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루시엘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떤 힘이 있던가요?”
“기존 최상급 마정석의 열 배 이상의 마력이 들어 있고, 더 놀라운 건 바람의 힘이 담겨 있었어요. 지금껏 이런 보석을 본 적은 없어요.”
“그렇구나. 에메랄드는 바람의 힘을 가졌군요.”
“네, 정말 신기한 보석이에요. 잠깐, 에메랄드가 바람이라면…… 호, 혹시 다른 보석도 갖고 계신가요?”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메랄드가 바람이라면, 다른 보석에는 어떤 힘이 담긴 걸까? 보석들은 전부 어떤 연관성을 가진 거지?
의문이 끝없이 피어올랐다.
루시엘이 현재까지 만들어 낸 보석은 토파즈와 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드까지였다.
이번 생에는 없었지만 과거를 생각해 보면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검은색의 옵시디언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아직 루시엘이 강하게 가져 보지 못한 새로운 감정이 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네. 다른 보석도 있어요. 하지만 다른 보석들은 보안상, 마탑보다는 이곳에 연구소와 같은 환경을 갖춘 다음 연구를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루시엘의 말에 에리카도 동의했다.
“에리카 언니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니까 이해해 주세요.”
“알아요. 저 역시 이렇게 귀한 보석이라면, 더욱 철저하게 철통같은 보안으로 연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응, 우선은 필요한 연구 환경을 갖출 테까지 기다려 주세요. 그 측정 도구들에 대해서 알려 줄 수 있나요?”
루시엘이 그렇게 말하자 에리카는 약간 낯이 어두워졌다.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그 측정 도구들은 천문학적인 가격인 건 둘째 치고, 구매하기 위해서는 발명한 학자의 승인을 받아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불법이라…….”
“그럼 승인을 받아야겠어요. 그게 누군가요?”
“……빙결의 마도사 아르제온. 마탑의 전대 마탑주님이신데…….”
“앗, 길리아트 할아버지께서 현 마탑주잖아요. 살아 계신 분이에요?”
에리카가 자못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행방불명되셨다고 해야 할까요?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사라지셨다고 해요.”
“그럼 돌아가신 게 아닐까요?”
“아뇨, 그분은 늙지 않는다고 해요. 인간이 아닐지도 모르고요.”
“그럼…… 어디서 찾죠?”
“종종 동물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돌아다닌대요. 설원에서 목격했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설원에 사는 동물이라니…… 너무 범위가 넓었다. 우선 가족들에게 물어봐야 했다.
“일단은 아는 선에서 조사해 보도록 할게요. 에리카 언니도 혹시 관련해서 아는 정보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
“물론이에요, 아가 마님. 저도 평생 이런 경험을 해 보는 건 처음이라, 심장이 두근거려요. 아, 여기 보석은 돌려드릴게요.”
에리카가 에메랄드가 든 주머니를 루시엘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루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보석은 에리카가 다시 가져가야겠어요. 아직 연구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네?”
“저는 보석의 힘을 무기나 액세서리에 넣어 사용할 수 있기를 원해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저는 그 일을 에리카가 도와주었으면 해요. 그리고 이건, 당신을 믿고 계속 함께하겠다는 제 성의예요.”
루시엘은 품에서 언젠가 에리카에게 주려고 챙겨 둔, 금화 주머니를 건넸다.
“정확히 50만 틸링이에요.”
황성에서 그녀가 미래에 받았을 연봉과 근사한 돈이었다. 이 정도면 적당히 쓸 만한 작은 집 한 채를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네? 그렇게 큰돈은 바, 받을 수 없어요.”
“큰일을 하려면 투자가 필요하니까요. 후원금 명목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에리카는 어린 나이에도 에레스의 몫까지 돈을 벌면서 가장 노릇을 했다. 마탑에서 받고 있는 연봉만으로는 두 식구가 살기엔 빠듯할 것이다.
루시엘은 에리카가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받아 주세요.”
“아가 마님…….”
“언젠가 에리카는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고 훌륭한 사람이 될 거예요. 제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간다면요.”
에리카는 잠시 고민했다.
마탑에서 그녀는 재능에 비해 맡고 있는 업무가 한정적인 편이었다.
자신보다 더 나이와 학벌이 좋은 선배 마도사들이 커다란 프로젝트를 도맡아 하고 있었던 탓에 에리카에게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 순간이 그녀의 인생에 찾아온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엘이 하고자 하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올곧은 일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그 일에 자신의 능력이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에리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은 단순히 그냥 똑똑한 열 살 아이가 아니라는 걸 그녀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가 만들 미래에 자신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하겠습니다, 루시엘 님.”
“저도 그러길 바랄게요. 가능한 오랫동안.”
어느새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변화한 걸 느꼈지만 루시엘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았다.
루시엘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제는 평범한 아이를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루시엘도 에리카가 가져올 성과와 결과가 기대되었다.
* * *
짹짹짹!
아치형 창 너머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릴 들으면서 루시엘은 별궁에서 기지개를 켰다.
별궁에서 지낸 지도 벌써 여러 날이 되었다.
데이지꽃이 그려진 연분홍 커튼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별궁은 산호색 벽돌 지붕과 하얀 외벽을 가진 작은 이 층짜리 궁이었다. 반원형의 테라스에는 언제든 꽃나무와 하늘을 둘러볼 수 있게 해먹과 흰색의 차양이 둘러져 있었다.
이 해먹에 누워서 시원한 음료수를 먹을 때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내부는 또 얼마나 예쁘게 꾸며져 있는지.
부부 별궁답게 일 층은 루시엘의 공간이, 이 층은 키제프의 공간이 각각 꾸며져 있었는데 루시엘의 공간이 훨씬 넓었다.
키제프의 공간은 테라스와 부부 공용 침실이 일부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일 층은 꽃을 좋아하는 루시엘의 취향을 맞춘 잔잔한 꽃무늬 카펫과 테이블보, 커튼과 쿠션까지 사랑스러운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다.
달콤한 간식이 잔뜩 비치된 우아한 소파가 있는 응접실, 마차 모양의 아늑한 침대가 있는 개인 침실, 커다란 거울과 화장대가 있는 드레스룸과 편지 쓰기를 좋아하는 루시엘을 위한 서재, 솔리아페에게 선물받은 하얀 도자기 욕조를 그대로 옮긴 욕실까지.
동관에서는 욕실이 딸린 방 한 칸만이 루시엘에게 허락된 공간이었는데 이제 무척 널찍해졌다.
루시엘의 요청으로 별궁에는 놀이방이 사라졌지만, 응접실 한편에는 양말 나무와 인형들, 래빗 성을 진열해 놓았다.
할아버지와 공작이 준 소중한 선물이니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별궁에서 지내는 동안 루시엘은 마치 어느 나라 공주님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다행히 결혼 후에도 로즈와 베시가 그대로 루시엘과 함께하게 되었다. 대신 두 사람이 키제프의 시중도 같이 들게 되었지만, 그는 대부분 관여하지 않는 쪽을 원해 업무가 크게 늘지는 않았다.
“아가 마님, 에바 집사장께서 도밍카산 허니 밀크티를 가져다주셨어요. 우유에 냉침 해 두었는데 한 잔 드릴까요?”
“맛있겠다. 좋아!”
베시의 권유에 루시엘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응접실 테이블 앞에 앉았다.
밀크티의 달콤한 맛이 사르륵 입안을 감돌자 루시엘이 푹 빠져선 말했다.
“이건 혁명이야. 베시도 먹어 봐.”
두 사람은 밀크티를 함께 마셨다.
밀크티가 든 투명한 유리 찻잔을 바라보던 루시엘은 문득 유리 공방 생각이 났다.
‘하멜 씨, 작업 잘되고 있을까?’
그렇게 잠깐의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였다. 별궁으로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상자를 든 엘링턴이었다.
“아가 마님!”
“엘링턴!”
“하멜 공방에서 여러 가지 색의 유리를 견본으로 보내왔습니다.”
“안 그래도 작업의 진행 과정이 궁금하던 차였어요.”
엘링턴이 응접실 테이블 위로 상자를 내려놓았다. 묵직한 무게감으로 보아서 유리가 제법 많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상자를 열어 보니 여러 가지 색을 가진 작은 유리 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예쁘다.”
“장갑을 끼고 만지세요. 깨질 수도 있고 위험하니까요.”
엘링턴이 루시엘과 곁에 있던 시녀들을 향해 일러주었다. 눈치 빠른 베시가 얼른 장갑을 가져와 끼워 주었다. 루시엘은 유리 조각 하나를 집어서 살펴보았다.
색깔은 선명하고 예뻤지만, 유리의 특성인 투명함이 부족해 아쉬웠다.
“아가 마님께 직접 색을 골라 달라는 메모도 같이 왔습니다. 다만 하멜가의 장남인 빈센트 씨가 팔을 다쳐, 유리공예를 잠시 그만둔다고 합니다.”
“그런…… 안타까운 일이네요. 막스 씨의 어깨가 조금 더 무거워졌겠어요.”
“예, 그래서 각하께 생계를 위한 지원금을 약간 요청해 두었습니다.”
“잘하셨어요. 장식품은 어떤 걸 만든다고 하던가요?”
“도안도 여러 가지 보내왔는데, 장식용 그릇을 생각 중인 모양입니다.”
종이에는 호리병 모양새의 그릇이 그려져 있었지만 무난했다. 루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음, 무언가 부족한 것 같은데.’
“장식용 그릇은 광택이나 윤기가 더 돌고 투명한 색이어야 해요. 그래야 유리 본연의 매력을 살린 공예품의 아름다움과 가치가 높아질 테니까요.”
루시엘이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우선 제가 공방에 직접 가서 막스 씨를 만나야겠어요.”
“아가 마님께서 직접이요?”
“네, 유리 공방을 직접 가 보고 싶어요. 호위 기사인 랄프와 같이 움직이면 될 거예요.”
“이브나크는 다소 먼 지역이니 각하의 허락을 받아 오도록 하겠습니다.”
“네, 저도 준비할 것이 있어요.”
루시엘이 방긋 웃으면서 주방장 세스를 찾아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