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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81)화 (81/282)

<81화>

사용인들이 별궁으로 짐을 옮기는 사이 루시엘은 루이비드와 함께 아기 영지를 둘러보고 있었다.

루시엘이 바란 건 그저 작은 창고만을 세울 정도의 자그만 땅이었는데, 공작이 마련해 준 것은 제법 널따란 땅이었다.

레오니의 영지와 크기는 비슷하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루시엘, 어떠냐?”

공작이 숙제 검사를 받는 아이처럼 루시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루시엘은 이미 끝없이 펼쳐진 과수원의 나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사과나무부터 시작해서 포도, 복숭아, 블루베리, 라즈베리, 딸기 같은 과일나무가 심겨 있었다.

그뿐 아니라 밀밭과 물레방앗간, 풍차와 우물까지도 있어 마치 작은 마을 같았다. 아직 꾸며지지 않은 빈 공간도 많았고, 펼쳐진 목초지에서는 말을 타고 실컷 달려도 좋을 것 같았다.

“……제가 바란 건 그저 작은 창고 정도였는데, 꿈꾸는 것 같아요.”

“창고라면 저길 쓰면 되겠군.”

공작이 풍차 뒤편에 있는 오두막집을 가리켰다. 루시엘은 오두막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깔끔하게 내부에는 간소한 테이블과 작은 주방도 딸려 있었고, 푹신한 소파와 간이침대도 있었다.

누군가 살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어느 정도의 살림이 갖춰져 있었다.

“창고가 아니라 별장으로 써도 될 만큼 근사해요.”

루시엘의 감탄한 얼굴을 바라보던 공작이 부드러운 은발을 흩뜨렸다.

“자주 들러서 가꾸어 주어라. 여기는 영지민들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곳이니, 좋은 경험이 될 테지.”

저 멀리 근처에 다른 사람들이 일을 하러 가거나, 작물을 가꾸는 모습도 보였다.

벨슈타인의 영지민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만나 볼 걸 생각하니 괜히 궁금해졌다.

“빨리 영지민과도 만나 보고 싶어요.”

루시엘이 해맑게 웃으면서 말하자 공작이 턱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저런, 호위 기사를 두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

“앗……네에. 시아빠 기대를 저버리지 않게 잘 가꾸어 볼게요. 영지를 하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시엘이 꾸벅 절하듯이 배꼽 인사를 했다.

“기대되는군. 빈 공간은 얼마든지 네 요량대로 가꾸도록. 과수원의 나무들도 바꾸고 싶다면 바꿀 수도 있다.”

기껏 심어 놓은 나무를 바꾸다니 루시엘은 깜짝 놀라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건 안 돼요. 벌써 과일 먹을 생각에 행복하단 말이에요. 과일 청을 담가 차를 마시거나, 잼을 만들 수도 있겠어요.”

루시엘이 곱게 눈을 접으면서 웃자, 말랑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 역시 루시엘은 먹을 것에 진심일 때가 가장 사랑스러웠다.

공작이 놀리듯 말했다.

“처음 왔을 적만 해도 파르페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꼬맹이였는데 말이지. 이제는 모르는 게 없구나.”

“그럼요. 잘 먹고 있으니까요. 저 꽤 커지지 않았어요?”

루시엘이 일어서서 주장했지만 공작은 고개를 갸웃하며 아이를 훑어보았다.

“옆으로는 큰 것 같은데 위는 아직 한참 자라야 할 것 같군.”

“……키는 그렇게 금방 자라지 않는댔어요.”

“네 남편은 석 달 동안 십 센티가 자란 적이 있지.”

“……마, 말도 안 돼요.”

루시엘은 영지를 둘러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이 완벽한 영지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여기 관리는 언제 다 하지? 로즈랑 베시에게 도와 달라고 할까?’

그러나 루시엘의 머릿속 고민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공작이 해답을 내려 주었다.

“정해진 시간에만 잠깐 농부를 고용하면 될 거다. 그건 에바가 안내를 해 줄 거고. 그래도 영지를 관리하고 지킬 겸 호위 기사를 당장 임명하는 게 좋겠다.”

“좋아요.”

루시엘도 그건 바라던 바였다. 개인 호위 기사가 있으면 외부 활동을 하기에도 더 용이해질 테니까.

다만 제 호위로 두려면 그만큼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했다.

루시엘은 그냥 호위 기사보다는 오랫동안 그녀를 돕고 지켜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으니까.

‘혹여나 내가 벨슈타인을 떠나더라도 함께할 수 있는 내 사람이 필요해.’

빨간 노트의 목록으로 적어 둔 항목이기도 했다.

믿을 만한 호위 구하기.

‘이제는 그 아이를 찾을 때가 된 것 같아.’

하지만 그 소년을 바로 찾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우선 호위해 줄 기사가 필요한 건 확실했다.

“기사단으로 가자, 루시엘.”

공작은 루시엘을 말에 태워 처음으로 검은 날개 기사단에 데려갔다.

드넓은 연무장에는 사열 종대로 늘어선 기사들의 기합 소리가 높다랗게 울려 퍼졌다.

기사단의 분위기는 사뭇 긴장감이 감돌았다. 누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훈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들이 벨슈타인의 검은 날개들이구나. 멋지다.’

벨슈타인의 검은 날개는 제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실력의 기사들이 모인 곳이라 들었다.

공작과 함께 느긋한 걸음으로 연무장 안쪽으로 가는데, 익숙한 그림자의 소년이 덩치 큰 누군가에게 검술 훈련을 받는 모습이 보였다.

땀에 젖은 금발이 흔들리며 연신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제법 진지했다. 민소매로 된 상의를 걸친 키제프의 어깨와 팔뚝에 근육과 힘줄이 살짝 도드라졌다.

조금뿐이지만 저렇게 어린 나이에 근육이 있는 몸이라니 루시엘은 신기한 눈빛으로 키제프를 바라보는데 공작은 다른 평가를 내렸다.

“남자가 되려면 아직 멀었군.”

“…….”

공작의 냉정한 한마디에 키제프와 남자가 동시에 이쪽을 바라보았다.

“오셨습니까, 주군.”

“두 사람이 만나는 건 처음이겠군.”

흡사 곰만치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제아무리 눈치 없고 둔감하기로 소문난 자르가라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공작은 물론이고 벨슈타인 가문의 귀애를 한 몸에 독차지하는 존재라는 것을.

“이분이 바로 아가 마님 되시는군요. 검은 날개 기사단장 자르가 카이든이 아가 마님을 뵙습니다.”

“기사단장님을 뵙게 되어 기뻐요.”

중간에 공작이 안아 올려 주는 바람에 자르가와 시선이 엇비슷하게 된 루시엘이 눈을 또랑또랑 빛내며 인사했다.

한편 루시엘도 그의 엄청난 위압감과 덩치에 놀라면서도 속으로 감탄스러웠다. 오랫동안 전장을 구른 검사 특유의 형형한 눈빛과 날 선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시아빠와는 다른 느낌으로 엄청나게 강한 사람 같아.’

“루시엘의 호위를 맡을 기사가 있었으면 한다.”

공작의 말에 자르가는 랄프라는 순박한 인상의 살집이 살짝 있는 청년을 기사로 추천했고, 루시엘은 그를 받아들였다.

“아가 마님의 호위를 맡게 되어 영광입니다. 랄프 돌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호위 기사를 정하자 공작은 자르가에게 논의할 건이 있다면서 둘이 함께 사라졌다.

랄프도 준비를 하고 오겠다면서 잠시 기사단 훈련소로 들어갔다.

자연히 루시엘은 키제프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 보니까 검술 훈련 꽤 열심히 하더라.”

루시엘의 말에 키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놀랐다. 그는 뛰어난 마법 실력만으로도 충분히 강할 텐데.

“……지키려면 내가 더 열심히 해야지. 더 강해져야만 해.”

벨슈타인을 지키겠다는 뜻인가? 키제프가 과거에 어떤 마음가짐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쌓아 놓은 벨슈타인이란 거대한 왕국을 그 역시 지키려고 했을 것이다.

결국엔 황태자와 귀족들의 손에 무너지고 말았지만.

루시엘은 괜스레 그를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에 말했다.

“응. 키제프는 이다음에 엄청나게 강해질 거야. 난 그렇게 되리라고 믿어.”

“왜?”

“그냥 그런 확신이 들어. 키제프라는 사람을 믿는 거야. 말하는 대로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는걸.”

“그런가.”

“응. 내가 감이 좀 좋거든.”

루시엘의 자신만만한 말에 키제프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그렇다면 전부 지킬 수 있을까?”

“응! 당연하지.”

루시엘이 맑게 웃으며 대답하자 키제프는 그 상냥한 미소에 안도한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꼭 지킬게.”

비록 과거엔 지키지 못했더라도 이번 생엔 아니라고, 내가 있다고 전해 주고 싶었지만 루시엘은 그저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나와 함께 벨슈타인을 지키자.’

루시엘은 전하지 못한 말 대신,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루시엘이 건넨 자그만 위로가 전해졌을까? 키제프의 입가도 슬그머니 말려 올라갔다.

“그만 다시 훈련하러 가 봐야 해.”

“으응. 몸조심해.”

“너야말로.”

키제프가 손을 뻗어 루시엘의 머리칼을 한번 쓰다듬었다. 루시엘은 눈이 동그래졌다.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순간 루시엘의 귓가에 속삭임이 들려왔다.

“……내가 지켜 줄 수 있을 때까진 조심히 다녀.”

그렇게 말한 다음 키제프는 훌쩍 등을 돌려 연무장 안으로 뛰어가 버렸다.

“어?”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머리가 멍해졌다.

“나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버린 키제프의 뒷모습이 보였다.

* * *

“이동 마법은 어렵지만 활용이 무궁무진한 마법이기도 하니, 차근차근 되새기면서 의문점이 있으면 찾아오거라.”

“네, 할아버지. 오늘 수업 너무 흥미로웠어요.”

모처럼의 마법 이론 수업을 마치고, 루시엘이 가방을 정리해 길리아트의 서재를 나오는 길이었다. 에리카가 반가운 낯으로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루시엘 아가씨, 아니 결혼하셨으니 아가 마님으로 불러야 할까요?”

“편한 대로 부르셔도 좋아요.”

그러나 그녀는 퀭한 눈동자에 피부도 푸석푸석해져 있었다.

“에리카 언니, 괜찮아요? 아파 보이는데 혹시 과로하신 건 아니겠죠? 괜히 부탁을 드렸나 봐요…….”

“아뇨, 아뇨! 정말 흥미진진한 연구였어요.”

에리카의 반짝이는 눈은 학자로서의 탐구심을 자극하는 이상의 것을 발견한 듯한 눈이었다. 루시엘은 얼른 그녀를 데리고 아기 영지로 이동했다.

“이곳이 다 아가 마님의 소유지라고요?”

루시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원한다면 여기에 에리카 언니를 위한 공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말요? 그것보다 아가 마님.”

에리카가 루시엘의 손을 가만히 붙잡았다.

“그 에메랄드는 상상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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