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36)화 (36/282)

<36화>

오랜만에 두 부자의 마음이 맞아 이야기가 더 길어졌다. 시간이 흐른 뒤 루이비드는 길리아트의 서재를 나서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다 마침 복도로 들어오던 루시엘과 마주쳤다.

“앗…… 시아빠. 할아버지랑 만나셨어요?”

“그래. 마법 수련에 진심이군.”

“네…….”

루시엘이 발그레 홍조를 띄우며 대답하자, 공작은 아이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땀으로 범벅이 될 때까지 수련한 모양인지 루시엘의 꼴은 엉망이었다.

“먼저 단장하고 오지 않고?”

“아, 과제에 대해서 여쭈러 왔어요. 물 계열 마법에 대해 궁금한 게 생겼거든요”

루이비드가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내 속성인데.”

“아…… 맞다. 물과 얼음 속성이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시아빠랑 잘 어울리시기도 하구요.”

“어떤 점이?”

그가 재미있다는 듯 턱을 괴며 물었다.

“어…… 음, 저기…….”

“인상이 차가워서? 아니면 성격이?”

“……아뇨. 물처럼 부드러우실 때도, 얼음처럼 카리스마 넘치실 때도 전부 다 멋지시니까요.”

루시엘이 방긋 웃자, 공작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내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우리 며느리가 뭘 좀 아는군. 그래, 궁금한 건?”

“아, 할아버지가 내주신 과제의 정답을 찾았는데 포그였거든요. 저는 단순하게 워터나 아이스 계열 마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혹시 다른 물과 얼음 속성 마법 중에 눈이나 비를 내리게 하는 마법도 있나요?”

“물론이지.”

공작이 싱긋 웃고는 루시엘에게 이리 와 보라며 손짓했다.

그가 중정으로 나가더니, 하늘을 바라보면서 푸른색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이윽고 자그만 비구름이 허공 위에 둥실 생기더니 점점 먹색이 되었다.

“우와.”

루시엘이 자그만 구름 가까이로 다가갔다. 이내 먹구름에서 비가 쏴아, 쏟아졌다.

루시엘이 손바닥을 내밀어 촉촉한 비를 만졌다,

“정말 비가 오네요.”

“루시엘.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

“네?”

루시엘이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이에게 쉽사리 묻지 못하겠는지, 난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만약에 네 아버지를 만난다면 어떻게 하고 싶지?”

“……아, 아버지요?”

말갛기만 하던 진홍빛 눈동자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루시엘은 유리관에 갇혀 죽음만을 기다리던 과거를 떠올렸다. 그 모든 게 백작의 욕심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언젠간 복수하고 싶어요. 제 손으로. 저는 그를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거면 답이 될까요?”

“……그래.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시아빠에게는 항상 감사하고 있는걸요.”

“그만 씻으러 가는 게 좋겠다, 흙바닥을 뒹굴다 온 강아지처럼 보이니까.”

그리 말한 공작이 루시엘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의 너른 가슴에 안긴 루시엘을, 비를 멈춘 자그만 비구름이 둥실둥실 따라왔다.

“앗, 저게 왜 따라오죠?”

“글쎄다?”

공작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내 햇살이 하얗고 몽실몽실해진 구름을 비춰 쨘, 하고 반원 모양의 무지개를 만들어 냈다.

그걸 본 루시엘이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무지개다! 처음 봐요!”

“비 온 뒤엔 무지개가 뜨는 법이지.”

루시엘이 공작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자신을 따라오는 구름과 무지개를 오래도록 보았다.

* * *

오르비아 백작은 밤을 꼴딱 새고 창백한 얼굴로 아침을 맞이했다.

오늘이 바로 그 악마 같은 벨슈타인 공작이 예고한 날이었다.

어이없는 소리라고 코웃음을 쳤지만 다른 가문도 아니고 벨슈타인이라니, 겁이 하나도 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벨슈타인이라면 분명 맨손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거리가 있으니 병력을 이끌고 오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도 소수 정예로 오겠지.

‘대비책이라도 만들어 두니 좀 낫군.’

불안한 눈을 굴리던 백작은 용병들이 숨어 있는 천정을 힐끗 보며 가슴께를 주물렀다.

정확히 정오가 되었을 무렵.

벨슈타인 공작가의 검은 마차가 도착했다.

마치 명부에서 온 듯한 새카만 마차였다.

이어서 마차에서 내린 것은…….

공작가의 부관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과 모자를 푹 눌러쓴 은발의 작은 여자애였다.

“저건…… 루시엘?!”

백작은 제 눈을 의심하면서도 이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루시엘이 제 발로 집에 돌아왔다니, 이번에야말로 절대로 자신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이가 고개를 살짝 들었고 백작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자그만 키와 은발, 그리고 진홍빛 눈망울은 분명 루시엘이 맞았다.

의외로 공작은 순진한 인사가 아닌가!

자신을 뭘로 보고, 아이와 함께 부관만 딸랑 하나를 보냈단 말인가?

‘꽤나 어리석군. 이제 루시엘은 다시 내 것이 되겠어.’

희열에 찬 얼굴로 백작은 집사와 함께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다가갔다.

부관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먼저 모자를 벗으면서 인사했다.

“벨슈타인 공작 각하의 부관 엘링턴 스튜어트입니다. 벨슈타인 공작가에서 혼인 계약 승인을 받기 위해 왔습니다.”

엘링턴의 말을 들은 오르비아 백작이 비웃음을 흘렸다.

“하하, 나는 루시엘을 보낼 마음이 전혀 없는데. 제멋대로 결혼이라니…… 참으로 어이없고 무례하군, 제아무리 공작가라도 하더라도 말이야! 루시엘, 이리 와라. 아비 곁으로! 응?”

손짓해도 오지 않자, 백작은 아이의 팔을 거세게 붙잡았다. 그러고는 강제로 끌어당겼다.

“드디어 찾았다. 아니, 이토록 친절할 데가. 루시엘을 찾으러 갈 수고를 덜어 주다니, 크큭.”

“……무슨 짓입니까? 옛정을 생각해서 루시엘 아가 마님의 얼굴을 보여 드린 것인데. 그 손, 놓으십시오!”

“멍청한 소리만 골라서 하는군. 이 애는 내 거야! 곱게 보내 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군.”

백작은 무섭도록 비열한 얼굴로 버둥거리는 아이를 붙잡아 집사에게 맡겼다.

“집 안으로 데리고 가!”

그러곤 숨어 있는 용병들에게 명령했다.

“움직여라!”

그러자 사방에서 용병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음. 역시 말로는 안 되는 쓰레기셨군요.”

엘링턴이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휘파람을 한 번 불었다.

그러자 마차에 마부로 앉아 있던 남자가 누더기 망토를 벗어 던졌다.

공작가의 검은 날개 기사단장, 자르가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흑색 일색인 그는 까마귀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는 일전에도 백작이 보낸 용병을 처리했었다.

엘링턴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며 말했다.

“단장님, 둘이서 상대할까요?”

“혼자서도 충분하니 각하께 통신하시오. 감히 하찮은 용병 나부랭이로 벨슈타인을 상대하려 들다니 가당치 않군.”

왠지 자르가 단장의 자존심을 오르비아 백작이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무소불위의 벨슈타인 공작가를 있게 한 것 중 하나가 검은 날개 기사단이었다.

자르가 단장의 기세와 살기에 놀란 용병들이 흠칫 놀랐으나 오르비아 백작이 말했다.

“상대는 한 놈이다. 쳐라!”

노예 검투사 출신이었던 자르가는 공작에게 그 실력을 인정받아 단장의 자리까지 오른 자였다. 검술 하나만큼은 아마 제국에서 손꼽힐 명장.

슷, 스슷!

자르가가 검을 휘두르자 푸른 검기가 튀어 나갔다.

“으아악!”

용병들은 자르가의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에 하나둘 쓰러졌다.

그렇게 용병들이 족족 쓰러지기 시작하자 오르비아 백작은 저택 안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그래. 내게는 루시엘이 있다……! 전부 잃어도, 루시엘만 있으면 된다.”

저택으로 튀어 들어온 백작이 서둘러 집사에게 말했다.

저택 안에 남아 있는 사용인들은 이제 집사 말고는 없었다. 모두 오르비아 백작의 매질과 히스테리에 달아났던 터였다.

“문을 잠가라! 어서!”

늙은 집사는 백작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긴 했지만, 미묘한 표정이었다.

“루시엘은 어디 있느냐?”

“저, 그것이…….”

집사가 쉬이 말을 잇지 못하자 오르비아 백작이 잔뜩 흥분해 그의 멱살을 쥐며 다그쳤다.

“루시엘이 어딨느냔 말이다! 내 황금알을 낳는 오리!”

“저, 저기에…… 끅.”

백작이 다급하게 집사가 가리킨 방향을 보았다. 소파에 누워 있는 소녀가 보였다. 백작은 그를 놓아주고는 웃으면서 루시엘에게, 아니 루시엘이라고 믿고 있던 것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루시엘. 네가 나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더냐? 배은망덕한 것!”

그러나 아이의 몸을 흔들기 위해 다가갔을 때였다. 풀썩, 하고 모자와 드레스를 입은 밀짚 인형이 쓰러졌다. 모자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루, 루, 루시엘?”

놀라 나자빠질 뻔한 오르비아 백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밀짚 인형을 들고 파르르 떨면서 캑캑거리는 집사를 노려보았다. 반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루, 루시엘이 왜 저 모양이냐?! 엉?”

“제가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자마자, 저렇게 인형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마법에 속으신 것 같습니다.”

“마…… 말도 안 돼!!”

백작이 목뒤를 잡고 그대로 쓰러졌다.

잠시 후 걸어 잠갔던 저택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집사는 달아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백작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 * *

똑똑.

나무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오르비아 백작은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몇 시간 동안 정신을 잃었는지 납덩이처럼 몸이 무거웠다.

빛줄기 하나 없이 사방이 새카맣다. 무엇보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몸이 덜덜 떨려 와 추웠다.

입 밖으로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입을 벌릴 수조차 없었다.

재갈이 물려 있던 터였다.

팔도, 다리도 움직일 수 없었다. 사지가 포박되어 있다.

뚜벅거리면서 다가온 구둣발, 구두에서조차 향기가 풍겼다. 상대가 그에게 다가오려 하는지 살짝 바람이 일었다.

“어우웁!”

상대가 픽 웃는 것이 느껴졌다. 몸이 짓눌려지는 듯한 살기에 숨통이 조여지는 듯했다.

“그냥 죽일까. 병신을 만들어 놓을까. 고민했지.”

이내 무섭도록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백작이 바닥에서 바르작거리면서 발버둥을 쳤지만 의미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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