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토파즈를 숨기려고, 자신의 책상 서랍을 드륵 열었을 때 루시엘은 못 보던 작은 상자를 하나 발견했다.
“……이게 뭐지?”
검은색 상자를 열자 그 안에서 오색 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토파즈, 에메랄드가 들어 있었다.
전부 순도 높은 맑고 투명한 상급 보석들이었다. 영롱해서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보석을 보면 누군가 가질 테니,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곱게 보관되어 있을 줄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날씨가 유난히 맑아 보였다. 루시엘은 심장이 또 일렁거렸다. 토파즈 하나가 더 허공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드렸고 루시엘은 얼른 보석을 숨겼다.
얼굴을 내민 건 키제프가 아닌 베시였다.
“아가 마님! 깨어나셨다고 전해 들었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모두 걱정이 많았어요.”
베시는 달려와서 루시엘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는 눈물이 왈칵 나는 모양이었다. 루시엘은 감정을 참아 내려, 안간힘을 썼다.
“나, 난 괜찮아. 보다시피 멀쩡해.”
“네, 정말 다행이에요. 아 참, 따끈한 야채 스튜라도 조금 드셔 보시겠어요? 세스 주방장님이 여간 걱정하시는 게 아니에요.”
“……응. 빨리 가져다줘. 배가 고프네.”
루시엘은 베시를 얼른 내보낸 후, 또다시 허공에 맺힌 보석을 얼른 붙잡았다.
“감동을 참는데도 생기네. 그치만 좋다. 사랑받고 있어서…….”
한편 베시가 방문을 닫고 나오자, 그 앞에서 루시엘의 소식을 기다리는 이들이 가득이었다.
아가 마님이 깨어나 음식을 찾으셨다는 소식에 사용인들도 모두 안심하고, 제 할 일을 하러 갔다.
길리아트와 공작, 엘링턴과 레오니까지 모두 문 앞에 대기했지만 방 안으로 들어가진 못했다.
에바가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아가 마님께서 식사라도 편안히 하시도록 기다려 주시는 게 좋겠어요.”
루시엘의 방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벨슈타인가의 남자들을 보고 있자니, 에바는 쿡 웃음이 났다.
루시엘이 깨어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성안이 활기차졌다. 이제 루시엘 없는 벨슈타인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체감하고 있었다.
* * *
야채 스튜를 먹고, 기운을 차린 루시엘은 모두에게 잘 있다고 얼굴을 보여 준 다음 응접실로 내려왔다. 에바가 특별한 간식을 주겠다고 해서였다.
“온실 농장에서 수박을 재배했다고 해요. 이제 시원한 과일을 즐겨도 좋을 때이니까요.”
에바가 절반을 가른 수박 반 통에 동그랗게 모양을 내서 예쁘게 자른 수박 화채를 내어 왔다.
동글동글 잘린 새빨간 수박을 포크로 찍어서 입안에 넣어 깨물었다.
수박을 생전 처음 먹어 보는 루시엘은 푹 빠지고 말았다.
“정말 달고 시원해요.”
입안 가득 달콤하고 시원한 과즙이 터져서 목을 축여 주었다. 물 대신 먹어도 좋을 것 같았다.
“갈증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처음 물을 마시면 수박 맛이 날 거예요.”
잡아당기면 쭈욱 치즈처럼 늘어갈 것 같은 보드라운 볼이 바쁘게 움직였다.
“맛있게 드셔 주시니 저는 기뻐요.”
에바는 루시엘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배부르다는 듯 미소 지었다.
어느새 루시엘에게 시원한 음료나 디저트를 대접하는 것이 에바의 취미가 되어 가고 있었다.
밥도 먹었겠다. 디저트도 먹었겠다. 루시엘은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고 나서, 집무실로 찾아가 길리아트와 공작에게 말했다.
“제단에 다시 다녀올게요.”
루시엘에 대한 일이라면 걱정 부자인 두 사람이 이번만은 별말 하지 않고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안 그래도 네가 깨어나면 같이 가 보자고 하려 했단다.”
“당장 출발하지.”
“좌표를 저장해 두었으니 바로 이동이 가능하다.”
셋이서 알았다는 뜻으로 긍정의 눈빛을 주고받고 있을 때, 키제프가 어떻게 알았는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도 가겠습니다.”
“시간을 잘 맞춰 왔구나, 키제프.”
길리아트가 어서 오란 뜻으로 키제프에게 손짓했다.
파아앗.
길리아트가 지팡이를 들어 초록빛 이동포탈을 생성했다. 그렇게 네 사람이 함께 제단의 입구로 이동했다.
루시엘이 지난번 성배를 들었기 때문인지, 마지막 층까지 제단은 사라지지 않고 열려 있어 계속 이동만 하면 되었다.
데구루루, 굴러다니는 성배를 다시 붙잡은 루시엘이 용감하게 맨 앞으로 나아가서 살짝 뒤돌아 세 사람을 살폈다.
“비켜라, 루시엘. 아무래도 위험하니 내가 먼저 앞장서지.”
망토를 펄럭이던 공작이 루시엘을 달랑 안아 들어 뒤쪽으로 옮겨 놓고, 자신이 먼저 들어갔다.
그의 뒤로 길리아트가 바짝 붙었고, 그 뒤로는 키제프가 있었다.
결국엔 루시엘이 맨 뒤가 되었다. 키제프는 루시엘을 내려다보더니, 슬쩍 어른들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루시엘은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날 보았던 황홀한 빛이 어쩐지 보이질 않아 불안했다.
잔뜩 긴장한 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내려갔지만, 세 사람의 눈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이 텅 빈 공간뿐이었다.
마치 그날 일이 꿈이었던 것처럼.
“……역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헛수고를 했군.”
“다시 돌아가자.”
모두 발길을 돌렸지만, 루시엘은 공간의 중앙으로 다가가 걸음을 멈췄다. 똑똑히 보였다.
우아하게 날개와 꼬리를 접었다 펴고 있는 붉은색의 매였다. 군데군데 황금색과 푸른색, 선홍색 깃털이 곱게 나 있었다.
매는 곱고 검은 눈망울을 가지고 있었는데 금빛 부리에서는 금가루처럼 반짝이가 떨어졌다.
화르륵, 주홍빛의 불꽃으로 이루어진 꼬리가 화려하게 타올랐다.
루시엘은 그 성스럽고 아름다운 새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피닉스.”
피닉스가 고개를 들고는 루시엘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누가 성배를 들었나 했더니 너로구나. 이 맑은 기운. 투명한 보석안. 넌 지혜롭고 선한 요정의 핏줄이야, 그렇지?”
상서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피닉스에게서 들려왔다. 머리에 달린 긴 볏에서도 금가루가 떨어져 나왔다.
“왜 왔니? 미안하지만 나는 칠 년 전에 내 몸을 스스로 불살라 죽었어.”
“그럼 과거, 아카데미에 났던 화재는 역시 당신이 일으켰던 거예요?”
“그래. 내가 그랬어. 그자가 피닉스의 장미를 제멋대로 사람들에게 공개하려고 했거든.”
피닉스는 잠시 분노한 듯 어조가 강해졌다. 루시엘은 그자가 누구인지 짐작이 되었다. 그 책의 저자 쿠엔트.
“『전설의 마법 식물』의 저자 쿠엔트가 맞지요?”
“맞아. 어리석은 인간 같으니라고. 그러지 않았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친구가 되었을 텐데.”
“그는…… 어떻게 되었어요? 행방불명되었다고만 알려졌던데.”
피닉스는 안타까운 듯 답했다.
“식물원이 전부 불타는 걸 보고 결국 떠나 버리더구나. 쿠엔트는 사실 필명이야. 그는 아카데미를 세운 폴리체 가문 출신이고.”
“그럼 아카데미는 당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거네요?”
“그래. 나를 부활시키지 못할 바에 차라리 숨긴 채 영원히 소유하려고 했지. 하지만 나는 기다렸단다. 내 제단의 붉을 밝히고, 성배를 들 자격이 있는 자를 말이야. 하지만 쿠엔트 말고는 자격이 있는 자가 없었어. 그도 맑고 깨끗한 마나를 가지고 있었거든.”
“아…….”
그제야 의문이 풀리는 것 같았다. 피닉스를 숨기기 위해 아카데미는 가벽까지 세우고 금지 구역으로 해 놓았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네가 나타났구나. 고마워. 덕분에 나는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게 되었어. 아직은 영혼만 있는 상태이지. 나는 끝없이 죽음에 이르고 다시 부활할 거야. 불사조의 운명이지. 미안하지만 나를 소유할 수는 없을 거란다.”
“아뇨. 아니에요.”
루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당신을 소유하러 온 것이 아니에요.”
“그럼?”
“부탁이 하나 있어요. 피닉스의 장미, 그게 꼭 필요해요.”
“왜지?”
“네, 드래곤의 잠을 깨우려고요.”
“좋아. 너는 마음에 드는 아이니까. 대신에 조건이 있어. 너의 맑고 신선한 마나를 좀 나누어 줄래?”
“……움.”
루시엘이 잠시 망설이자 피닉스가 말했다.
“마나는 마법을 쓸 적에도 소모하는 것이잖아. 다시 채워질 거란다. 게다가 넌 숲속 깊은 맑은 샘처럼 마나가 퐁퐁 나는 체질인 거 같은데? 크리스털 페어리니까 말이지.”
“그것도 알고 계세요?”
“그럼. 수백 번의 죽음과 회귀를 거듭하면서 보았지.”
루시엘은 흠칫 놀랐다. 그럼 도대체 몇 년을 살았다는 뜻일까.
“그렇게 괴물 보듯 할 거 없다.”
“아뇨, 경이롭고 신비로운 존재로 보는 중이에요. 그럼 제 마나는 어떻게 드리죠?”
“손만 내밀면 돼.”
“네.”
루시엘이 손을 내밀자, 피닉스가 날개의 끝을 올려놓았다. 루시엘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기다렸다.
맞닿은 손을 타고서 은은한 푸른 빛이 흘렀다. 피닉스가 잠시 후 루시엘에게서 떨어졌다.
“덕분에 잘 받았다. 요정 중에서도 드물게 맑은 마나를 타고났어. 꽤 고달팠겠구나, 이전 생에선?”
“……아.”
피닉스는 루시엘이 회귀를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내가 돌보는 장미는 다른 곳에 있어.”
“다른 곳이요?”
“그래. 내 깃털을 꽉 잡고 눈 감아.”
루시엘은 조심스레 다가가서 피닉스의 가슴 깃을 꼬옥 붙잡았다. 그러자 온몸이 둥실둥실 뜬 채 움직이는 것처럼 부유하는 느낌이 들었다.
“눈 떠 봐.”
루시엘이 눈을 떴을 땐 화사한 정원에 와 있었다.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붉은 장미에서는 진한 내음이 풍겼다.
“한 송이만 가져가도록 해. 잘 가, 귀염둥이.”
루시엘은 조심스레 장미 정원에서 한 송이를 꺾었다. 순간 아득했던 정신이 퐁, 하고 깨어났다.
“루시엘?”
“이제 정신이 드는 게냐?”
“그곳에만 가면 정신을 잃는군. 아무래도 폭파 시켜야겠…….”
일어나 보니, 다시 자신의 방에 누워 있었다. 정말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겨우 피닉스의 장미를 얻었는데, 그게 꿈이라니…….
“자자, 다들 아가 마님 쉬셔야 하니까 이만 돌아가 주시어요.”
베시와 로즈가 그리 말하면서 세 남자를 내쫓았다.
루시엘은 약간 속상하단 생각과 동시에 손에 무언가가 있는 듯해 조심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금빛 가루가 살살 떨어지는 붉은 장미가 손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