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한편 신랑 대기실에서는 키제프가 조용히 소파에 앉아 창가 너머의 꽃나무를 슥슥 스케치 중이었다.
정장이 구겨진다고 에바가 보면 경악하겠지만, 이미 준비는 끝났고 가족들도 잠깐씩 인사를 다녀갔다.
아직 얼굴을 보지 않은 사람은 공작과 신부인 루시엘뿐이었다.
루시엘 생각에 키제프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계약 결혼의 상대지만 루시엘과는 짧은 기간 많은 일을 겪었다.
아카데미와 피닉스 사건에서 그 조그만 아이가 자신을 구하려고 뛰어들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다.
루시엘은 보호 본능이 절로 일어날 만큼 연약해 보이는 아이였다.
루시엘이 잠들어 깨지 못할 때는 저도 모르게 기도했었다.
‘제발 그 아이를 깨어나게만 해 달라고…….’
루시엘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지.
뿐인가.
테드라는 이름으로 날아온 편지들은 그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테드의 정체가 루시엘이었다는 걸 알고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보다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렇지만 이따금 루시엘을 떠올릴 때면 보드랍고 말랑한, 달콤한 어떤 것이 키제프의 마음을 도닥여 줄 때가 있었다.
그 아이가 먹는 달콤한 솜사탕처럼 무언가 사르르 내려앉기도 했다. 그건 키제프가 가진 어둠을 잠시 잊게 할 만큼 밝게 빛나기도 했다.
키제프는 꽃나무 아래에 자그만 토끼를 하나 그렸다.
하얗고 작은 토끼.
작고 연약한 주제에 마음만은 강해 위로받게 된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렇게 벨슈타인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제는 자신이 루시엘을 지켜 줘야지. 시작은 계약이었지만 결국 가족이 되었으니까. 키제프는 루시엘의 볼을 두드리듯 그림 속 토끼를 톡톡 두드리며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네 결혼식인 걸 잊은 건 아니겠지.”
키제프의 손을 멈추게 한 건 느른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아버지.”
키제프가 스케치하던 것을 내려놓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루이비드는 다가와서 손수 키제프의 구겨진 옷매무시를 가다듬어 주었다.
선이 고운 건 솔리아페를 닮았지만 눈부신 금발이라거나, 요요한 붉은 눈동자라거나, 단정한 이목구비는 자신을 전부 빼다 박았다.
루이비드는 아들의 양어깨를 붙잡고는 키제프를 보며 입매를 올렸다.
“벨슈타인 중 내가 제일 잘생긴 줄 알았는데 그 자린 넘겨줘야겠군.”
“……예?”
키제프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는 외모 칭찬 같은 걸 하는 분이 아니었다.
“너희들 결혼도 했으니 이제 부부 별궁으로 거처를 옮겨라.”
“……부부 별궁이라니요?”
키제프의 눈이 잠시 커졌다. 뜻밖의 말에 목을 살짝 긁적이며 괜한 말을 했다.
“그 아이는 시녀의 보살핌이 아직 필요할 겁니다.”
키제프의 말에 공작이 픽 웃음을 삼켰다.
“너무 어린 아내라 이건가? 그럼 남편이 보살펴 줘야겠군.”
“…….”
공작이 아들을 놀리듯 흘낏 쳐다보며 어깨를 두드렸다. 키제프의 양 귀가 발갛게 물들었다.
공작은 키제프가 공작성에 귀환하자마자 루시엘과 만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솔직하지 못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는 방을 떠나며 말했다.
“이제 네 신부를 에스코트하러 가야겠다. 너도 출발해.”
* * *
“루시엘.”
얌전히 나갈 시간을 재면서 기다리고 있던 루시엘 앞에 루이비드가 커튼을 걷으며 들어왔다.
그의 모습을 본 루시엘은 꽃망울처럼 맑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분홍색 수트가 너무 잘 어울리고 근사하세요.”
그는 몹시 화사한 연분홍빛 정장을 입었는데, 평소의 냉기 폴폴 풍기는 분위기와 상반되긴 하지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본래는 신부 측의 아버지가 분홍빛 정장을 입는 게 관례였지만, 루시엘의 아버지는 참석할 수 없으니 그가 대신 입고 나타난 것이다.
“으흠, 그러하냐.”
살짝 민망하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공작은 주먹에 대고 헛기침을 했다.
루시엘이 귀엽다는 사실은 이미 뇌리에 박히도록 알고 있었지만,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은 몹시 사랑스러웠다. 인형이나 천사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자신을 올려다보는 루시엘을 보고 루이비드는 꿀처럼 눈빛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우리 새아가의 귀여움은 이 세상 것이 아니군.”
무심결에 벽을 쿵 쳐 버린 공작의 동작에 쩌저적, 실금이 갔다. 루시엘이 놀란 건 물론이고, 뒤에 대기하던 시녀들도 깜짝 놀랐다.
“……헉, 시아빠. 손 괜찮으세요?”
루시엘의 얼굴은 어느새 울상이 되고 말았다.
“……괜찮다.”
주먹이 약간 얼얼하긴 했지만, 공작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장갑을 껴 버렸다. 그러곤 정신을 차리고, 루시엘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가자, 루시엘.”
“네.”
루시엘이 조심스레 공작의 품에 안겼다. 뒤에 있던 시녀들은 루시엘의 드레스가 구겨질까 봐, 안절부절못했지만 차마 공작 앞이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혼식이 있는 백조 정원까지 공작은 루시엘을 안아 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화창한 유월의 바람이 상큼했다.
오직 벨슈타인가의 직계 가족들과 가까운 사용인들만 모인 비밀스러운 결혼식이었다.
행복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백조 정원은 청초하고 순수한 분위기로 꾸며졌고, 작약과 장미에 하늘색 수국과 하얀색 카라, 은방울꽃도 더해져 신부의 귀여운 이미지와 어울리게끔 장식했다.
새하얀 정장을 차려입은 키제프는 금발을 한쪽으로 넘겨 이마가 슬쩍 드러났다. 덕분에 오뚝한 콧날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더 돋보이는 듯했다.
열세 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훌쩍 큰 키는 수트가 미끄러지듯 잘 어울렸다.
“키제프는 날이 갈수록 제 아비를 쏙 빼닮았구나.”
이벨린이 대견하단 얼굴로 솔리아페에게 속삭였다.
“그래서 작은 루이지요. 저러고 있으니 정말 그이가 루시엘의 아버지 같네요.”
솔리아페가 웃음을 슬쩍 참으면서 말했다. 이벨린도 동조했다.
“그러게 말이다. 그나저나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뉴나 엄청 예뻐요. 나두 뉴나랑 결혼할래!”
“레오니, 누나는 이미 결혼해서 안 된단다. 다른 아가씨를 찾아보자.”
솔리아페가 웃으면서 레오니를 도닥였다.
베시는 루시엘이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살짝 훔치기까지 했고, 로즈는 세기의 미남미녀의 만남이라며 흥분했다.
잔잔한 피아노와 바이올린 현악기의 이중주가 울려 퍼졌다. 공작이 루시엘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었다. 그러곤 키제프에게 루시엘의 손을 넘겨주었다.
살짝 키제프를 바라본 루시엘은 깜짝 놀라 눈이 커졌다.
‘머리 모양이 바뀌어서 그런가? 다른 사람 같아.’
오늘 키제프는 어느 왕국의 왕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멋졌다.
지난번 솜사탕 사건 이후로 오늘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훌쩍 키도 크고 잘생긴 키제프를 보고 있자니, 루시엘은 자못 너무 작고 어린 자신이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개졌다.
“……왜 그래? 어디 아픈가?”
그런 루시엘에게로 키제프의 붉은 눈동자가 내려앉더니 걱정을 담아 말했다. 숨 쉬듯 하는 귓속말에, 두런두런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다정하게만 들렸다.
“아니.”
루시엘은 애써 상기된 얼굴과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어. 장하다, 루시엘. 노력한 결과가 이거잖아. 계약 결혼!’
물론 이건 장밋빛 미래를 위한 생존 수단으로서의 결혼이지만. 먼 여정의 첫걸음을 떼었다.
이제 결혼도 했으니 앞으로 8년간은 안전하게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
카빌 후작가와 황태자의 눈을 피해서 보석을 힘으로 바꾸고, 마나도 안정시키고, 벨슈타인을 지키는 것.
그것이 루시엘의 최종 목표였다.
시클라인과 막스 하멜, 에리카. 이제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하나둘 모여 가고 있으니까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벨슈타인을 떠날 때가 되면 조용히 내 살길을 가는 거야.’
루시엘이 문득 상념을 떨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길리아트가 따뜻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의 지팡이 끝에서 뿜어진 환한 빛줄기가 둘에게 닿았다.
“……너희 둘에게 축복의 가호를 내렸다. 둘의 앞날에 행복만이 가득하길 바란다.”
길리아트가 키제프와 루시엘 두 아이에게 축복의 말을 전한 다음, 직접 두 사람에게 작은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주었다.
“예물을 생략하긴 아쉬워 이 할애비가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
참깨처럼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깔끔한 반지였지만 안쪽에 두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언제 어디에 있든 단숨에 서로에게 이동할 수 있을 거다.”
키제프가 루시엘의 작은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무척 클 것 같았는데 사용자의 사이즈에 맞게 변하는 마법이 걸려 있었는지, 끼우자 꼭 맞았다.
‘이동 마법이 걸렸나 봐.’
루시엘도 키제프에게 반지를 끼워 주었다.
화동을 맡은 레오니가 두 사람에게 분홍색 꽃잎을 뿌려 주었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나서 둘을 축복하며 박수를 보냈다. 어느덧 결혼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왈츠를 출 차례였다.
둘의 키 차이가 나는 바람에 키제프가 몸을 깊게 숙이고, 장갑 낀 손을 내밀었다.
“왈츠 출 수 있겠어?”
“응.”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로 손을 맞잡았다. 잠시 손바닥을 쫙 펼쳐 크기를 비교하니 루시엘의 손이 너무 앙증맞게 작았다.
“진짜 작네.”
하얗고 보드라운 것이 정말 자그만 토끼 앞발 같았다. 특히나 기후가 낮은 벨슈타인 영지에서만 볼 수 있는 눈토끼를 닮았다. 눈토끼는 일반 토끼보다 더 앙증맞게 작고 털도 복슬복슬했다.
“……한참 자라야겠어. 아직 덜 자란 눈토끼 같잖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