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반주가 시작됨과 동시에 키제프가 루시엘의 손을 이끌었다. 한결 짙어진 소년의 눈빛에 루시엘은 괜스레 시선을 피하며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키가 큰 탓인지 키제프는 조금 걸음이 빨랐다.
“앗.”
루시엘이 드레스에 걸려 넘어질 뻔한 순간 키제프가 자연스럽게 허리를 붙잡아 올리자, 발이 동동 떴다.
이렇게 가깝게 있으니 지난번 솜사탕의 일도 떠올라 부끄러움에 그만 얼굴이 붉어졌다.
“나 내려 줘.”
“조금 천천히 출까?”
“……응.”
그제야 둘은 서로의 속도에 맞추어서 춤을 시작했다.
우아하지만 경쾌한 곡이라 리듬이 제법 흥겨웠다. 춤을 추다 보니 재미있어져서 루시엘은 열심히 춤을 추었다.
문득 키제프의 시선이 느껴져서 그를 바라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그는 모른 척 계속 춤만 추었다.
‘응? 내 착각인가?’
가족들은 둘의 왈츠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춤을 추는 도중 루시엘은 키제프를 힐끔 바라보았다. 돌고 돌아 비로소 결혼식을 마쳤다. 키제프도 지겨운 아카데미를 벗어났으니 외롭지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를 귀찮게 하지 않기로 약속한 건 루시엘 본인이었다. 결혼도 했으니 이제 키제프에게 도움받을 일은 더는 없으니까, 그가 신경 쓸 일이 없게 잘 행동해야지.
“이제 나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무슨 뜻이지?”
“덕분에 이렇게 무사히 결혼도 했고, 이제는 안전하게 됐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귀찮게 하는 일 없을 거야.”
루시엘이 말을 마치자 키제프의 표정은 미묘했다. 짙은 눈썹이 약간 일그러진 것 같기도 했다.
“……우리, 그러기로 약속했었잖아.”
“그랬지. 네가 전서구를 보내기 전까진.”
“응. 서로 상관하지 않기로.”
루시엘이 그렇게 말하자 키제프의 표정은 조금 더 일그러졌다. 그러곤 붉은 눈동자로 루시엘을 한참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응?”
키제프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루시엘은 알 수 없었다.
‘키제프도 그걸 원하는 거 아니었어?’
루시엘은 당황해서 왈츠의 박자를 약간 놓쳤다. 그러나 에바와 연습을 해 두어서인지, 루시엘은 키제프의 발을 밟지 않고 왈츠를 마칠 수 있었다.
‘나 무슨 실수라도 한 거야?’
왈츠를 마친 키제프는 루시엘에게 다가오는 시녀들을 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툭 던지고는, 다시 평소처럼 말했다.
“신경, 쓸 거라고. 이따 보자.”
“으응.”
그렇게 안 되겠다는 둥, 신경 쓰겠다는 둥 전부 무슨 말일까. 이상한 말들이나 해 대고, 오늘 키제프는 정말로 이상했다.
아리송한 표정으로 서 있던 루시엘은 로즈와 베시에게 곧 둘러싸여 버렸다. 멀리서 루시엘을 여전히 응시하던 키제프도 몸을 돌렸다.
“루시엘 아가씨! 큰 마님께서 부르세요.”
“아, 으응.”
루시엘은 키제프의 돌아선 모습을 바라보다가 서둘러 이벨린이 앉아 있는 연회 테이블로 가 보았다. 그녀는 루시엘을 꼭 안아 주며 말했다.
“루시엘. 이제 진정 우리 벨슈타인의 새아가가 되었구나.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니?”
“진짜 가족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래, 맞다. 진짜 가족.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이지. 그리고 네가 미래의 안주인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줄 것이 있단다.”
이벨린은 웃으며 에바에게 부탁한 상자를 가져오게 했다. 벨벳 상자 안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루비 목걸이와 팔찌가 들어 있었다.
루시엘의 눈동자와 꼭 같은 색이었다. 지난번 보석 금고를 구경할 때 루시엘이 예쁘다고 했던 것인데 기억하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할머니이. 지난번 주신 것만으로도 과분한데.”
“쉿, 그리고 이것 소중히 간직하거라.”
이벨린이 자그만 벨벳 주머니를 루시엘에게 따로 건네주었다. 슬쩍 보았더니 천사궁 열쇠가 들어 있어서 깜짝 놀랐다.
“하, 할머니, 이건 금고 열쇠인데…… 왜 제게.”
“우리 벨슈타인의 안주인만이 이 열쇠를 가질 자격이 있단다. 똑같은 열쇠를 나와 솔리아페도 가지고 있어. 그러니 루시엘도 이제 자격이 있단다.”
자격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었다. 루시엘은 열쇠를 소중히 받아 들고는,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 제가 무얼 하면 되나요?”
“안주인이 해야 할 일들은 무척 많단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큰 것들까지. 하지만 아직 우리 아가는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 어른들이 있으니까 말이지.”
이벨린이 루시엘의 코를 톡 건드리면서 웃었다.
“일단은 이걸 잘 간직하고 무엇이 있는지 잘 파악해 두렴. 그리고 네 나이 때는 아직 놀기만 해도 된단다.”
“네, 할머니.”
루시엘은 열쇠가 든 주머니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품속 깊이 챙겨 넣었다.
결혼식은 어느새 루시엘의 생일 파티로 이어졌다. 주방장 세스의 토끼 모양 케이크에는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로즈와 베시는 루시엘에게 핑크색 딸기가 그려진 가방을 선물해 주었다. 지난번 당근 가방보다 튼튼하고 예쁜 것이었다.
생일 선물을 주려고 지난번에 좋아하는 걸 물어봤던 모양이었다.
“정말 어엿한 아가 마님이 되셨어요. 생일 축하드려요.”
“디자인은 제가 하고, 베시는 바느질을 했어요. 제법 파는 것처럼 모양이 나지요?”
“아니, 이렇게 예쁜 건 어디서도 안 팔 거야. 정말 고마워.”
에바는 진실만 쓸 수 있는 마법 깃펜을, 엘링턴은 멋진 축가를 불러 주었다. 루시엘은 이게 꿈인가 싶게 황홀했다.
“다들 정말 고마워요.”
“정식으로 벨슈타인의 아가 마님이 되신 것 축하드려요.”
에바가 루시엘을 꼭 안아 주었다. 축하는 끝나지 않았다. 레오니는 직접 그린 축하 카드를 보여 주느라고 조막손으로 루시엘을 이끌었다.
삐뚤빼뚤한 선으로 루시엘과 꽃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옆에는 레오니도 있었다.
“이담에 어른 되면은 내가 뉴나 지켜 줄게. 아라찌?”
“레오니가 내 기사님 되어 주는 거야?”
“녜!”
“좋아. 레오니는 멋진 어른이 되기로 누나랑 약속.”
꼼지락거리면서 두 아이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레오니가 어떤 어른이 될지는 몰라도 과거처럼 안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는 않을 것 같아 루시엘은 마음이 편안해졌다.
때마침 잠시 자리를 비웠던 키제프도 모습을 드러냈다. 격식을 차린 정장이 불편했던 모양인지, 재킷을 벗고 셔츠 차림이었다.
때마침 솔리아페가 둘을 불렀다.
“키제프, 루시엘.”
솔리아페는 두 아이에게 호신용 단검 두 자루를 주며 말했다.
“부부는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야. 언제나 서로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고 살았으면 좋겠다.”
“명심할게요.”
솔리아페는 두 아이와 눈을 각각 마주쳤다.
키제프는 언제나 말수가 적고 속마음을 잘 내비치지 않는 아이였다.
어쩌면 그런 점은 자신과 꼭 닮았는지.
“루시엘처럼 밝고 예쁜 아이가 왔으니 우리 키제프도 웃는 모습을 자주 봤으면 좋겠는데.”
“……예.”
키제프가 짤막하게 대답하자, 루시엘이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키제프 자주 웃어요. 웃는 모습이 엄청 예쁘고요.”
“그러면 이 어미는 안심이 되는구나.”
연회 테이블로 가자 케이크 앞에 가족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자, 아가 마님. 소원 빌어 보세요.”
루시엘은 눈을 꼭 감고 기도했다.
‘오늘처럼만 행복한 날이 또 오게 해 주세요. 벨슈타인의 모두가 행복하게 해 주세요.’
“생일 축하한다, 루시엘.”
“사랑하는 우리 새아가, 생일도 결혼도 모두 축하한다.”
“아가 마님, 생일 축하드려요!”
모두의 축하가 쏟아졌다. 루시엘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감동으로 심장이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그때 레오니가 짤따란 팔을 들어 키제프를 향해 말했다.
“형아, 겨론하면 남펴니랑 아내랑 뽀뽀하눈 거래써.”
“……쪼끄만 게 그런 말은 어디에서 배운 건데.”
“다 아눈 수가 있떠.”
키제프는 당황했는지 귀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레오니, 형을 놀리면 못쓴다.”
길리아트가 레오니의 뒤통수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가족들이 화기애애해진 틈을 타서 루시엘은 힐끔 눈치를 보았다.
보석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도저히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저 잠시만 방에 다녀올게요. 잊은 게 있어서요.”
“잊은 거요? 제가 갖다 드릴게요.”
루시엘이 고개를 붕붕 저은 다음 성 쪽을 향해서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도도도 뛰어갔다.
재빠르게 다람쥐처럼 달려가는 루시엘을 바라보던 키제프도 몸을 움직였다.
* * *
벌써 몇 번이나 보석이 만들어질 뻔한 걸 참았던 탓일까. 이번에는 도무지 참아 내기가 어려웠다.
“아휴, 큰일 날 뻔했다.”
겨우 방 안에 들어온 루시엘은 그제야 안심하고 중얼거렸다. 가족들에게 받은 감동을, 참았던 감정들을 하나씩 꺼내고 있었다.
“이런 게 생일이구나. 처음이야.”
생일을 챙겨 본 것도, 이렇게 모두의 사랑을 받은 것도 처음이었다.
덕분에 보석을 잔뜩 만들었다. 에메랄드와 토파즈는 이제 작은 상자가 가득 차 버릴지도 모르겠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꿈결처럼 황홀한 기분이었다.
‘세상이 내 것이 된 기분이야.’
심장 가득히 모여든 마나는 마치 샘물처럼 퐁퐁 계속 솟아났다.
또로롱.
또로로롱!
맑고 영롱한 에메랄드와 토파즈가 허공 위에 툭툭 맺히며 만들어졌다. 어느새 보석이 방안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보석…… 다 정리해야 하는데. 아, 그치만, 너무 힘들어. 마력을 너무 썼나 봐.”
루시엘은 진이 빠져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멍해진 눈으로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커다란 눈이 슬며시 감기면서 눈꺼풀이 스르륵 내려왔다. 루시엘은 세상모르고 잠이 들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는 것도 듣지 못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