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51)화 (51/282)

<51화>

키제프는 토파즈와 에메랄드도 주워서 루시엘의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하하. 여기도 있다.”

길리아트도 바닥에 떨어진 보석을 주워, 함께 챙겨 주었다.

한편 키제프는 가만히 생각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혹시 루시엘이 부엉이 주인이었나?”

키제프의 의문에 길리아트는 부엉이 벨을 떠올렸다.

“……아, 그 솔방울처럼 작은 흰 부엉이 말이냐?”

“네, 그 부엉이. 이 아이 거였어요?”

“맞단다, 네 친구 녀석이 부엉이를 날지 못하게 묶어 놔서 기숙사 사감에게 부탁했다.”

“아…… 막시무스 자식.”

키제프가 이를 아득 갈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길리아트는 손자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리며 알려 주었다.

“루시엘이 너를 꼭 찾을 거라고 어찌나 굳게 결심하고 용기를 내서 왔는지 모를 거다.”

이 조그만 아이가 자신을 지키려 들었다니, 키제프는 고맙기도 하고 무언가 마음 한구석이 움찔했다.

지켜 주려고 결혼을 했는데 도리어 이 연약한 아이한테 보호받다니…….

“깨어나면 꼭 고맙다고 하렴.”

“……네.”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지요?”

“아마도? 꽤나 긴 모험이었구나. 피닉스의 장미도, 피닉스도 구경하지 못했지만 말이지.”

키제프는 내심 여길 조사해서 속이 시원했다.

그때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짜증이 난 듯한 얼굴로 나타난 공작이었다.

“……밖에 있는 것들은 다 뭡니까? 이 안은 포탈이 안 먹혀서 조금 시간이 걸렸…… 무사하군, 아들.”

키제프를 본 공작은 대수롭지 않단 투로 말했다. 사실 그렇게 큰 상처가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길리아트의 품에 안겨 기절한 루시엘을 본 공작은 서늘한 얼굴로 냉기가 담긴 마나를 방출시켰다.

“……루시엘?!”

휘오오오!

“감히 내 며느릴 다치게 하다니! 이까짓 유적.”

매섭게 일그러진 눈, 감출 수 없는 살기, 빠르게 떨어지는 온도에 모두 식겁했다.

공작의 얼음계 마법이면 이 유적을 단번에 무너뜨리고도 남았다.

“진정해라. 루이비드. 여기가 무너지면 루시엘이 진짜 다치게 될 거다.”

“아버지.”

“각하, 제발 참으십시오.”

길리아트와 키제프, 따라 들어온 엘링턴이 서둘러 공작을 말렸다. 하마터면 불의 제단 유적이 와르르 무너질 뻔했다.

“이런, 빌어먹을 곳이 있나.”

공작이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피닉스는 어디 있지……?”

그르렁거리는 맹수처럼 사방을 둘러보던 그의 예리한 눈빛에 포착된 것이 있었다.

놋쇠로 된 성배, 그리고 다음 층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거기에서는 주홍색 빛이 여전히 뿜어져 나왔기에 도저히 모를 수가 없었다.

“저건?”

“루시엘이 순수한 마나를 지니고 있어서인지, 성배를 만질 수 있었다.”

길리아트가 답했다.

“그래서 저 문이 열린 겁니까?”

“그래, 루시엘 저 아이가 해낸 것이지.”

“그럼 가 봐야겠습니다.”

바로 움직이려는 공작을 또다시 길리아트와 엘링턴이 붙잡았다.

“위험할지도 모른다. 우리들 중 루시엘만이 무사히 성배를 들었다.”

“자격이 없으면 공격을 받을지도 몰라요.”

이미 성배로부터 공격을 받은 키제프도 말했다.

“괜찮다. 고작 그 정도로는 날 다치게 할 수 없지.”

“아래층은 더 강한 것이 튀어나올지도 몰라요.”

길리아트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주억였다.

“키제프 말이 맞아. 나 역시 짐작 가는 이유가 있구나. 우리에게는 마족의 핏줄이 섞여 있으니, 이 제단의 힘이 우리에게 적대적인지도 모르겠다.”

엘링턴까지 포함한 네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루시엘에게 모였다.

“이 아이는 그럼…….”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일 게 틀림없다.”

“여신이 몰래 실수로 인간계로 보낸 아이일지도 모릅니다.”

“순백의 아기 눈사슴. 꽃에서 태어난 요정이거나.”

“……어째 점점.”

키제프가 입을 열자, 길리아트와 엘링턴, 루이비드까지 주접을 떨었다. 다들 진심인 듯해서 키제프는 그들에게 좀 멀리 떨어져야 할 듯했다.

잠시 턱가를 문지르던 루이비드가 엘링턴에게 말했다.

“루시엘을 어서 의사에게 데려가야 한다. 이대로 둘 순 없어.”

“예, 그럼 제가 아가 마님을 모시고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제단의 아래층은…… 이대로 두고 떠나야겠군.”

길리아트의 말에 루이비드가 나섰다.

피닉스는 만인이 원하는 전설 속 신비로운 존재였다. 불의 힘은 물론이고 불사의 강한 생명력은 누구든 탐을 낼 만한 것으로,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아니, 갖지는 못하더라도 그 모습을 눈에 새겨 두고 싶기라도 했다.

저 아래에 정말 피닉스가 있다면 말이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어차피 저곳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루시엘을 혼자 보내는 것도 위험합니다.”

“흐음…… 그 말도 일리가 있구나. 그럼 나도 같이 가지.”

“키제프, 너는 엘링턴을 따라서 성으로 귀환하거라.”

“……아뇨, 괜찮습니다. 잠깐, 성으로 귀환하면 아카데미는요?”

키제프의 물음에 루이비드는 아들을 향해 슬쩍 염려의 눈길을 보냈다.

“쓰러졌다고 하지 않았나. 성에서 며칠 푹 쉬도록 해.”

“다친 곳은 없는데…….”

“혹시 모른다. 진찰은 받아 보도록. 아카데미 연락 건은 알아서 처리하지. 남은 일들은 어른들에게 맡겨라, 키제프.”

“…….”

딱히 미련을 가질 일은 없었지만, 한 가지 잊은 게 생각났다.

부엉이 벨.

루시엘이 부엉이의 주인이었다니 아직도 믿을 수가 없지만, 오늘은 그보다 놀라운 일을 많이 겪은 터라 크게 와닿지 않았다.

“도련님, 일단 저와 함께 돌아가시죠. 아, 도련님의 친구들은 다른 마도사들이 아카데미로 데려다주었을 겁니다.”

“……부엉이가 거기 있는데.”

“아, 부엉이도 찾아오라고 일러두지요.”

“부탁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지하로 들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살펴보던 키제프는 루시엘을 안아 들고 먼저 밖으로 향하는 엘링턴의 뒤를 서둘러 쫓았다.

* * *

루시엘은 꼬박 사흘 밤을 내리 자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이 올라서 끙끙 앓기도 했다.

주치의 선생도, 시클라인도 원인을 알 수 없다고 진단을 내린 탓에 공작의 분노를 일으켜 근신 처분을 받고 말았다.

루시엘의 곁을 지키는 사람은 계속 바뀌었지만, 유독 키제프는 떠날 수 없었다.

“도련님, 방으로 돌아가셔서 조금 쉬세요.”

베시가 다정하게 말하며 물수건을 가지고 들어왔다.

“괜찮아. 그거 놓고 가.”

“네. 하지만 힘들면 꼭 말해 주셔야 해요.”

키제프는 베시가 놓고 간 물수건을 루시엘의 동그란 이마 위에 올려 주었다.

아이는 색색 고른 숨을 내쉬며 잘도 잤다. 이러다가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런 무서운 생각이 들 정도로 오랫동안 잠들었다.

키제프는 루시엘의 책상 서랍에서 자신이 보낸 편지들을 발견했다. 루시엘이 보낸 편지들에 비하면, 참으로 매정하고 짧은 단문의 편지들이었다.

그걸 뭐가 좋다고 루시엘은 레이스를 덧댄 상자 안에 날짜별로 분류해서 가지고 있었다.

‘아가 마님은 늘 편지가 오기를 기다리셨어요.’

그 이야기를 들은 키제프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바보같이 내 편지를 왜 기다렸을까. 바보같이 왜 날 구하겠다고 그렇게…….’

‘귀찮게 굴지 않을게.’

‘나랑 결혼해 줘.’

훗날의 이별을 위해서 순수한 아이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닌지, 마음이 불편했다.

가슴에 가시처럼 자그맣고 뾰족한 무언가가 걸려서, 그래서 루시엘의 곁을 떠나지 못했던 건지도 모른다.

‘루시엘에게 잘해 줘서가 아니라, 너무 못해 줘서…….’

그런 자신에게 루시엘은 꼬박꼬박 예쁜 손편지를 적어 주었다.

그리고 그 편지에 위로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사실은 외로웠어.’

서랍 속에는 아직도 알록달록한 편지지가 많이 있었다.

저것들도 다 자신에게 보낼 편지인가 싶어 슬쩍 미소가 올라왔다.

키제프의 손이 루시엘의 자그만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다행히 온기는 있었다.

“꼬맹아. 깨어나기만 해. 깨어나기만……. 제발.”

키제프가 간절히 기도한 후, 물수건을 살짝 치우고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아이에게서는 은은한 바닐라 향처럼 우유와 설탕을 연상케 하는 달콤한 내음이 났다.

제 외모처럼 달콤하고 몽글몽글. 그래, 마치 시내의 고급 제과점에나 판다는 솜사탕 같았다.

아카데미의 여자아이들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솜사탕을 싫어하는 여자애는 없다던데.

루시엘이 깨어나면 솜사탕을 사다 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키제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밤이 깊어서야 키제프는 중정을 지나, 방으로 돌아가 몸을 눕혔다. 루시엘의 방과는 따로 떨어진 건물이었다.

스르르.

레이븐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푹신한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만족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역시 이 집이 살기 좋아. 도련님.」

“…….”

키제프는 레이븐이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고는 소파에 깊숙하게 앉아, 눈을 감았다.

레이븐이 키제프의 눈치를 스윽 보더니 말했다.

「미안. 그날 이후 안 나타나서 섭섭해 그래? 하지만 그 제단에 발을 디디니까 기운이 확 빠져서 아무것도 못 하겠더라. 그래서 어떻게 됐어? 안 다쳤나?」

시끄럽게 레이븐이 조잘대자, 키제프가 세모꼴 눈으로 쏘아보았다.

“밤이야. 조용히 해.”

「사과하는데 그러기야?」

“사과 안 해도 돼. 그곳, 신성한 제단이었으니까. 마족인 나와 내 할아버지에게도 적대적인 곳이었어. 너처럼 기운이 빠질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 말에 레이븐이 반색하면서 눈을 굴렸다.

「오호, 그랬군. 근데 거기서 신성한 제단이라고? 뭐가 있었는데?」

“안 가르쳐 줘.”

「아, 왜애!!」

레이븐이 징징거렸지만 키제프는 입을 꼭 다물었다. 저 녀석이 루시엘의 존재를 알게 되면 또 그걸 어떻게 받아 주나 걱정이 앞서는 키제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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