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루시엘이 황성에 있을 적 유리관 앞을 지키는 황성의 시녀들이 황후 폐하에 대해 속닥거리는 대화를 들었다.
‘그 이야기 들었어? 슈나이젤 후작 부인이 이국의 유리 장식품을 황후 폐하께 바쳤대.’
‘황후 폐하가 그걸 얼마나 아끼시는지 매일 들여다보신대.’
‘이제 한바탕 유행이 불겠네. 황후 폐하가 뭐든지 사용하시면 유행이 되니까.’
시녀들의 대화를 떠올린 루시엘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생각을 정돈했다.
‘황후 폐하의 탄신일에 아름다운 유리공예품을 선물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벨슈타인을 지킬 수 있다. 죽어 가는 유리공예도 살릴 수 있어.’
이득이 많은 일이었다.
나아가 벨슈타인의 경제와 황실에서의 입지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먼 미래에 황후와 우호적 관계를 도모하는 거다.
현재 벨슈타인의 군사력과 자금력은 막강하지만, 딱 한 가지 사교계 진출로 인한 문화적인 영향력은 약하다.
“황후 폐하의 탄신 선물로 아름다운 유리 공예품을 선물해 드리면 어떨까요.”
“황후 폐하의 탄신 선물이라니……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타이라 제국의 유행을 선도하는 분이니까요. 그렇게 되면 다른 귀족가에서도 줄줄이 의뢰가 들어올 거예요. 발루크 상단의 독점 문제도 이겨 내고, 이브나크의 경제도 살릴 수 있을지 몰라요.”
루시엘의 말을 들은 엘링턴의 안색이 밝아졌다. 최근 그 일로 두통까지 앓고 있었는데 왜 진작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자책하면서도 이 작은 아이가 기특해졌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하셨지요?”
엘링턴은 천천히 아이를 기다려 주었다.
“그냥 아주 오래전 기억이 떠올라서요.”
엘링턴은 가끔 루시엘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슬픔을 머금은 눈빛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 엘링턴이 가장 먼저 알아봐 주실 일이 있어요.”
하지만 곧 아이의 눈동자에 다시 생기가 가득 차올랐다.
“……어떤 일입니까?”
“황후 폐하의 탄신 선물을 만들 장인을 찾아 주세요.”
“하지만 발루크 상단이 장인을 거의 독점해 데려가서…….”
발루크 후작은 타 지역 출신의 베일에 가려진 자로 운영하는 상단은 규모가 상당했고, 힘이 있었다. 벨슈타인의 유리 공예를, 발루크 상단만의 물품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 가능할 만큼.
“제가 염두에 둔 사람이 있으니 유리공예장인은 함께 찾아봐요.”
루시엘은 과거 자신의 유리관을 만들어 주었던 그 장인의 얼굴을 기억했다. 유리공예에 열정을 가지고 있던 그라면 분명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 일이 각하의 허락을 받아 추진된다면, 제가 함께 도울게요. 일단은 엘링턴 생각인 걸로 해요. 아셨죠?”
“하지만…….”
“가신들은 제 말보단 엘링턴의 말을 더 귀담아들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루시엘이 사탕 하나를 더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뇌물 또 줄게요.”
얼떨결에 그가 또 받아 들자, 루시엘이 엉덩이를 툭툭 털고는 가방을 둘러매며 도서관을 떠났다.
자그만 뒷모습을 보며 엘링턴은 혼란스러웠다. 포슬포슬 귀여운 아이의 모습이었지만, 머릿속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따라갈 수 없달까.
‘종잡을 수 없는 분이야.’
그러곤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루시엘이 준 딸기 맛 사탕을 먹어 보았다. 깜짝 놀랄 만큼 맛있어서 그는 다시 사탕을 꺼내 살펴보았다.
“이거 진짜 맛있군.”
* * *
공작성의 주방장 세스 프란젤은 농장에서 수확한 딸기를 하나하나 고르는 중이었다. 가장 크고 싱싱한 특상품의 딸기를 재료로 써야 했다.
그녀는 요즘 인생의 커다란 낙이 생겼다. 바로 ‘루시엘’이라는 새로운 아가씨 덕분이었다.
그녀의 첫 식사부터 지금까지 꼬마 아가씨는 짧은 메모와 함께 나뭇잎, 꽃 한 송이, 자그만 조약돌 같은 선물을 남겨 주었다.
「행복을 알려 주어서 고마워요.」
「누군가 춤을 추고 싶으면 이 요리를 먹으라고 할래요.」
「고기는 믿음이고요.」
「이거 먹고 잠깐 여행 다녀왔어요. 천국.」
그렇게 매번 메모만 받아 보다가 지난번엔 자신도 용기를 내어 쪽지를 보내 보았다.
사탕을 만들 예정인데 무슨 맛이 좋으시냐고. 그리고 돌아온 것이 ‘딸기는 사랑’이란 답이었다.
귀여운 대답에 세스는 흐뭇한 미소로 다음 날 직접 설탕 반죽과 수제 딸기 퓌레로 정성을 다해 사탕을 만들었다.
그 사탕이 루시엘의 협상 수단이자 보물이 되어 버렸을 줄은 세스 자신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 * *
만찬 장소는 오 층에 자리한 널찍한 식당이었다. 성의 전경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창문이 있었고 대리석 바닥이 우아해서 루시엘은 이곳에서 춤을 춰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혹시 오늘은 다른 가족도 만날 수 있을까?’
그런 막연한 생각을 했지만 식당에는 가주인 공작님과 할아버님만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차려입은 루시엘에게 닿았다.
총총걸음으로 발을 내디딘 아이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뽀얀 피부와 어울리는 하늘색 원피스가 무릎 아래에서 나풀거렸다.
귀엽게 땋아 내린 양 갈래머리에는 색을 맞춘 하늘색 리본이 매달려 있었다. 더욱이 루시엘의 뺨은 첫 만찬에 대한 설렘으로 상기되어 복숭앗빛으로 발그레 물든 채였다.
“오, 이런 몰라볼 정도로 귀여운 꼬마 숙녀가 되었구나, 루시엘. 그렇지 않으냐?”
길리아트가 공작에게 묻자, 그는 물 잔을 들며 말했다.
“……예, 뭐. 입힌 보람이 있군요.”
루이비드 역시 루시엘의 귀여운 모습에 속으로는 흐뭇했지만 슬쩍 딴청을 피우는 척했다.
“아, 들으셨겠지만 의류점을 저 애에게 사 주었습니다.”
은근한 자랑으로 들리는 그 말에 길리아트는 내심 웃음이 나면서도 의아했다.
루시엘에게 그렇게나 냉정한 척 굴더니, 속마음은 아닌 모양이었다. 겉과 속이 다른 녀석 같으니라고.
하지만 루시엘이 드레스보다 좋아하는 것은 양말이라고 베시에게 들었다.
“잘했군.”
그리 말하면서 길리아트는 루이비드가 이 정보를 알아채기 전에 서둘러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루시엘이라면 의류점 같은 부담스러운 것보다는 귀엽고 아기자기한 ‘양말’을 훨씬 좋아할 터였다.
양말 나무를 꾸며 줄지, 양말로 인형을 만들지 길리아트는 손주 며느리를 위한 선물 생각에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루이비드는 눈을 끔벅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루시엘에게 말했다.
“첫 가족 만찬이니만큼 주방장이 신경 쓴 모양이군. 많이 먹으렴.”
쇠고기 스테이크와 삶은 돼지 뒷다리, 푹 익힌 닭고기 수프와 양갈비까지.
아이의 영양을 위해 특별히 육류만 꽉꽉 채운 요리들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루시엘은 눈앞에 가득 차려진 음식을 두고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와인으로 입맛을 돋우려던 공작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먹지 않지?”
양 갈비부터 붙잡고 뜯던 길리아트도 루시엘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루시엘, 입맛이 별로 없는 것이냐?”
“아뇨. 가족 만찬이라고 들어서 혹여나 다른 분이 오신다면 기다려야 하나 했어요.”
단번에 루시엘의 의도를 파악한 길리아트가 말했다.
“그랬군.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다 모일 수 없단다. 게다가 지금 성에 가족들이 전부 있지 않기도 하고. 그래도 레오니는 올 수 있을 텐데, 부르지 않은 게냐?”
“……불렀는데 조금 늦는 모양입니다.”
그때 마침 사샤의 손을 잡고 레오니가 나타났다.
“왔구나.”
“오, 어서 오너라, 레오니.”
“……녜.”
“거기 루시엘 누나 옆에 앉거라.”
“…….”
루시엘이 레오니에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안녕.”
“누나가 인사한다, 대답은?”
“……아, 안넝. 뉴나.”
둘만 있었다면 루시엘 따위에게 누나라고 부르는 일은 절대 없을 텐데. 지금은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레오니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포슬포슬한 머리칼을 살짝 세우고, 하얀색 슈트에 분홍색 리본을 맨 꼬마 신사는 억울함에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것처럼 얼굴이 얼룩덜룩해졌다.
루시엘은 귀를 의심했다. 저 고집불통 아이가 제게 ‘누나’라는 호칭을 쓰다니. 아버지를 무척이나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이 못내 분한지 레오니의 입술은 도드라질 정도로 삐죽 나와 있었다.
‘오리 같아.’
루시엘은 쿡쿡 웃다가 레오니와 눈이 마주쳤다. 레오니의 입 모양이 인상을 쓰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주글래?’
루시엘이 살짝 웃어 보이자 레오니가 시선을 피했다.
‘조그만 아이가 입이 험하구나. 무슨 뜻인지는 알고 쓰는 걸까?’
루시엘은 앞으로 벨슈타인에서 잘 지내려면, 더 적극적으로 이 아이를 자신에게 넘어오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공작에게 말했다.
“레오니 공자가 참으로 귀여워요.”
“얌전히 있으면 그렇지.”
길리아트도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응석받이 손주를 바라보았다. 어른들을 무서워하는지라 앞에서는 얌전했으나, 레오니는 사용인들 사이에서 사고뭉치로 소문이 자자했다.
특히 반찬 투정이 어찌나 까다로운지 레오니를 담당했던 주방장 세스는 네 번이나 같은 요리를 다시 만든 적도 있었다.
혹 관심받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지 걱정이 들기도 했었는데 마침 루시엘이 있으니 좋은 상대가 되어 줄 듯했다.
길리아트는 조용하면서도 분주하게 앞에 놓인 접시를 비우고 있는 루시엘과 깨작대면서 포크로 고기에 얹어진 야채를 골라내는 레오니를 보았다.
“그렇지. 루시엘이 레오니와 종종 식사를 하는 건 어떠냐?”
레오니와 둘만 있을 기회라고 생각한 루시엘이 아이를 힐끗 보며 대답했다.
“저는 좋아요.”
“…….”
반면에 레오니는 대답이 없었다.
“레오니는 편식이 아주 심한데, 루시엘은 아주 골고루 잘 먹으니 말이다. 게다가 어떤 음식이든 감사하면서 먹지.”
길리아트의 의견을 듣던 공작도 덧붙였다.
“편식은 고약한 버릇이지. 레오니, 할아버지 말씀대로 당분간 루시엘과 식사하도록.”
“……녜.”
차마 싫다는 말은 못 하고 순하게 대답하는 레오니의 얼굴에 그늘이 졌지만 루시엘은 반대였다.
‘이번 기회에 가까워져야지.’
뒤늦게 기억이 났다.
키제프만큼은 아니지만 레오니도 훗날 악명 높은 악당이 되었다. 그는 가문을 등지고 불법 조직에 가담하는 등 범죄에 연루되었다가 상대 조직의 보복으로 사망했다고 기사가 크게 났었다.
비뚤어지지 않았더라면 분명 훌륭한 마법사가 되어 키제프와 함께 가문을 이끌어 나갔을 텐데.
‘레오니는 알고 보면 상처받기 쉬운 여리고 순한 아이야. 처음부터 나쁜 사람은 없어. 이 아이가 밝게 자랄 수 있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