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아가 마님이 아프다는 소식에 가신들은 머리를 맞대었고, 길리아트는 마탑으로 떠났으며, 루이비드는 벨슈타인도 모자라 제국 전역에서 유능한 의사를 모집 중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루시엘을 깨어나게 만들어.”
만나는 의사마다 멱살을 붙잡고 그리 협박하는 게 공작의 일과 중 하나였다.
루시엘이 긴 잠에 빠진 지 꼬박 5일이 되었을 때, 마탑으로 떠났던 길리아트가 한 마법사와 함께 돌아왔다. 체내에 흐르는 마나의 기류를 전문으로 본다는 치유 마법사였다.
그는 동그란 진찰 도구로 루시엘의 심장 쪽을 진찰하고는 단번에 원인을 알아냈다.
“최근 무리하게 마력을 사용하셨고 그 때문에 몸에 피로가 몰렸던 것 같습니다. 피로가 풀리면 자연적으로 회복이 가능하실 겁니다. 병은 아닙니다. 다만…….”
“다만?”
공작의 눈썹이 까딱 치켜 올라갔다.
“아가 마님의 몸을 도는 마나의 양이 성인 마법사의 두 배에 달합니다.”
“두 배나 된다고?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
“마나는 신체를 돌면서 흐르는 기류인데, 그것을 신체라는 그릇이 다 담아내지 못한다면 넘쳐서 이번처럼 또 깊은 잠에 빠지실 겁니다.”
“그럼 대책이 있겠는가?”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루이비드 옆에서 심각하게 듣고 있던 길리아트가 물었다.
“아직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럼 만들어라.”
“예?”
순간 얼이 빠진 마법사를 향해 루이비드가 핏빛 눈을 굴리며 말했다.
“만들라고. 우리 새아가가 힘들어하는 걸 보기가 어렵군. 아니면 자네가 한번 힘들어 보든가.”
어두운 기운을 내뿜는 공작의 기세에 놀란 마법사가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 하지만 저는 마탑에서 마도사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 딸꾹!”
“지금 받고 있는 연봉의 세 배를 책임지지.”
“끄흑…… 하, 한번 해 보겠습니다. ”
마탑 소속 마도사들은 이미 고액의 연봉을 받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쯤이야 부유한 벨슈타인에겐 발끝에 걸리는 돌멩이보다도 못한 액수였다. 새아가를 위해서라면 그 열 배라도 아낌없이 내줄 수 있었다.
“잘 생각했군. 성과 기대하지.”
공작이 원하는 답을 들은 후에야 치유 마법사는 물러갔다. 잠자코 지켜보던 길리아트 역시 걱정으로 다소 안색이 파리해져 있었다.
“이벨린의 잠을 깨우려다가 루시엘이 잠들고 말다니. 그래도 치유 마법사 말대로 루시엘이 곧 깨어난다고 하니 다행이다.”
“……반드시 깨어나게 만들 겁니다.”
공작은 책상에 앉아 잠시 그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아버지, 그날 제단의 마지막 층, 우리가 아니라 루시엘이 갔더라면 무언가 발견했을까요?”
“…….”
길리아트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래층에는 피닉스는커녕 작은 불꽃조차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느꼈던 거대한 기운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하지만 루시엘이었다면 다를지도 모르겠군.’
루시엘을 처음 데려오던 날, 가시덤불이 아이에게만 길을 열어 준 것도 그렇고 성배가 유일하게 허락한 것도 그렇고. 루시엘은 남들과 다른 순수하고 맑은 아이이니 자신들이 보지 못한 것을 찾아낼지도 몰랐다.
이번에도 키제프의 위험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지 않았던가.
‘우리 가문이 며느리 복은 타고났군.’
무뚝뚝한 제 아들까지 저렇게 만든 걸 보면 분명 서로를 아낌없이 사랑하라고 신이 내려 준 선물 같은 아이가 틀림없었다. 길리아트는 루시엘이 어서 건강히 깨어나기를 바랐다.
* * *
루시엘은 무수하게 많은 꿈을 꾸었다. 비눗방울처럼 한순간 톡 터지듯 다 사라져서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사소한 꿈들이었다.
이를테면 예쁜 드레스를 입고 악기를 연주한다거나 베시와 로즈, 셋이서 소풍을 간다거나.
레오니와 함께 귀여운 동물을 구경한다거나, 양손에 길리아트 할아버지와 시아빠의 손을 흔들면서 거리를 걷는다거나 하는.
사소하지만 즐거운 것들.
아무것도 아니지만, 루시엘이 언젠가 해 보고 싶고 원하는 것들이었다.
소소한 꿈을 꾸는 내내, 루시엘은 행복했다.
‘이제…… 일어나자.’
하지만 그 속에서도 마지막 꿈만은 생생했다.
기분 좋은 햇살이 온몸을 어루만져 주고, 상쾌한 바람이 솔솔 불어와 루시엘의 은빛 머리칼과 얇고 고운 원피스 자락을 흔들어 놓고 갔다.
파릇파릇한 토끼풀이 잔뜩 피어 있는 언덕이었다. 샛말간 피부의 소년이 하얗고 귀여운 꽃을 따서 엮어다가 화관도 만들고, 꽃반지도 만들었다.
루시엘의 머리에 동그란 화관을 씌워 주고, 손가락에는 꽃반지를 끼워 주었다.
소년의 선홍빛 입술이 루시엘의 하얀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화악.
루시엘의 희고 말랑하던 뺨이 사과처럼 빨개지고 말았다.
“으웅!”
그 순간 루시엘은 잠에서 깨어났다.
캐노피가 달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옆에 금발의 샛말간 소년이 꾸벅꾸벅, 앉아서 졸고 있는 게 보였다.
“……키제프?”
이상한 꿈을 꿔서인지, 루시엘은 당황스러웠지만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왜, 여기서 자는 거야?’
조그만 손으로 가물거리는 눈을 비비고,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어떻게 되었더라.
잠도 많이 자고, 꿈도 많이 꾸어서 뭐가 꿈이고 뭐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사실 지금 이 상황도 그렇다.
아늑한 제 침실인 건 맞는데, 키제프라는 낯선 존재가 와 있으니 실감이 나지 않는 터였다.
“아!”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의 금지 구역, 불의 제단, 키제프, 성배, 그리고 보석의 힘을 각성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어.’
루시엘은 그날 큼지막한 다이아몬드와 토파즈, 에메랄드까지 다양한 보석을 생성했다.
그때 어쩌면 길리아트 할아버지가 자신이 보석을 생성하는 모습을 보셨을지도 모른다.
루시엘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분을 믿지만…… 그래도 그 사실을 아시는지 확인은 해야 하는데.’
되도록 영영 아무도 모르는 것이 가장 좋지만, 감정을 숨기긴 어려우니까.
보석을 생성하는 건 강렬한 감정을 느꼈을 때. 이제부터는 평소에 감정을 잘 조절하는 편이 좋겠어.
그럴 수 있다면 말이다.
루시엘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뽀시락, 뽀시락.
루시엘이 이불을 조심스레 걷어 내면서 일어나자, 키제프가 잠을 깨려고 오만상을 썼다.
‘풋, 잠에서 깰 때 저런 얼굴을 하는구나.’
루시엘은 그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멍한 키제프의 눈과 마주친 루시엘은 웃음기를 쏙 감추었다.
그러곤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루시엘이 깨어났다는 걸 알아본 키제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왕방울만 해졌다.
“너……. 언제 깬 거야?”
“방금. 키제프랑 비슷하게 일어났어.”
루시엘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키제프에게 방긋 웃어 주었다. 이렇게 한 번 웃어 주고 나면, 벨슈타인 가문의 사용인이든 가신이든 자신에게 친절해지곤 했다.
그러나 그는 아니었다. 키제프는 잠시 고개를 돌린 채 딴청 부리듯 말했다.
“나한테 바라는 거 있어?”
“뭐? 그런 거 없어.”
“근데 왜 웃어.”
“그야…… 알았어. 안 웃어.”
‘키제프 앞에서는 웃지 말아야겠다.’
루시엘은 다짐했다. 소년의 손이 불쑥 이마로 뻗어 오더니 짚어 보았다. 손이 차가워서 왠지 시원했다.
“……이제 열은 내렸네. 너 아팠어. 오랫동안 잤어. 다섯 밤.”
“헤엑. ……정말?”
“응. 마탑의 치유 마법사 말로는 잠자면 낫는 병이라는데…….”
루시엘은 그것 말고도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해선 듣지 못했다.
“……그 성배는 어떻게 됐어? 다음 층으로 가는 문이 열렸는데.”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가셨는데 아무것도 없었대.”
“……뭐?”
“네가 한번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쨌든 그 성배를 들어 올린 건 너니까.”
“……응.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구나. 피닉스의 장미, 그걸 구해야 해.”
“그럼 말씀드리고 같이 가자.”
같이 가자는 말에 루시엘은 내심 안심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카데미에 있어야 할 키제프가 왜 여기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근데 아카데미 안 가? 왜 여깄어?”
“……뭐 당분간은. 잠깐 쉬기로 했어.”
키제프는 대답하고 나서 루시엘을 보며 눈이 가늘어졌다.
“꼬맹이. 나를 지켜 주려고 했다며? 고맙다.”
‘원래 키제프는 무뚝뚝한데 오늘은 왜 이러지?’
“……그거야 계약상이긴 해도 남편이니까. 남편 다치는 건 싫어.”
루시엘은 별 뜻 없이 방긋 웃으며 말했지만 키제프는 귓불이 붉어졌다.
그가 얼굴을 가린 채 손가락 사이로 루시엘을 보면서 말했다.
“못 하는 말이 없네. 꼬맹이. 그냥 키제프라고 해. 근데 언제까지 속일 참이었어?”
“뭐를?”
“네가 부엉이 주인이었다는 거?”
“……아. 들켰네. 미, 미안. 귀찮게 굴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편지 보내면 이상하잖아.”
루시엘이 겸연쩍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안 귀찮아. 네 편지 덕분에 외롭지 않았으니까.”
키제프가 팔을 쭉 뻗어 루시엘의 보드라운 머릿결을 따라 말없이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시아빠를 닮은 것 같았다.
이내 루시엘은 심장에서 물결치는 무언가를 느꼈다. 기분 좋은 몽글몽글한 감정.
키제프가 자신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니, 왠지 감동이 왈칵 올라왔다.
‘앗…… 보석 나올 거 같아.’
루시엘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곤란한 얼굴로 키제프를 올려다보다 다시 침대에 눕고는 이불을 폭 뒤집어썼다.
“나, 나 조금만 더 잘래. 그러니까 나가 줘.”
“……뭐? 안 돼.”
다섯 밤이나 잤는데 또 자겠다는 말에 키제프는 기겁했다.
“부, 부탁이야. 혼자 있고 싶어!”
루시엘은 다급하게 핑계를 댔다. 키제프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루시엘을 보면서 물었다.
“내가 불편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시, 십 분만 잠깐 생각 좀 할게. 갑자기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서 조금 놀라서 그래.”
“…….”
키제프가 잠시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더니 이번에는 납득이 되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달칵.
그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루시엘은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몸을 도는 마나가 그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치는 기분이었다.
또로롱.
툭.
루시엘은 침대 시트 위로 사뿐하게 떨어진 새끼손톱만 한 토파즈를 보면서 빙그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