금 그 해초를 왜 모래에 넣으신 겁니까?”
루시엘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엘링턴은 일단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막스가 물을 한 잔 떠 와서 루시엘에게 조심히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루시엘 님.”
“고마워요.”
물을 내민 후에 조용히 돌아가려는 막스에게 루시엘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이제 도가니에 모래와 재료들을 넣는 거 보여 주세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도가니 속 불이 너무 환해서 멀리서 보셔야 합니다.”
막스 하멜이 주의를 주자, 엘링턴이 나섰다.
“제가 아가 마님을 안고 보여 드릴 겁니다.”
그렇게 루시엘은 재료들이 도가니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다 본 다음 엘링턴은 루시엘을 다시 내려 주었다.
그 후에도 루시엘의 요구는 계속되었다.
“토끼 장식품 만들어 주세요.”
녹은 유리물을 성형해 장식품이 만들어지고 서서히 식을 때까지.
그리고 유리의 순도 높은 투명한 빛깔이 보일 때쯤, 루시엘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는 듯 고백했다.
“저 실은 아까 네이플 해초를 재료 안에 빠뜨렸어요!”
“예? 얼마나 말입니까.”
유리물에 불순물이 생길 경우, 기포는 물론이고 깔끔한 유리를 만들 수 없었다.
깜짝 놀란 막스의 걱정과는 다르게 다 식은 유리 장식품의 빛깔은…… 전에 없이 최상급의 투명도를 가지고 있었다.
루시엘이 눈을 총총 빛내면서 말했다.
“와, 저것 좀 봐요. 유리가 엄청 투명하게 반짝거려요. 예쁘다.”
루시엘이 굳이 짚어 주지 않아도 매일 자신이 만드는 유리의 투명함을 알고 있던 막스였다. 그의 심장은 이미 두근거리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를 만들기 위해서 그간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그 과정에서 납과 부싯돌의 양을 늘리기도 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루시엘이 슬쩍 말했다.
“네이플 해초 덕분인가 봐요!”
“……그, 그런 것 같습니다. 제대로 확인을 해 보아야 하니, 해초를 조금 더 주실 수 있으신지요?”
아까는 고집을 부리던 막스가 직접 해초를 달라고까지 하다니, 루시엘은 웃음이 포실포실 피어올랐다.
루시엘은 분홍 가방에서 네이플 해초가 담긴 봉투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여기 있어요.”
막스가 네이플 해초를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