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그가 샌드(Sand)를 발동해 후두두둑 모래가 화로 위로 쏟아졌다. 하지만…… 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살아 있었다.
루시엘은 불을 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손을 가까이 대 보면, 분명히 뜨거운 열기가 있으니 불이 맞는데…….
아무래도 특별한 불인 것 같았다. 그래도 무언가 방법이 있을 터였다. 키제프는 이걸 어떻게 풀었을까?
불을 끄는 방법 중에 온도를 낮추는 것과 공기를 차단하는 것 두 가지는 이미 시도했고, 그렇다면 남은 것은.
탈 물질을 없애는 것.
‘저 항아리를 파괴해야 해.’
루시엘은 지팡이를 꺼내 항아리를 향해 공격 마법을 쏘았다.
“할아버지, 이 항아리를 파괴해야 해요.”
“오냐.”
쿠콰광!
루시엘이 여러 번 마법을 날려도 깨지지 않던 항아리가 그의 마법으로는 단번에 박살이 났다.
그러자 불이 모두 꺼졌고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문도 쿠구구궁, 소릴 내고 열렸다.
“잘했다, 루시엘!”
“네, 어서 가 봐요.”
지하에 이런 고대 유적 같은 곳이 있었다니, 들어갈수록 놀라웠다.
이윽고 세 번째 층에 다다르자마자 루시엘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바닥에 쓰러진 금발의 소년을 발견했던 터였다.
“안 돼!”
다른 아이들과 달리 키제프는 단순히 기절한 게 아니었다.
루시엘은 빠르게 달려가서 쓰러진 키제프를 살폈다.
“……할아버지! 여기요.”
창백하게 핏기 없는 얼굴, 너덜너덜해진 옷자락. 온몸에는 붉은 상처가 여기저기 나 있었고 몸은 시체처럼 차가웠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루시엘의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키제프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이럴 수가! 키제프!”
길리아트도 사색이 된 얼굴로 얼른 달려와 키제프의 맥을 짚었다.
“다행히 숨은 쉬는구나.”
루시엘도 키제프의 심장에 귀를 대 보았다. 하지만 정상적인 심장박동이 아니었다. 아주 약하고 느렸다.
“힐(Heal)!”
그의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온 새하얀 빛이 키제프의 몸을 감쌌다.
길리아트는 아이의 몸 위로 힐링을 계속해서 했지만, 키제프는 좀처럼 깨어날 줄을 몰랐다.
루시엘은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이 알아봐 달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키제프가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저 때문이에요. 제가 도와 달라고 해서…….”
루시엘은 가슴이 몹시 아팠다.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치 쿵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다. 굳이 따지면 나와 이벨린의 책임이지……. 너는 그녀를 도와주려고 한 것뿐이잖니. 루시엘?”
아까보다 악화된 루시엘을 보고 불안해진 길리아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헉, 헉.
숨이 가빠…….
제 심장이 울리는 소리가 너무나도 커서 온몸이 깜짝깜짝 놀라게 되었다.
키제프에 이어 루시엘의 정신도 혼미해지려 하자, 길리아트는 입술을 짓씹으면서 두 아이를 붙잡았다.
“루시엘, 너까지. 제발 정신 차리렴. 전부 할애비 잘못이다. 이런 위험한 곳에 오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길리아트는 두 아이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참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두 아이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변을 경계하는 것을 늦추지 않았다.
루시엘은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도 손가락을 들어 석판을 가리켰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까지 맺힌 채, 루시엘이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하, 할아버지, 읽어…… 주세요.”
“아, 그래. 알겠다.”
세 번째 석판은 아직 확인하지 않았다. 길리아트가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세 번째 불의 제단. 신성한 불의 성배를 들어라.”
석판을 읽자, 방의 중앙에 빛이 비쳤다. 그곳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저게 불의 성배인가?”
아름다운 황금빛의 성배는 피닉스처럼 불새 모양으로 조형된 그릇이었다.
골동품을 많이 접해 본 길리아트도 이렇게 찬연한 빛을 내는 물건은 처음이었다.
길리아트가 그것에 홀린 듯이 다가가 손을 대려 했지만 루시엘이 외쳤다.
“할아버지, 저것 때문에 키제프가 다친 거예요. 함부로 만지시면 위험…… 으흑.”
길리아트가 유혹을 털어 내듯이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성배에게로 한 발씩 다가가며, 손을 뻗으려 했다.
“아…… 안 돼!”
지금 이 순간에서 할아버지마저 다치게 된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내가 힘을 내야 해! 내가 막아야 해! 내가 구해야만 해……!’
루시엘은 어느새 차오른 눈물을 그치고, 일어나서 길리아트를 붙잡고 뒤에서 껴안았다.
“안 돼요. 할아버지.”
“……루시엘, 저, 저게 날 부른단다.”
길리아트의 눈은 약간 몽롱해져 있었다.
평상시의 이성적인 그가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길리아트는 저런 물건에 탐욕을 부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루시엘은 고개를 들어 성배를 쳐다보았다.
‘신성한 불의 성배라고 했지.’
어쩌면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 아닐까. 루시엘은 성배를 아무리 바라보아도 갖고 싶다거나 탐이 나지 않았다.
자신은 요정의 핏줄이니까 괜찮을지도 몰랐다. 물론 완벽한 확신은 없었지만, 할아버지를 다치게 두느니 차라리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높은 자신이 시도해 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루시엘은 성배로 다가가 발돋움을 해 손을 뻗었다. 이윽고 그걸 양손으로 거머쥐었다.
“꺅!”
그 순간 눈부신 빛이 촤르르 사방으로 쏟아지며 시야를 가렸다.
그러나 어디선가 공격이 날아온다거나, 불이 난다거나 하진 않았다.
아무런 충격 없이 고요해서 루시엘은 실감이 나지 않아, 슬쩍 실눈을 떠 보았다.
쿠구구궁, 다음 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열렸을 뿐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쏟아지는 주홍색 빛이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웠다.
그와 동시에 루시엘의 몸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쿵쿵쿵쿵.
아까부터 세찬 박동을 거듭하던 루시엘의 심장으로 엄청나게 커다란 양의 마나가 모여들었다.
“이…… 이건.”
루시엘은 직감했다. 이건 분명히 크리스털의 힘을 각성하던 때와 같았다.
두근, 두근, 두근.
쉼 없이 내달리는 심장.
피어오르는 열기.
폭주하듯이 루시엘의 자그만 몸으로, 마나가 거침없이 모였다.
무서울 정도로 거대한 마나 폭풍.
그 순간 루시엘의 작은 몸체가 빛을 발하면서 살짝 떠올랐고, 이내 그녀의 심장 가까이에서 영롱하고 투명한 크리스털이 맺혔다.
또로로, 롱!
시간이 잠시 정지한 듯 느리게 흘러갔다. 루시엘은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만든 그 보석을 거머쥐었다.
루시엘의 주먹보다도 더 커다란 다이아몬드였다. 찬란한 무지갯빛의 다이아몬드.
‘어떻게 된 거지?’
루시엘은 놀란 토끼 눈으로 손에 붙잡은 큼지막한 보석을 살폈다. 이렇게 찬란한 보석은 과거에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루시엘은 조금 전 강렬하게 느꼈던 감정을 떠올렸다.
그건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 구하고자 했던 마음이었다.
루시엘이 왜 과거에 다이아몬드를 한 번도 만들지 못했는지,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때는 자의로 누군가를 위하는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새롭게 배웠다.
벨슈타인 가문의 사람들을 만나서.
루시엘은 자신도 모르게 북받친 감정, 감동이 밀려왔다. 심장이 찌르르 울릴 만큼.
“앗.”
또로롱, 맑은 이슬방울처럼 맺힌 보석이 바닥에 툭, 툭 떨어졌다. 그것 역시 처음 보는 보석이었다.
노란색이었다. 아주 맑고 투명한 개나리꽃 같은 색.
과거에 루시엘이 만들어 낸 보석의 종류는 많지 않았다.
슬플 때는 사파이어,
아플 때는 옵시디언,
화날 때는 루비,
기쁠 때는 에메랄드.
그게 전부였다.
그나마 그 에메랄드도 누군가 루시엘을 속여서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래서 루시엘은 감정으로 보석을 만드는 일을 끔찍하게 여겼다.
크리스털 페어리라는 제 운명이 버겁고 힘들었다. 그 힘이 루시엘에게 준 것이라고는 노예 같은 비참한 삶이었을 뿐이니까.
‘감정이 없어지길 바랐었어…….’
그런데 다른 감정으로 보석을 만드는 것도 가능했었다니, 전혀 몰랐다. 루시엘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이번 생에서는 다를까? 보석을 만들어도 괜찮은 걸까……?’
그런 희망이 피어올랐다.
두근, 두근!
여전히 그녀의 심장은 힘차게 뛰고 있었다. 다만 너무 많은 마나를 끌어모았던 탓인지 갑작스러운 각성 때문인지 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루시엘은 물먹은 솜처럼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제야 또렷한 눈빛으로 돌아온 길리아트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너는……!”
그와 동시에 키제프의 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루시엘은 털썩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 키제프가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루시엘?!”
길리아트가 다가와 루시엘의 몸을 받쳐 주었고, 키제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겨우 몸을 이끌고는 다가왔다.
“……할아버지? 두 사람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여긴 위험해요. 어서 나가야……! 윽.”
“키제프! 설명은 나중에 하자. 우린 너를 직접 찾으러 왔다. 누구에게 당한 것이냐? 내가 치유를 해도 잘 듣지 않더구나.”
“아, 성배를 건드렸다가 이렇게 됐어요. 저건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그토록 아름다워 보였던 성배는 지금 보니, 빛을 잃은 놋쇠 잔에 불과했다.
마치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한 것처럼, 환각에라도 빠진 기분이었다.
길리아트가 추측했다. 자신 역시 성배를 향한 알 수 없는 탐욕 때문에 위험에 빠질 뻔한 순간에, 루시엘이 자신을 막고 성배를 들었던 모양이었다.
“루시엘만이 저걸 만질 자격이 있던 건가.”
“…….”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입구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지만, 키제프도 길리아트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긴 이 아이가 가야 하는 곳이겠죠, 근데, 이 보석들은 뭐죠?”
루시엘의 주변에 노란색의 토파즈와 에메랄드 같은 보석이 떨어져 있었다.
길리아트는 약간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다.
“루시엘이…… 무언가를 하는 것 같았는데 나도 성배에 홀려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구나.”
키제프는 말없이 기절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투명하고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인형처럼 예뻤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웃네?”
누가 보면, 그저 잠든 것처럼 아주 평화로워 보였다.
“보석을 주워서 기분이 좋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