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어, 어떡하지. 키제프가 본 건가? 하지만 여기서 티를 내면 안 되는데. 자연스럽게 넘기자.’
“……아, 으응. 바, 반짝이고 예쁜 걸 좋아하는 취미가 있거든.”
“그렇군.”
“근데 보석은 누구나 다 좋아하지 않아?”
루시엘이 과거에 겪었던 이들은 전부 보석을 보면 환장하며 눈이 뒤집혔다.
아이를 팔고, 누군가를 이용해서라도 손에 얻으려고 했다. 가져도, 가져도 그 끝을 몰랐다.
인간이 가진 탐욕은 끝이 없으니까.
“난 아닌데.”
키제프의 대답에 루시엘은 눈썹을 까딱 올렸다.
‘……보석 안 좋아하는 사람, 처음 봐.’
그건 루시엘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어, 어떻게 보석을 안 좋아할 수가 있어?”
“옷이나 액세서리에 딱히 치장하는 거 싫어해.”
“……아니 그런 거 말고. 누가 귀한 보석을 준다고 해도 싫어?”
“응, 이유 없이 귀한 물건을 주는 건 더 싫어. 보석의 가치를 몰라서가 아니라 나에게는 금화나 보석이나 비슷해. 자산을 이루는 많은 구성 중 하나일 뿐이야. 형태가 아름다울 뿐.”
이런 사고방식도 있다니 놀라웠다. 태생부터 모든 게 완벽하게 갖춰진 그에게는 가능할지 몰랐다.
“그렇구나.”
“그렇지만 좀 특별한 보석은 다를지도.”
“…….”
“네 눈, 보석보다 더 반짝반짝해.”
키제프는 루시엘의 루비 같은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꼭 모든 걸 알고서 말하는 거 같아.’
루시엘은 침을 꼴깍 삼켰다. 키제프는 루시엘에게 한 발 다가오며 물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응?”
“……막시무스 폰 카빌과 어떤 사이야?”
느닷없는 질문에 루시엘은 깜짝 놀라 눈동자만 크게 굴렸다.
과거라면 모를까, 이번 생에선 그와의 인연은 없었다. 아니, 만들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지난번 불의 제단 일로 아카데미에서 마주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게 누구인데? 난 모르는 사람인데.”
루시엘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때 너한테 돌멩이를 던지고, 아이들을 부려 먹던 대장 같은 아이.”
“아아…… 기억났다.”
“정말 몰라?”
키제프는 구깃구깃하던 종잇장의 이름들 아래에 쓰여 있던 바퀴벌레 똥이라는 웃긴 욕설을 떠올렸다.
모르는 사이에서는 분명 나올 수 없는 욕설이다.
막시무스 자식. 루시엘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게다가 다른 이름들도 다 무슨 사연일까? 루시엘,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지금 종이를 가져와 묻는다고 해도 루시엘은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으응. 그건 왜?”
“아냐. 아무것도.”
키제프가 저걸 어째서 물어보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시엘은 이야기의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의 옷깃을 슬쩍 끌며 루시엘이 말했다.
“가자. 웃긴 거 보여 줄게.”
“응?”
방에 도착해 루시엘이 모자를 뒤집어쓰고 방울을 잡아당기자 삐입 소리가 났다. 키제프의 눈동자가 몹시 커지더니 쿡쿡 웃었다. 루시엘이 피잇, 하며 말했다.
“나 바보 만들려고 준 거지?”
“아니, 절대로 아니야!”
키제프가 고개를 붕붕 젓고는 다시 힐끔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귀여웠다.
‘미쳤네. 루시엘. 심각하게 귀엽잖아…….’
괜찮아졌나 싶었던 키제프의 양 귀가 새빨갰다.
“키제프, 더워?”
“어어, 약간.”
키제프는 셔츠의 단추를 한 개 풀면서 다른 곳을 보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부부 별궁에서 같이 지내라고 하셨어.”
“……뭐? 왜?”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결혼했으니까. 근데 왜 그렇게 놀라?”
“어,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루시엘은 잠시 돌아서서 속으로 마구 생각을 터트렸다.
‘그러면 키제프랑 같이 지내야 하는 거야?’
‘말도 안 돼. 이제부터 서로 신경 안 쓰고 지내야 하는데?’
‘……보석은 어떻게 만들지?’
하나부터 열 가지가 다 문제였다. 잠깐, 그러고 보니 키제프도 자신과 같이 지내는 걸 원치 않을 텐데.
“……키제프는 나랑 같이 지내도 괜찮겠어?”
루시엘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묻자 키제프가 답했다.
“괜찮고말고. 넌…… 싫어?”
루시엘의 표정을 살피던 키제프가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니, 안 싫어.”
“그거 다행이네.”
루시엘의 대답에 키제프가 해사하게 웃으며 입꼬릴 올렸다.
“……그럼 앞으로는 부부 별궁에서 같이 지내는 거네.”
“응.”
“앞으로 잘 부탁해.”
루시엘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키제프가 그 손을 폭 감싸듯 양손으로 꼭 붙잡았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 내 신부님.”
귓가에 감미롭게 파고드는 키제프의 목소리, 오랫동안 응시하는 시선에 루시엘의 뺨이 붉어졌다.
“그, 그런 말은 안 해도 돼!”
키제프에게 붙잡힌 손을 다른 손으로 빼 보려고 했지만, 키제프는 다른 나머지 손도 폭 감싸 버렸다.
핏빛 눈동자가 심술궂게 빛나며 속삭였다.
“사실인걸.”
손을 풀어 준 키제프는 루시엘의 볼을 살짝 어루만졌다.
“계약이든 뭐든 부부니까 말이지.”
“…….”
루시엘은 그 순간 키제프가 묘하게 악마 같다고 느꼈다.
* * *
벨슈타인 공자의 결혼 소식은 제국 전역으로 삽시간에 퍼졌다. 이어 피로연 성문 개방을 모두가 고대하고 있었다.
이 기회에 벨슈타인에 연을 대 보려는 사업가나 고위 귀족, 상단주들도 있었고 그간 사교계 활동은 전무하다시피 한 벨슈타인의 새로운 중요 인물로 루시엘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사교계에 관심이 없는 것은 벨슈타인이지, 막상 사교계에서 벨슈타인은 늘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었던 터였다.
벨슈타인의 초청장을 받은 귀족들은 황성 연회만큼이나 피로연을 기다리며 참석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벨슈타인과 왕래가 있는 가문에게만 보냈던 터라, 아무나 갈 수 없는 피로연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이변이 벌어졌다.
그 가문 중에 카빌 후작가가 포함되었기 때문이었다.
“마님! 마님! 초청장이 왔습니다.”
검은 드래곤의 인장이 찍힌 초청장을 받아 본 카빌 후작 부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베, 벨슈타인에서 초청장이라고?”
초청장에는 귀빈을 초청해 자리를 빛내 주십사하는 정중한 내용뿐이었다.
벨슈타인과 대외적으로는 접점이 적었지만, 남편의 사업 성격상 물밑으로는 접촉이 있기도 했다. 다만 서로 탐탁지 않은 상대랄까. 하여 그녀는 미심쩍다고 느꼈다.
벨슈타인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력이 큰 가문이니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했지만, 의상실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으니 마냥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무서운 소문처럼 공작가에 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그런 쓸데없는 걱정도 들었다.
카빌 후작가 또한 여러 불법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자금만 해도 어마어마해, 그 힘을 무시할 수 없는 가문이었다.
심장께를 쓸어내리던 후작 부인은 마침 층계에서 페넬로페와 내려오던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여보, 이걸 어쩌면 좋죠? 벨슈타인에서 초청장이 왔어요. 벨슈타인 공자의 결혼 피로연회 초청장 말이에요.”
“어디 이리 줘 보시오.”
카빌 후작은 초청장을 탁 하고 잡아챘다. 내용을 읽고 난 후작의 눈동자가 빠르게 이리저리 굴렀다.
‘벨슈타인이 대체 무슨 꿍꿍이지?’
벨슈타인과는 지난번 고리대금업 사업 문제도 엮여 있는 터라, 부담스러운 초청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의 기회였다.
보석안을 가졌다는 공작의 며느리를 확인해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만일 그게 진짜라면 그것이야말로 큰 수확이었다.
후작은 두툼한 입술을 매만지다가 말했다.
“연회에 갈 준비를 하도록 하시오. 십여 년 만에 열리는 성문이라니, 그날을 놓칠 수는 없지. 가 보기만 해도 좋은 구경이 될 거요.”
“……진심이에요?”
“당신도 벨슈타인과 척을 지면 좋을 것 없다고 누누이 말했잖소. 이제 사이좋게 지내 보려고 하는 거지.”
그가 싯누런 이를 드러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후작 부인은 평소 공작가를 늘 못마땅하게 여기던 제 남편이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구는 건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페넬로페도 평소 벨슈타인에 반감을 갖던 아버지를 기억하기에 의문을 표했다.
“근데요, 아버지. 벨슈타인은 시커먼 마족의 피가 흐른다고, 위험한 족속들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페넬로페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는 듯 고개를 설레 저었다.
“때로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값진 것을 얻어 내야 하는 법이 아니더냐. 벨슈타인에 가는 것이 득이 된다면 안 갈 까닭이 없다. 너도 다른 사교계 친구를 사귀어 볼 기회가 되지 않겠느냐.”
“벨슈타인 같은 북쪽 구석에서 저랑 맞는 친구를 찾으라고요?”
페넬로페가 볼을 잔뜩 부풀리며 말했다. 가끔은 이렇게 영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을 피우는 모습이 카빌 후작에겐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피피, 우리 강아지. 벨슈타인에는 황족이나 왕족에 버금가는 고위 귀족들만 올 거란다. 우리 격에 맞는 아이를 만날 수 있을 거니 걱정 마라.”
“정말요?”
“물론이다.”
“그러면 가 볼게요.”
“자, 어서 드레스나 맞추러 가자꾸나. 어쩌면 황자 전하가 오실지도 모르니 말이다.”
황자 전하라는 말에 페넬로페가 눈을 반짝거렸다.
“대신에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공작가의 며느리에게 제대로 사과를 해라.”
카빌 후작의 말을 들은 페넬로페가 인상을 팍 썼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요?”
“지금은 네가 그 계집애에게 고개를 숙이겠지만, 언젠가는 네 발밑에 꿇을 날이 올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정말 그럴 날이 올까요?”
“이 아비가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 걱정 말아라.”
카빌 후작은 제 딸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정하게 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