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난 줄 알았어? 안 놀라네.”
“응. 다 보였는걸.”
루시엘이 말하는 순간에도 솜사탕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돌려서 뜯어냈다.
“이거 어떻게 구한 거야?”
“그렇게 함부로 먹으면 곤란한데.”
“앗…… 미안. 내 거인 줄 알고.”
루시엘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사과했다. 키제프가 말했다.
“네 거 맞아. 선물.”
“정말?”
키제프의 시선이 루시엘의 촉촉한 눈망울에 닿았다.
“그러니 울지 마.”
루시엘이 부정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고작 그런 거로 안 울어.”
“그렇담 다행이군.”
루시엘은 그제야 안심하며 솜사탕을 보면서 살짝 웃었다.
“고마워. 정말 어떻게 가져왔어?”
“그냥 잘.”
무심하게 툭 내뱉긴 했지만 일자로 다물어진 단정한 입술이 슬쩍 올라갔다.
달콤한 딸기 맛이 나는 사탕 구름을 떼어 먹는 것 같았다.
“진짜 맛있다. 너무 좋아. 고마워, 키제프”
루시엘이 생긋 미소 지어 주는 순간, 키제프는 휙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좋아할 건 또 뭔데……. 솜사탕이 오기만을 기다렸나?”
“……조금?”
키제프가 말없이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가만히 응시했다. 이제 보니 키제프는 진짜로 키가 컸다.
루시엘과 나란히 서면, 네 살 나이 차이가 무색할 만큼.
키제프의 가슴과 배 사이쯤에 루시엘의 머리가 겨우 왔다.
생각해 보면 열두 살인 에레스와는 한 살 차이면서 체격의 차이가 엄청났다.
이건 거의…… 닭과 병아리의 차이?
‘키제프는 애어른이라서 그런가?’
에레스와 있을 때와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또래라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러고 보니 키제프는 남색의 수트 위에 까만색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마법사의 정장 같은 느낌이 들어 근사했다.
교복을 입은 모습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루시엘. 아기는 잘 시간이네. 솜사탕은 내일 마저 먹어.”
“으응. 근데…… 왜 토끼야?”
루시엘은 솜사탕을 오물거리느라 통통해진 뺨을 살짝 쓸면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키제프의 붉은 눈이 루시엘에게 닿았다.
“너 같아서…….”
이건 칭찬일까? 루시엘은 왠지 볼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도 선물 주기로 했는데…….’
하지만 도저히 실행할 자신이 없었다. 사실은 로즈와 베시에게 슬쩍 물었다.
결혼 전 약혼자에게 가장 좋은 선물이 무엇이냐고.
그러자 대번 키제프 도련님에게 줄 선물인 거냐면서 꺅꺅하는 외침과 함께 두 사람은 온갖 의견들을 주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보고 싶었다는 말과 함께 꼭 껴안아 주는 게 가장 좋다고 했다. 조금 더 어른이 되면 다른 좋은 선물이 있다나?
루시엘은 얼굴에 홍조가 올라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키제프는 이 선물 안 좋아할 것 같은데…….’
“잘 자, 꼬맹이 토끼.”
“응. 잘 자, 키제프도.”
그가 루시엘을 향해 손을 흔들고 나가려다가, 힐끔 솜사탕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밤에 솜사탕 먹으면 이빨 썩으니까 이건 일단 압수다.”
“어? 아니, 안 먹을 거야.”
그러나 그에겐 통하지 않았다. 키제프가 솜사탕을 가져가려고 하자, 루시엘이 빼앗기지 않으려고 막대를 붙잡았다.
이미 막대를 잡고 있던 키제프의 손 위로 루시엘의 자그만 손이 포개진 꼴이었다.
“아, 안 먹을 거야.”
어색함에 일부러 중얼거리던 루시엘이 손을 얼른 빼냈다. 키제프에게서 한 발 멀어지려다가 이번에는 드레스 자락을 밟고 미끄러지고 말았다.
“……어, 어어?”
순간 키제프가 다른 한 손으로 루시엘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여전히 솜사탕 막대를 잡은 채였다.
억센 팔 힘에 놀라면서도 루시엘은 그만 이 상황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였다. 키제프가 쿡 웃으면서 솜사탕을 벽에 잠시 세워 두었다.
“괜찮아?”
“어? 으응.”
“어디 가려고 했어?”
“그만 쉬려고.”
루시엘이 침대 쪽을 가리켰다.
“데려다줄게. 넘어질까 불안해.”
키제프가 공주님처럼 안아 들어서 침대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루시엘의 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루시엘은 침대 안으로 들어가서는 키제프가 덮어 주는 이불을 덮고 누웠다. 그가 루시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잘 자.”
루시엘은 민망함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폭 뒤집어썼다.
그때 책상에 구겨진 종이를 발견한 키제프는 그걸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혹시 나에게 편지 쓰던 중인가?’
키제프가 나가자마자 루시엘은 양 갈래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면서 생각했다.
문제의 그 선물은 안 하길 천만다행이었다. 그랬음 더 창피했을 거야.
* * *
시간은 흘러 유월의 첫날이 되었다. 푸릇푸릇한 잎사귀들이 바람에 산들거리며 초록을 자랑하는 계절.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을 예고하듯 햇살은 한결 따사롭게 내리쬐었다.
산호색 장미와 연분홍빛 작약이 공작성의 정원을 가득 물들이고 있었다.
약식으로 하는 계약 결혼 따위,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마음도 먹고 잤는데. 아침이 되니 그 모든 결심이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오늘은 루시엘의 열 번째 생일이자, 결혼식이었다.
루시엘은 졸린 눈을 하면서도 베시의 손길에 이끌려 세수를 하고, 깨끗한 장미수에 목욕을 했다.
길고 풍성한 은빛 머리카락도 오늘은 이벨린 할머니가 직접 솜씨를 보여 주셔서, 군데군데 땋아서 둥글게 말아 올렸다.
머리에는 연분홍색 작약으로 만든 어여쁜 화관을 씌웠다.
그저 머리만 바꾸었을 뿐인데도 루시엘의 얼굴이 한층 살아났다.
루시엘은 워낙 피부가 곱고 뽀얀 편이라 따로 화장은 하지 않고 분홍색이 도는 꽃잎을 빻은 즙만 살짝 발랐다.
큼지막한 보석 같은 눈동자와 앙증맞은 코와 입술, 발그레한 복숭앗빛 뺨이 그야말로 요정 같은 자태 그 자체였다.
“정말 예쁘구나, 루시엘.”
“할머니도 정말 우아하세요.”
회색의 우아한 드레스로 멋을 부린 이벨린이 흐뭇한 얼굴로 루시엘을 눈에 담았다.
웨딩드레스는 이벨린이 사 준 다이아몬드 드레스로 낙찰이 되었다.
다른 신부들은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데에만 한참이 걸린다는데 이거라도 줄여서 다행이라고 루시엘은 생각했다.
왜냐하면 피로연에 쓸 색깔 있는 드레스와 들러리 드레스, 부케와 화관, 액세서리와 구두까지. 무엇 하나 허투루 골라야 하는 것이 없던 터였다.
“자, 이제 다 되었어요.”
“여기, 거울 좀 보세요, 아가 마님.”
“어쩜 이렇게 예쁘실까.”
다이아몬드가 별처럼 총총총 박힌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자신을 본 순간. 루시엘은 그만 뺨에 홍조가 올라오며 심장이 콩닥콩닥 뛰고 말았다.
루시엘이 입은 드레스의 치맛단은 레이스가 몇 겹이나 되어 있어서 풍성했고, 허리에는 하얗고 커다란 리본이 둘러져 있었다.
루시엘은 다른 여자아이들보다도 더 체구가 작아서 드레스를 여러 번이나 수선했다고 들었다.
“루시엘, 천사가 따로 없는걸.”
하늘색의 목선을 드러낸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솔리아페가 작약과 라넌큘러스를 섞어서 엮은 부케를 건네주었다.
“감사해요. 어머님!”
루시엘이 살짝 어색하지만 처음으로 솔리아페에게 폭 안겼다.
‘심장이 두근두근해.’
드디어 고대하던 결혼이었다.
진짜 벨슈타인가와 결속을 맺게 되었다.
이제 오르비아 백작도, 카빌 후작도, 심지어는 황실의 황태자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벨슈타인의 울타리 안에서 그들의 진정한 가족이 되었다.
매일 밤 잠들면서 울던 루시엘은 더는 없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내일을 기다리는 소녀가 있을 뿐.
그래서 루시엘은 오늘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기로 했다.
* * *
한편 신부 대기실 앞에는 루시엘을 보려고 레오니가 서성거렸다.
“뉴나, 왜 안 나오눈 고지.”
레오니가 불룩하게 부푼 뺨을 씰룩이면서 중얼거렸다.
포마드로 넘긴 머리와 하늘색 연미복에 하얀 리본 타이가 깜찍했다. 포켓에는 분홍빛 작약을 한 송이 꽂아서 평소보다 점잖아 보였다.
“본래 레이디들은 준비가 오래 걸리는 법이란다.”
길리아트가 레오니를 번쩍 안아 올리면서 말했다. 길리아트도 연보라색 연미복 차림에 긴 백금발을 낮게 묶어서 평소보다 낯빛이 환해 보였다.
그 역시 레이스 커튼이 드리워진 신부 대기실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어서 루시엘이 나오길 바라는 건 레오니와 마찬가지의 마음이었으니까.
먼저 나온 이벨린은 두 신사를 보면서 웃었다.
“자자, 그만 식장으로 먼저들 가 있어요. 새 신부 얼굴은 비싼 법이에요. 귀여운 신사님, 이 할머니를 에스코트해 주는 건 어떠니?”
이벨린이 레오니의 불룩한 뺨을 톡 건드렸다.
“녜.”
“자, 그럼 이 할미 품으로 건너오세요.”
이벨린이 장난스레 말하면서 길리아트에게서 레오니를 받아 품에 안았다.
“당신은 솔리아페 데리고 와요.”
“허허허, 알았어요.”
마침 고개를 빼꼼 내민 솔리아페에게 길리아트가 신사답게 에스코트를 청했다.
“네 아들은 이벨린이 빼앗아 갔으니 오늘은 나랑 가야겠구나, 솔리아페.”
“……아버님.”
길리아트의 팔짱을 가볍게 낀 솔리아페는 조용히 웃었다. 결혼식이 꾸며진 백조 정원에 다다를 때까지 두 사람은 풀밭을 걸었다.
이렇게 나란히 걸어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솔리아페, 요즘은 얼굴이 밝구나.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이렇게 가족들이 다 같이 모인 것이 얼마 만인지.”
솔리아페가 기억하는 시아버지는 언제나 단단한 바위 같은 분이었는데, 요즘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참, 돌아와 줘서 고맙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그간 걱정 많이 끼쳐 드려 면목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렇게 왔으니 되었다. 사람은 각자 바라보는 풍경도, 그려 가는 그림도 다른 법이지.”
길리아트가 며느리를 따뜻하게 독려했다.
“이게 다 우리 새아가 덕분인 것 같아요.”
솔리아페가 웃으면서 루시엘을 입에 올렸다.
“허허, 루시엘이 우리 솔리아페 마음도 사로잡았더란 말이냐?”
솔리아페가 빙그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아이는 사람의 마음을 여는 재주가 있어요. 제가 복이 많습니다, 아버님.”
“허허, 나에게는 너희 두 사람 모두 친딸 같고, 친손주 같다. 그러니 내가 가장 복 많은 이로군.”
어느덧 백조 정원에 다다르자 화사한 웨딩 장식이 눈을 기쁘게 했다.
“가요, 아버님.”
“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