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38)화 (38/282)

<38화>

축제의 피날레로 공작은 루시엘과 레오니를 불러 특별한 선물을 주었다. 이번 선물은 아이들을 위한 작은 돔 형태의 온실이었다.

“너희들이 직접 온실에서 식물을 키워 보는 거다. 딸기든, 꽃이든, 약초든. 무엇이든 키울 수 있지.”

“맨날 꿈꿔 오던 일이에요. 너무 좋아요.”

루시엘은 온실이 마음에 들어, 벌써부터 여기저기 거닐어 보았다. 무척 행복해서 심장에 토독토독 열매가 맺히는 것 같았다.

아기자기한 크기도 그렇고 햇살이 잘 드는 것도, 안에 있으면 보송한 이불을 덮은 것처럼 온화한 온도로 유지되는 것도 그랬다.

아직 아무것도 심지 않았지만 보드라운 갈색의 흙이 깔린 화단이 있는 것이 왠지 마음이 든든했다.

루시엘은 화단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소매를 걷었다. 자그만 단풍잎 손이 토닥토닥 고운 흙을 매만졌다.

루시엘이 그러고 있자, 레오니도 쭐레쭐레 따라와서는 똑같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화단을 바라보며 누나가 하는 양을 따라 흙을 토닥거렸다.

“여기에 무얼 심을 거지?”

공작이 묻자, 대답은 레오니가 빨랐다.

“바나나!”

“바나나라, 묘목을 구매하지. 루시엘은?”

“저는 좀 더 생각해 볼게요. 아무거나 심기엔 아까우니까요. 정말로 고맙습니다, 시아빠.”

공손히 인사한 후, 햇살처럼 맑게 웃는 루시엘의 미소에 공작도 유쾌해졌다.

“천천히 생각해라.”

공작은 식물을 직접 기르며, 놀고 배우라는 의미로 준 선물이었지만 루시엘은 하나의 실험실을 얻은 것 같았다.

과거의 루시엘은 보석을 끊임없이 만들다 마나가 전부 소진되어, 죽기 전에는 체내에 마나가 거의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이번 생에는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마나의 흐름이 불안정한 황태자가 안정화를 위해서 매일 마시던 약.

황성 약제사 시클라인 레니트가 약초 몇 가지를 손수 재배해 만들어 바치던 마나 영양제가 그것이었다. 그걸 루시엘도 만들어서 마셔 볼 계획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복용하면 분명 효과를 볼 터였다. 황태자도 몇 년 동안 길게 복용한 후부터 효과가 있었다고 하니까.

루시엘은 온실을 슥 둘러보았다.

공작성의 너른 정원에 비하면 소담한 크기였지만, 응접실 두 개를 합친 정도의 공간이었다.

“여러 가지 식물을 심어도 충분해.”

마나 영양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세 가지 약초가 필요했다.

타테아, 루가나무, 티에리 열매.

이 조합법은 훗날 시클라인이 개발하기에, 지금은 아무도 몰랐다.

우선은 루시엘이 기를 수 있는 약초인지, 알아봐야 했다.

루시엘은 장서관으로 가서 서가를 한참 뒤적거리다 약초 도감을 찾아냈다.

도감을 열심히 뒤적거린 결과 찾아낸 건 가장 일반적인 타테아에 대한 자료뿐이었다.

온실로 돌아온 루시엘이 그다음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레오니가 사샤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그사이에 레오니는 벌써 바나나 묘목을 심은 모양이었다. 뿌듯해하는 아이가 귀여웠다.

“뉴나, 이고 봐 바!”

바나나는 열대에서 자라는 잎이 넓은 활엽수였다. 덕분에 온실이 살짝 덥게 느껴질 만큼 온도가 높았다. 싱싱하고 새파란 잎이 보기 좋았다.

“예쁘다.”

“바나난 언제 나오지?”

목이 떨어져라 자신보다 키가 큰 바나나 나무를 올려다보던 레오니의 물음에 루시엘이 말했다.

“레오니가 정성껏 물도 주고, 돌보면 열매가 맺힐 거야.”

“웅.”

“뉴나는 모 심을 고야?”

“난 아직 고민하고 있어.”

“빨랑해.”

“왜?”

“바나나 나무 외로우니까. 칭구 엄써.”

“알았어. 친구 만들어 줄게.”

“응, 뉴나랑 키제프 형아 것두!”

“키제프도 식물에 대해 잘 알아?”

“웅, 아카데미에서 배운대써.”

“정말? 굉장하다.”

“우리 형아는 아는 것두 마나!”

루시엘이 레오니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말했다.

“레오니, 누나는 먼저 가서 고민 좀 더 해 볼게. 바나나 잘 키워.”

“웅!”

‘그러고 보니 아직 키제프에게 첫 서신을 보내지 않았네. 부엉이가 오면, 약초를 핑계로 보내 봐야지.’

루시엘이 미소를 지으며 온실을 빠져나왔다.

다음 날 솔방울 부엉이가 성으로 날아왔다. 루시엘이 공작성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먼 거리를 날아오느라 힘들었을 부엉이니 며칠은 쉬게 해 주고 먹이도 많이 주고 싶었다.

부엉이에게 ‘벨’이라는 이름도 붙여 주었다.

벨은 영리했다. 새장의 문을 열어 놓아도 얌전했고 루시엘이 늦잠을 자는 아침이면 부엉부엉 하고 울어 베시 대신 잠을 깨워 주기도 했다.

“읏…… 이런 걸 먹는다니. 그래도 많이 먹어.”

뽀송한 하얀 털을 가진 작은 부엉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꿈틀거리는 애벌레를 먹는다고 했다.

루시엘은 애벌레를 집게로 집어 먹이를 겨우 주고는 책상에 앉아서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무슨 말부터 적어야 할지 몰라 종이를 열 번도 넘게 구기고 난 후에야 편지를 완성했다.

벨의 발목이 너무 무겁지 않도록, 작은 쪽지를 발목에 묶어 창가에서 날렸다.

파드닥 하얀 날개를 펼쳐 날아간 벨이 기특해서 멀리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 * *

교실의 창가로 포르르 날아든 자그만 부엉이가 키제프의 자리로 날아와서는 머리를 까딱거렸다.

부엉이 전서구는 여자아이들이 주로 주고받는 것이었다. 남자아이들은 전서구보다는 직접 와서 말을 하는 편이었다.

키제프는 부엉이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 없이 생각했다.

‘내 껍데기만을 보고 반한 누군가의 고백 편지겠지.’

흔한 일이었다. 다만 키제프는 시계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업 시간에 대뜸 전서구를 보내는 간 큰 여자애도 있었나?’

교수가 키제프에게 온 부엉이를 힐끔거렸다.

“전서구는 쉬는 시간에 확인하도록 하세요.”

얼마 후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키제프는 아무도 없는 건물의 옥상으로 향했다.

제 어깨에 앉은 부엉이를 조심스럽게 팔로 옮겨 왔다. 부엉이가 이렇게 얌전하고 순한 동물이었나?

보드라운 촉감의 새하얀 털과 귀여운 생김새가 마치 그 애가 떠올랐다.

‘루시엘.’

이름마저 귀엽다니. 동글동글 부드럽게 발음되는 이름이었다.

키제프는 전서구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나 엘링턴과 간혹 연락하는 건 통신구를 사용하면 되었으니까.

아카데미에서 통신구는 학업 방해 및 사치 품목으로 금지되어 있었지만, 키제프는 교장의 배려로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하곤 있지만.

분홍색 실로 엮인 매듭을 풀자, 세 번 접은 쪽지에 가까운 편지를 펼쳐 볼 수 있었다.

근래 받은 고백 편지 중에는 가장 성의가 없었다. 봉투가 없으니 가문의 인장도, 서명도 없었다.

「안녕. 내 이름은 테드. 누군가는 이 편지를 받겠지? 전서구를 처음 산 기념으로 보내 봤어! 난 내년에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싶거든. 그래서 이렇게 편지로 용기를 내 보기로 했어.

아 참, 나 요즘 약초에 대해서 궁금한데 물어봐도 돼? 아카데미에서 그런 걸 배운다면 말이야.

내가 알고 싶은 건 타테아, 루가나무, 티에리에 대한 자료들이야. 혹시 알고 있니?

내 전서구는 솔방울 부엉이인데 너무 작고 귀엽지 않니? 부디 이 편지가 누군가에겐 닿기를. 그리고 답장이 오기를.

누군가의 친구가 되고 싶은 테드가.」

“뭐지?”

자신을 향한 고백 편지가 아니었다. 아카데미에 들어오고 싶은 아이의 편지라니. 하지만 부엉이는 정확하게 그의 자리를 찾아왔는데.

‘아무나 받아도 좋은 편지라면 그럴 리가.’

게다가 테드라는 이름은 남자애인 것 같은데. 남자애가 부엉이 전서구를 이용한다는 게 조금은 이상했지만 키제프는 편지가 마음에 들었다. 어느 바보가 보낸 실없는 편지인지 모르지만…….

그는 쓰레기통에 넣는 대신 주머니 안에 편지를 넣었다. 그러곤 부엉이를 쓰다듬고, 옥상 위에서 날려 주었다.

“……주인에게 돌아가.”

―규웃, 쀼, 부엉!

하지만 부엉이는 하늘을 한 바퀴 빙 돌더니 키제프의 어깨에 다시 포로롱 앉았다.

“안 가나?”

부엉이의 머리가 마치 대답하듯 까딱거렸다.

―벙, 부엉.

“……설마 답장해야 다시 돌아가는 건가?”

뭔지 모르지만 꽤 귀찮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아무 말이나 써서 부엉이를 보내 버릴까?’

「나 요즘 약초에 대해서 궁금한데 물어봐도 돼? 아카데미에서 그런 걸 배운다면 말이야.」

문득 편지에 적혀 있던 말이 거슬렸다. 마침 다음 수업이 약초학 수업이었다. 키제프가 가장 관심이 없는 수업 중 하나였다.

키제프는 어깨 위에 있는 부엉이를 슬그머니 돌아보다가 교실로 내려갔다.

“키제프 학생, 미안하지만 수업 시간에 부엉이는 전서구 쉼터에 맡기고 오도록 하세요.”

“네?”

‘전서구 쉼터라니, 그런 게 있었군.’

남의 일에는 무관심했던지라, 있는지도 몰랐다.

“그건 어디 있습니까?”

깐깐하기로 소문난 약초학 교수가 말없이 한 여학생을 지목하며 말했다.

“릴리 학생, 키제프에게 전서구 쉼터를 안내해 주고 오세요.”

“넷!”

릴리라는 여자애는 얼굴을 붉히더니, 앞장서서 키제프를 안내했다. 전서구 보호 쉼터는 아카데미의 휴게실과 의료실이 있는 동에 있었다.

키제프가 우뚝 걸음을 멈추곤 릴리에게 물었다.

“부엉이 전서구 쓰는 남자애 본 적 있어?”

“아니? 보통은 잘 없는데. 저어, 그치만 네가 이상하단 뜻은 아니야.”

“그렇단 말이지. 별종인가.”

키제프가 그 아이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렇게 작은 부엉이는 처음 봐. 이름이 뭐야?”

“내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편지에 이름이 벨이라고 적혀 있던 것 같았다.

“그렇구나. 키제프랑 이야기해 본 거 처음이야. 그 편지는 역시 고백 편지야?”

“아니.”

키제프는 짧게 대답하곤 다시 걸었다. 부엉이를 맡기고 교실로 돌아와, 약초 수업을 처음으로 필기까지 하며 착실히 들었다.

수업이 끝난 후에는 부엉이가 먹을 벌레까지 잡아다 먹였다.

“…….”

자그만 녀석이라 얼마 안 먹을 줄 알았는데 은근한 대식가였다. 입을 쩍쩍 벌리면서 벌레를 받아먹는 모습이 제법 귀엽기는 했지만.

역시 귀찮은 일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키제프는 책상에 앉아 펜을 쥐며, 편지에 쓸 말을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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