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5)화 (15/282)

<15화>

“그 하얀 머리요?”

“루시엘을 벌써 마주쳤나?”

“……녜. 아까요.”

“루시엘 폰 벨슈타인이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다.”

공작이 레오니를 향해 팔을 벌렸다.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었다. 레오니가 품에 안기자 공작은 아들을 무릎에 앉히곤 보슬보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보다 네 살이나 누나니까 버릇없이 굴지 말고. 알겠지?”

“……녜?!”

자신보다 고작 두 살 위인 줄 알았는데, 네 살이나 위였다니. 꼼짝없이 누나 대접을 해 주게 될 생각을 하자 레오니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우우, 절대 시러.’

“그 뉴나랑 형아랑 겨론해요? 시른데.”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공작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이때다 싶어서 레오니는 자신이 한 잘못만 쏙 빼놓고 루시엘이 자신에게 사탕을 주지 않고 약 올렸다고 일러바쳤다.

그러나 제 아들의 말썽과 성미를 모르는 공작이 아니었다. 루시엘에게 무례하게 대했을 확률이 높았다.

“……사실대로 말한 것이냐?”

“녜, 딘짜예요.”

“루시엘을 불러서 네가 예의 바르게 굴었는지 먼저 물어봐야겠다.”

“……이잉!”

“지금 사실대로 말하면 용서해 주지.”

결국 레오니의 작은 입술에서 술술 제 잘못을 실토했다. 공작의 눈썹이 움찔거렸으나 용서해 주기로 약속했으니 그는 아이를 더 다그치지는 않았다.

“혼내지 않을 테니 앞으론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해.”

“……녜.”

레오니가 뺨에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훔쳐 냈다.

“그리고 다음엔 누나, 한 개만 주세요. 라고 부탁하도록.”

레오니는 상상만 해도 싫었다. 루시엘은 자신보다 고작 한 뼘만큼 컸다. 별로 누나 같지도 않은데.

게다가 아버지가 늘 강조해 온 벨슈타인은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는 최강의 가문이었다. 어린 레오니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다.

“……녜? 아빠, 아니 아부디 저번 날에 그래짜나요. 벨슈타인은 누구에게도 고개 안 수긴다구.”

“그야 같은 벨슈타인에겐 예외지. 무엇보다 형의 부인이 될 레이디라면, 벨슈타인의 차남인 네가 존경하고 지키는 것이 마땅하지.”

당연하게 말하는 아버지에게 레오니는 ‘이게 아닌데’ 생각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당근 가방에서 꺼낸 딸기 사탕을 빨아 먹으면서, 루시엘은 도서관의 가장 구석진 서가 옆 간이 테이블에 걸터앉았다.

일반 자리는 의자가 너무 높아서 발이 동동 떴는데, 책을 두는 용도로 만들어진 이 간이 테이블은 루시엘의 자그맣고 짧은 다리에도 꼭 맞았다.

대신 책을 들고 읽어야 했지만, 그건 책을 쌓아서 책상처럼 만들면 괜찮았다.

가장 행복한 건 누구의 방해도 없이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루시엘은 당근 가방으로 자리를 맡아 두고, 책을 고르기 위해서 빙글빙글 주변을 돌았다.

생각해 보면 벨슈타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오늘은 벨슈타인에 관련된 책을 봐야겠어.”

공작에게는 벨슈타인을 구하겠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루시엘이 벨슈타인에 아는 것은 남에게 들은 것뿐이라 극히 정보가 적었다.

지식을 익혀 두면 안팎으로 도움이 되면 되었지 손해는 아닐 터였다. 루시엘은 도서관지기에게 달려가 말했다.

“역사서랑 지리서는 어느 쪽에 있어요?”

길지 않은 역사였기에 벨슈타인의 역사서는 빠르게 탐독할 수 있었다.

새삼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과 마주했는지 알게 되니, 루시엘은 더욱 가슴이 부풀었다.

초대 가주 길리아트는 십여 차례나 마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외에도 검은 장벽의 건축, 북부 지부의 마탑을 손에 넣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그려져 있었다.

그다음인 현 가주 루이비드의 업적은 너무도 많았다. 마물 토벌과 영토 확장을 밥 먹듯이 한다고 해서 정복 군주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무역과 사업에도 능력이 있어서 손대는 족족 성공해 벨슈타인의 부는 절반 이상이 그의 손으로 축적한 것이라 했다.

게다가 그의 카리스마는 놀라울 정도로 강해 살기를 흘리면 마족도 단숨에 제압할 정도로 뛰어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대단해.”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알아서 가문의 황금기를 만들었고, 지금도 만들어 가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이, 이런 분들에게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아냐. 나만이 미래를 알고 있는 걸.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어?’

미래에 황태자로부터 벨슈타인을 지키려면 황실의 다른 권력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벨슈타인에 힘을 실어 줄 수 있고, 황태자와는 뜻이 다른 사람.

그런 사람을 루시엘도 알고 있었다.

바로 황후 폐하.

황태자는 황후의 소생이 아니었다.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했지만 일찍 병으로 숨을 거둔 황비가 그를 낳았다고 들었다.

그러면 황후에게 점수를 따 두는 게 좋을 것이다.

‘뭐가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루시엘이 무심코 집어 든 책은 벨슈타인의 문화와 마을 축제, 전통 산업을 다룬 책이었다.

커다란 책을 펼쳐 놓고 보자니,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고개를 돌리던 루시엘은 서가를 서성이던 익숙한 뒷모습의 청년을 발견했다. 공작의 부관 엘링턴이었다. 그도 책을 찾으러 온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엘링턴도 루시엘을 발견하곤 다가왔다.

“……루시엘 아가씨, 책을 읽으러 오셨군요?”

“네.”

루시엘이 짧게 대답하자, 엘링턴은 아이가 쌓아 놓은 책들을 둘러보았다. 자기 몸의 절반 높이에 달하는 책들을 읽고 있는 아이가 귀여워, 보슬보슬한 머리를 쓰다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책을 훑어보던 엘링턴은 기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벨슈타인의 역사와 지리, 문화까지. 가신들이 두루 익힐 만한 지식을 아홉 살 아이가 읽고 있었다.

“벨슈타인에 대해 공부하고 계셨군요. 이렇게 어려운 책도 다 읽으시고 아주 기특하십니다.”

“저는 아는 게 없으니까요.”

‘그는 공작님의 부관이니 아는 게 많을 거야. 역시 친하게 지내면 좋겠지?’

루시엘은 한참 고민하다가 가방 안을 뒤적이며 눈을 깜빡였다.

“엘링턴은 사탕 좋아해요?”

“예? 아…… 저 주시려고요? 달달한 것은 가끔 기분 전환 겸 먹습니다.”

루시엘이 고개를 살랑 끄덕였다.

“진짜 진짜 아끼는 건데 엘링턴에게만 줄게요.”

“영광이군요, 고맙습니다.”

엘링턴이 양손을 내밀었다. 루시엘은 딸기 맛 사탕 하나를 그의 큼지막한 손바닥에 올려 주었다.

“자요.”

그 모습이 못내 귀여웠던지 그는 웃음을 참으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잘 먹을게요. 루시엘 아가씨.”

“네, 그리고 엘링턴.”

“예, 아가씨?”

“뇌물이에요. 우리 친해져요.”

“예에?”

그 말을 들은 엘링턴의 눈동자가 커지고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가득히 피어올랐다. 왠지 감격스러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런 뇌물이라면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열 개도 받을 수 있겠군요.”

“열 개나 주면 뇌물 수수 혐의에 걸릴지 몰라요.”

“그래서 이 달콤한 뇌물을 주시는 이유는요? 원하시는 게 있나요?”

루시엘이 기다렸단 듯이 자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화가 통하네요. 엘링턴은 똑똑하고 아는 것도 많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귀 좀.”

루시엘의 손짓에 엘링턴이 키를 낮추며 귀를 가져다 대었다.

“제 편이 되어 주세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했는데. 엘링턴은 흔쾌히 말했다.

“그거야 사탕을 안 주셔도 기꺼이 그럴 겁니다. 얼마든지 루시엘 아가씨의 편이자 친구가 되어 드릴게요.”

“좋아요. 그럼 제가 물어보는 거 다 알려 주기예요?”

“제가 대답할 수 있는 한에선 그러지요.”

“엘링턴은 어떤 책을 찾나요?”

“아…… 풀리지 않는 답이 있어서 자료를 찾고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루시엘의 물음에 엘링턴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산사태도 예측했던 아이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까진 괜찮을 거란 계산이었다.

“실은…… 이브나크 마을이 급격하게 죽어 가고 있어 문제입니다. 그 마을의 영지민 대다수가 공방 기술자였는데 물건을 찾는 사람이 없다 보니 도태되고 있거든요.”

“원인은요?”

“발루크 상단에서 더 저렴한 물건을 대량으로 내놓고 있어서 공방 물건들은 팔리지를 않습니다.”

“흠…… 어떤 종류의 물품이죠?”

“유리로 제작한 공예품입니다. 그릇도 있고 장식품도 있지만 이제 발루크 상단 외의 제품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유리공예라고요?”

유리공예라고 하니, 불현듯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황태자에게 붙잡혔을 때, 루시엘을 가둘 유리관을 만들기 위해 벨슈타인 출신의 유리 공예 장인을 데려온 일이 있었다.

그 유리관에 들어가는 건 정말 끔찍한 기억이었지만, 장인의 솜씨만큼은 무척 대단했다.

세밀하고 찬란한 무늬와 색색의 유리로 아롱졌던 아름다운 유리관.

그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루시엘을 보며 이렇게 속삭였다.

‘평생 배운 유리공예로 사람을 가두는 물건을 만들 줄이야……. 제가 돈을 벌어 가지 않으면 가족들이 모두 굶습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장인은 루시엘 대신 진심으로 눈물까지 흘리며 슬퍼해 주었다. 루시엘은 그의 상황이 이해되었다. 그렇게 가난한 현실에 부딪히지 않았다면, 그는 훌륭한 유리공예가로서 예술성 높은 작품을 많이 탄생시켰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루시엘이 보기에도 무척 대단하고 아까운 솜씨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읽은 책에서도 유리에 관련된 내용이 있었다. 루시엘은 아까 덮어 두었던 책장을 다시 펼쳤다.

「마을 축제 날에는 집집마다 색색의 예쁜 유리종을 매달아 놓는다. 딸랑딸랑, 맑은 종소리가 들리면 아이들은 노래하기 시작한다.」

“……옛날에는 축제 때 이런 전통도 있었어요? 그만큼 유리가 유명했었군요.”

“예. 지금은 사라졌지만 20년 전쯤에는 유리를 만드는 공방이 꽤 많았습니다. 이젠 다들 돈벌이가 되지 않아서 다른 일로 전향했지만요.”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던 유리공예 장인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지금쯤 그 장인은 그때보다 더 젊은 청년일 것이다.

‘그때 그 장인도 유리공예가 사장되어서 더 어려웠었지.’

“그래서 다시 축제를 살려 볼까 합니다만.”

“축제는 일시적이라 별로 효과가 없을 거예요.”

뾱뾱. 뾱.

루시엘이 고뇌하면서 서성거렸다. 그녀의 슬리퍼에서 나는 소리에 엘링턴은 쿡, 하고 터지는 웃음을 참으면서 기다렸다.

루시엘은 다시 머릿속을 차근차근 더듬어 보았다. 그러자 가물거리던 기억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맞아. 그 일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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