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으웁! 읍읍!”
“오르비아 백작, 네 딸 덕분에 산 줄 알아라. 바로 죽이진 않겠다. 죽지 않을 만큼의 물과 식사를 조금씩 주면서 명은 이어 가게 할 거다. 몸이 조금씩 얼어붙을지도 모르겠지만.”
치이익.
무언가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나더니 후우욱, 하고 매캐한 연기가 뿜어졌다.
“그 아이에게 물었거든. 만약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그 자그맣고 여린 아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더군.”
“…….”
“마법을 배워 제 손으로 직접 복수하고 싶다고.”
“……우읍!”
백작이 또다시 몸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공작의 구둣발에 밟혀 움직이지 못했다.
“대체 아이를 얼마나 학대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더군. 그 아이도, 그 아이의 언니에게 그랬듯 괴롭힐 작정이었나?”
백작이 부르르 떨면서 고개를 저었다.
“으우, 으우웁!”
“악마도 네놈처럼은 살지 않겠군. 아, 어떻게 알았느냐고……?”
공작이 잠시 마법 랜턴을 흔들어 불을 밝혔다.
“여자를 데려와.”
이내 루시엘의 유모를 기사가 데려왔다.
“……으흑. 배, 백작이 전부 그런 거예요. 저는 시켜서 한 죄밖에 없어요. 약을 먹인 것도, 아이를 굶기고 학대한 것도 전부요. 자요. 이제 다 말했으니 저는 풀어 주세요. 네?”
유모 역시 이곳에 갇혀 있었던 건지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로 흐느꼈다.
“……그만 데려가서 풀어 줘라.”
다시 둘만이 남게 되자, 공작이 잠시 재갈을 풀어 주었다.
“이제 잘못을 인정하나?”
“나, 나, 난 아니야! 살려 주시오, 살려 줘요, 각하! 예? 뭐, 내 뭐든지 하리다. 뭐든지!”
“시끄럽군.”
공작의 한 마디에 백작의 입에 다시 재갈이 물렸다.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관대한 것 같군. 이자를 괴수 옆 우리에 잠시 가둬라. 이웃끼리 인사 좀 하라고.”
“……!!”
―크르르, 크르르르!
이윽고 괴수의 울음소리를 들은 백작이 사색이 되어 새하얗게 질렸다.
그제야 그는 벨슈타인이 왜 그토록 악당 가문으로 불렸는지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 * *
지하 감옥을 제외하고 공작성은 평소처럼 평화로웠다.
돌아온 수업 시간.
“루시엘, 과제는 잘 해 왔니?”
“물론이에요.”
루시엘이 웃으면서 세 가지 마법을 모두 발동시켜 보여 주었다. 마법을 알아낸 후로도 발동 연습을 이틀 동안 했기에 과제는 완벽하게 끝냈다.
“오호. 아주 잘해 왔구나. 이번 과제를 통해서 마법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지?”
“네. 빨리 저도 제 지팡이를 가져 보고 싶어요.”
길리아트가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런, 조급해할 필요는 없단다. 속성을 발현할 때까지는, 마법이 저장된 실습용 지팡이로 다양한 마법을 익히는 게 좋으니.”
“네, 마법은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재밌어요.”
열의 가득한 루시엘의 모습에 길리아트도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다.
“그래, 과제를 잘 끝냈으니 오늘은 네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을 알아보러 갈까?”
찡긋 윙크하면서 길리아트가 말했다. 오늘따라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어깨 위에서 펄럭거리는 로브가 몹시 멋져서 루시엘은 시선을 빼앗겼다.
“궁금한 것이라니 뭔가요?”
루시엘의 진홍빛 눈동자가 도록도록 굴렀다.
“어서 알려 주세요.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짐작조차 안 됐는지, 고개를 살랑 저으면서 루시엘이 길리아트의 팔에 매달렸다. 그는 재킷 주머니 안에서 황금색 나침반을 꺼냈다.
옷깃으로 살짝 문지르자 번쩍거리면서 휘황찬란한 빛을 쏟아 내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 물건 같았다.
“루시엘, 이걸 손에 꼭 쥐고 마나를 모아 보렴.”
“이건…….”
“네가 어떤 속성을 발현할지, 마나 속에 깃든 속성으로 알아보는 마법 나침반이란다. 받아 보렴.”
“네.”
루시엘의 자그만 손바닥으로는 양손으로도 모자랄 만큼 큼지막하고 묵직했다. 겉에는 드래곤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벨슈타인의 문장이야.’
루시엘이 뚜껑을 열려고 낑낑댔지만 열리지 않았다. 길리아트가 웃으면서 딸깍, 열어 주었다.
내부에는 동서남북 방향에 네 가지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동쪽은 바람, 서쪽은 땅, 남쪽은 불, 북쪽은 물을 의미한단다. 어둠이나 빛 속성은 특별한 반응이 나오지. 한번 해 보아라.”
“저는 못 보겠어요. 다 되면 말씀해 주세요.”
“알았다.”
루시엘은 자못 긴장해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나침반을 받았다. 그러곤 눈을 감고 천천히 몸 안을 휘도는 마력을 나침반으로 옮겼다.
쉭쉭쉭.
나침반의 금빛 바늘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길리아트도 과연 루시엘이 어떤 속성을 발현할지 궁금했기에 숨 한 번 쉬지 않고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루시엘이 살짝 실눈을 뜨며 물었다.
“이제 됐나요?”
“아니. 아직이란다.”
바늘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황금 나침반이 파앗, 하고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곧 동그랗게 쏘아진 빛에서 환영이 비쳤다.
“설마, 이건…….”
“왜요, 할아버지?”
“루시엘, 직접 확인하는 게 좋겠구나. 이런 경우는 나도 처음이로군.”
동그란 구체가 서서히 빛을 내며 환영을 보여 주었다. 어둠의 상징인 달, 빛의 상징인 태양이 스쳐 지나가더니 이윽고 텅 빈 동그라미 하나가 환영에 떴다.
“……이건 무슨 속성일까요?”
루시엘이 조심스레 물었다. 길리아트도 처음이었다. 어둠도, 빛도 아닌 그냥 빈 동그라미라니.
“루시엘, 네 마나에는 속성이 정해지지 않은 것 같구나.”
“……그럴 수도 있나요? 그럼 마법은 어떻게 쓰지요?”
“무속성 마법도 있고, 다른 속성의 마법을 쓰기 위해선 지팡이나 스펠서 등의 도구가 필요하지.”
“무속성…….”
내내 기대했던 결과가 텅 빈 무속성이라니, 루시엘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무속성이라도 마법은 할 수 있으니 기운 내거라.”
“네. 괜찮아요.”
사실 실망은 루시엘보다는 길리아트가 더 한 모양이었다. 루시엘의 마력이라면, 아주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던 터였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훗날 사실이 되었다.
* * *
봄이라 그런지 공작성은 한창 봄 축제로 바빠졌다.
“요즘 왜 이렇게 축제가 많아졌지?”
봄꽃 축제가 엊그제 있었던 거 같은데 오늘은 봄 딸기 축제라고 했다. 덕분에 농장에서 수확한 싱싱한 최상품의 딸기와 라즈베리, 블루베리까지 실컷 맛볼 수 있었다.
딸기 축제의 첫 브런치에는 주방장 세스의 야심 찬 딸기 뷔페도 즐길 수 있었다.
딸기 뷔페는 공작성의 후원 잔디밭에서 펼쳐졌고, 애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전부 딸기를 이용한 요리가 나왔다.
그러나 역시 가짓수가 가장 많은 것은 케이크와 주스 같은 디저트류였다.
루시엘이 가장 먼저 손을 뻗은 건 꿀과 생크림을 바른 생딸기였다. 끝이 뾰족하고 싱싱한 딸기 중 어느 것은 루시엘의 주먹만큼 커다랬다.
“레오니, 이거 먹어.”
루시엘은 유독 커다란 왕 딸기에 생크림을 발라서 레오니에게 주고, 자기도 한 입 베어 물었다.
상큼한 즙이 꽉 찬 딸기와 부드러운 생크림의 조화란 그저 완벽했다.
루시엘은 부지런히 냠냠 오물거린 후 말했다.
“역시 딸기는 사랑이야.”
그때 누군가 뷔페가 펼쳐진 가든에 나와 두 아이에게 다가왔다. 바이올렛 머리칼을 가진 온화한 인상의 젊은 아가씨였다.
“두 분을 위해 준비했으니 부디 맛있게 즐겨 주세요.”
“당신이 주방장 세스 님이세요?”
“네, 아가 마님. 항상 맛있게 드셔 주시고, 마음이 담긴 쪽지까지 남겨 주셔서 감사해요.”
“그건 당연해요. 그 요리들 하나하나가 저에게는 인생의 큰 행복이었어요.”
루시엘이 그녀에게 손을 한 번만 만져 봐도 되냐고 물었다. 훌륭한 요리들이 바로 저 손에서 탄생되는구나 싶어서.
“세스 주방장님의 손은 나라에서 보호해야 마땅해요. 주방에서 마법을 부리니까요.”
“어쩜 그렇게 말씀을 사랑스럽게 하시나요? 혹시 수제 딸기 사탕은 더 안 필요하신가요?”
“그건 언제나 필수예요.”
“저도 항상 재료를 준비해 두고 있답니다.”
루시엘이 말갛게 웃자 세스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아가 마님, 실례를 무릅쓰고 한 번만 뺨을 만져 봐도 될까요?”
루시엘이 자그맣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얗고 말랑한 뺨을 살짝 만진 세스는 사르르 녹아내리는 얼굴로 말했다.
“흐윽, 너무 보드랍고 귀여워요. 아가 마님 볼은 몰랑몰랑 푸딩을 닮으셨어요…….”
레오니는 그런 세스와 루시엘을 다소 한심하단 표정으로 보았다.
“두리 다 이상한 고 알지? ……우아으!”
“레오니 뺨도 몰캉해요.”
“어머, 도련님 뺨은 더 귀여우셔요…….”
루시엘이 레오니의 불룩하게 나온 포동한 볼살을 살짝 쓰다듬자, 레오니가 눈을 깜빡이며 얌전히 누나의 손길에 볼을 맡겼다.
“말랑말랑해.”
그 모습이 마치 강아지처럼 귀여워서 루시엘은 보드라운 금발도 살짝 쓰다듬었다.
“나두 만질래. 뉴나 푸딩.”
“조금만이야.”
서로의 뺨을 어루만지는 두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주방장 세스도, 뒤에서 시중을 들던 로즈와 베시, 사샤, 에바도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딸기 다음은 양말 축제가 되겠어, 아가 마님이 좋아하실 모습을 생각하니 벌써 보고 싶어.”
에이프런 주머니에서 꺼낸 수첩을 보면서 로즈가 베시에게 소곤거렸다. 루시엘의 귀가 쫑긋 서자, 두 사람은 루시엘에게 아무것도 아닌 양 손을 흔들었고 에바가 두 사람에게 주의를 주었다.
한층 높은 테라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세 사람.
공작과 길리아트, 엘링턴도 아이들의 행복한 모습을 멀리서 보면서 미소 지었다.
“딸기 축제는 성공적이군.”
공작이 축제를 기획한 엘링턴을 칭찬했다.
“감사합니다, 각하. 다음은 뭘로 갈까요?”
“무엇이 좋을까.”
“레오니가 좋아하는 기린? 루시엘이 좋아하는 양말?”
“둘 다 막상막하인데요.”
“이러다가 일 년 내내 축제로 가득 채워지겠군.”
아이들을 위해 연신 축제를 기획하는 어른들의 사뭇 진지한 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